#41화. 第九章 파란(破卵) (1)
후욱! 훅! 훅!
흑구가 거친 숨을 뿜어냈다.
자천령(恣擅嶺)은 명마인 흑구에게도 힘든 산인가 보다. 혀를 길게 빼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몽설은 흑구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힘들지?”
후욱! 훅!
흑구가 힘차게 산을 올랐다.
발굽에 차인 돌덩이들이 산비탈을 타고 굴러 내려갔다.
“미안. 조금만 가면 정상이야. 거기서 좀 쉬자.”
몽설은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말 등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계속 말을 타고 갔다.
사실, 그녀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서 사방을 살피는 중이었다.
‘추격이 없어.’
원래 자천령은 깊고 높은 산이라서 사람 발길이 뜸한 곳이다. 산을 잘 타는 사람도 자천령까지 오르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릴 정도로 높고 험하다.
하루 만에 자천령을 넘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산에서 밤을 맞이하는데, 자천령에는 민가도 없어서 비박을 해야만 한다.
이런 이유로 취화원 살수들은 자천령을 이용한다.
살행에 나갔다가 제대로 탈출하지 못하고 꼬리를 밟혔을 때는 반드시 자천령을 넘어서야 한다.
산을 넘으면서 추격자를 완전히 따돌리려는 것이다.
몽설은 아주 크게 실패했다.
살행은 성공했지만, 꼬리를 단단히 잡혔다. 활검문 입에서 ‘취화원’이라는 말까지 거론되는 판국이다.
아걸 덕분에 요행히 추격은 피했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후욱! 후욱!
흑구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미끄러운 돌 모래 길을 올라섰다.
자천령이다.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큰 나무에 가려서 볼 수 없었던 산길로 환히 보인다.
추격자는 없다.
‘이렇게 없을 수가. 왜 추격이 없지? 내가 취화원 살수인 것을 짐작했으면 자천령을 막았을 텐데.’
꼬리 잡힌 취화원 살수들이 자천령을 통해서 빠져나간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입을 열어서 말하지는 않지만, 아는 사람은 거의 다 안다.
그런데도 취화원은 계속 자천령을 고집한다.
추격자를 따돌리기 위해서 자천령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자천령만큼 추격자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곳도 없기 때문에 이용하는 곳이다.
추격자가 계속 따라붙는다면 자천령에서 따돌린다.
그래도 따돌리지 못하고 꼬리가 잡혔다면 취화원으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혹은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자진할 수도 있고.
어쨌든 취화원만큼은 보호한다.
꼬리 잡힌 살수는 삼수탈겹(三守奪裌)이라는 관문을 거친 후에야 취화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자천령에서 추격자를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탈겹이다.
몽설은 말에서 내렸다.
흑구는 고삐를 매어 놓지 않아도 도망가지 않는다. 멀리 떨어지지도 않는다. 주인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주인 곁을 떠나지 않는 명마 중의 명마다.
흑구에게 휴식을 주고, 산길을 지켜봤다.
추격자가 수림 속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천령 정상 부근은 키 작은 주목(朱木) 군락지다. 숨을 곳이 없다. 눈에 불을 켜지 않고 편안하게 지켜봐도 환히 보인다.
몇 번이고 확인했다. 추격은 없다.
자천령에 오른 후, 산등성이를 따라서 사십 리를 가면 흑수곡(黑手谷)으로 빠지는 소로가 나온다.
이즈음, 몽설은 추격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산등성이를 따라오면서 계속 살펴봤는데, 따라붙는 사람이 없다. 새나 투견 같은 짐승도 따라오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꼬리 잡힌 살수가 자천령으로 향할 경우, 무사히 취화원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십에 하나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모두 자천령에서 죽는다.
운이 무척 좋아야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인데, 너무 편안하게 빠져나가고 있다.
정말 운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몽설은 흑구를 재촉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방법이 있다. 두 번째 탈겹, 이수탈겹을 하면 알게 된다.
흑수곡 산길을 따라서 한 시진 가량 하산했다.
몽설은 이 길을 이용한 적이 없다. 자천령을 통해서 본원으로 돌아간 적이 없다. 하지만 자천령과 흑수곡에 대한 말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서 알고 있다.
산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오른쪽으로 가면 흑수곡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화전민촌으로 가게 된다.
몽설은 왼쪽으로 길을 잡았다.
“어서 와. 고생했지?”
그녀가 화전민촌에 들어서기 무섭게 낯선 아낙이 반갑게 달려와 맞이했다.
‘누구……?’
몽설은 묻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화전민촌 사람들은 취화원에 손을 보태주고 있다. 꼬리 잡힌 살수들이 탈출할 수 있게끔 돕는다.
“걱정하지 마. 따라붙는 놈들 없어.”
“그래요?”
몽설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화전민촌 사람들은 무인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또한 취화원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도 아니다. 매년 취화원에서 일정 금액을 받고 손을 보태주는 것일 뿐이다.
이들이 하는 말은 절반쯤 꺾어 들어야 한다.
추격자가 이들 눈에 띄겠는가? 이들이 무인의 은신술을 알아보겠나?
이들은 노방(路傍)을 설치해놓고 누가 걸려들지 않으면 추격자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이들은 산에서 살기 때문에 산을 아주 잘 안다. 새가 무리 지어서 날기만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한다. 올빼미 소리, 산 짐승 소리도 알아듣는다.
살수들이 보지 못한 것, 느끼지 못한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무인의 안목이 아니라 산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말해 줄 수 있다.
“저쪽 갈색 대문 집 보이죠?”
아낙이 썩어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대문을 가리켰다.
“네.”
“저 집이 촌장 집이라오, 자세한 말은 가서 들으시고. 어째? 이놈, 여물 좀 먹일까?”
아낙이 흑구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한 마디로 돈 달라는 소리다.
“마방에 있던 아삼이라는 사람, 적랑대 살수였지 뭔가. 노호조파검을 상당히 잘 썼대. 오죽하면 귀찰검이 한 방에 날아갔을까. 휘우! 지금 활검문은 초상집이지.”
촌장은 대뜸 몽설이 궁금해 할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몽설은 아걸과 헤어진 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모든 일에 귀 막고 눈 닫은 채 산길만 더듬어 왔다. 그래서 근간에 벌어진 일은 전혀 모른다.
“아삼은 어떻게 됐어요?”
“죽었지.”
“죽……어요?”
“아! 귀찰검을 죽였는데 그럼 살 수 있을 것 같아? 성검문에서 나왔다는 사람에게 훅 갔지.”
“아, 네…….”
몽설은 말끝을 흐렸다.
아삼이 죽었구나. 할배가…… 기어이 죽었구나.
몽설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던 노인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악귀였을망정, 몽설에게는 아주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몽설이 급히 물었다.
“아걸은요?”
“아걸? 지금 한참 쫓기는 중이지? 아마 죽었을 거야. 아삼을 죽인 자가 쫓고 있거든. 그자, 활검문 십 검이 찍소리도 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고수였대.”
“네에…….”
몽설은 힘없이 대답했다.
추격자가 자신을 따라붙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촌장 말대로라면 아삼은 활검문을 아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십검이 아삼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죽음을 면치 못했다니 말 다 한 것이다.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정신이 없었을 게다.
개망나니 강조의 죽음 따위는 이미 잊혀졌다.
살수를 잡기 위해서 펼친 천라지망이 아삼과 아걸을 잡는 데 사용되었다.
더욱이 두 사람은 그녀가 움직인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움직였다.
이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아삼과 아걸이 일부러 눈길을 돌려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전에 그들을 만난 적이 있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는 게 없다.
분명히 초면이요, 낯선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목숨까지 잃어 가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거지? 자신이 강조를 죽이기 전까지만 해도 동승에서 잘 살았는데, 왜 갑자기 펄펄 날뛰는 거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수두룩하다.
어쨌든 두 사람 덕분에 추격자가 사라졌다.
활검문은 앞으로도 취화원에 시비를 걸지 못한다. 취화원에서 강조를 죽였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무엇을 두고 시비를 걸 것인가.
“유운검도 죽은 것 같아. 말로는 행방불명이라고 하는데, 그 바닥에서 행방불명이면 죽은 거지 뭐. 십 검 중에 두 사람이나 죽다니 무슨 일이래.”
“그러게요.”
“좌우지간 자네는 걱정할 것 없어. 푹 쉬다가 가.”
“네.”
몽설은 힘없이 대답했다.
일신이 안전하다는데, 왜 자꾸 힘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왜 자꾸 아삼, 아걸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가슴은 또 왜 이토록 먹먹해지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탈출구, 삼수탈겹의 완성은 취화원이 결정한다.
취화원은 이미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낱낱이 꿰고 있다.
본원 살수가 살행에 나섰으니, 뒤를 세심히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꼬리 잡힌 살수의 경우에는 더욱 유심히 살펴본다.
자칫 본원에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정보망을 총동원해서 살핀다.
버려야 하는 패일까,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살려야 할까.
그 해답이 삼수탈겹이다.
“쯧! 비루먹은 말을 타고 어디까지 가려고? 너무 말라서 십 리 밖에서도 알아보겠네.”
길가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노파가 중얼거렸다.
몽설은 말에서 내렸다.
“또 봤으면 좋겠는데. 우리 또 보자?”
몽설은 흑구의 목덜미를 토닥토닥 어루만졌다.
노파가 말을 놓고 가란다.
취화원은 어떤 결정을 했을까? 만약 버리자고 결정했다면 흑구는 죽을 것이다. 살행에 나갔다가 묻혀 온 모든 찌꺼기를 말끔히 소각시킬 테니까.
흑구에게 미안하지는 않다. ‘버리는 패’라면 흑구도 죽지만 그녀도 죽는다. 곧 다시 만나서 저승길을 나란히 걷게 된다. 흑구만 죽는 게 아니니까…… 미안하지 않다.
토닥! 토닥!
몽설은 흑구의 목덜미를 쓰다듬다가 말을 밀어냈다.
흑구는 정말 영물이다. 몽설의 뜻을 읽고 따라오지 않는다. 떠밀린 자리에 서서 묵묵히 풀을 뜯어 먹는다.
길가에 가림막이 쳐져 있다.
사람이 오가는 길인데…… 길가 한쪽에 광목으로 사방을 막아서 시야만 막아놓았다.
몽설은 가림막 안으로 들어갔다.
취화원에서 누누이 들었던 말대로 가림막 안에는 옷 한 벌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몸에 지닌 모든 소지품을 내려놓는다.
검도 풀어놓는다.
버리는 패라면 두 번 다시 쥐지 못할 것이고, 살려준다면 취화원에 도착했을 때 다시 쥐어질 것이다.
입었던 옷도 벗는다. 그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살행에서 쓰였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휘우!”
몽설은 가늘게 한숨지었다.
말을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가림막 안으로 들어서니 상당히 기분 나쁘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타인 손에 맡겨 놓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이 그렇지만.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반 시진 정도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체 무작정 길 따라서 걸어갔다.
멀리…… 마차가 보인다.
‘살았다!’
물론 산다. 취화원이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수탈겹에서 확신했다. 하지만 마차를 보게 되자 안도감이 확 밀려온다. 마차가 이토록 반갑기는 처음이다.
삼수탈겹은 매우 잔인한 과정이다.
추격자들을 따돌리지 못한 살수에게는 피 말리는 죽음의 경로다.
마차를 봤으면 다 온 것이다. 마차는 추격자가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만 마중 나온다.
추격은 완전히 따돌렸다.
“어서 오세요.”
어자석에 앉아있던 여자가 공손하게 말했다.
낯선 여자다. 하지만 이런 일을 많이 해본 듯 익숙하게 행동한다.
몽설은 마차를 탔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서 마차에 머리를 기대고 비스듬히 누웠는데…… 아걸이 떠오른다. 눈에 밟힌다. 아삼의 음성도 가슴 아리게 울려온다.
-눈 속의 꿈인가, 꿈속의 눈인가.
몽설이라는 이름을 말해 주었을 때, 아삼이 한 말이다.
눈을 감는다.
아삼은 이미 죽었고, 아걸도 곧 죽는다. 활검문이 저리 극성인데 어떻게 살겠나.
따각! 따각! 따각!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