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第九章 파란(破卵) (3)
타닥! 타닥!
촛불이 타들어 간다.
불을 켜기 전에는 어린아이 팔뚝만 했던 대황촉이 이제는 탁자가 타들어 갈 정도로 낮게 가라앉았다.
형옥주는 두툼한 책을 앞에 놓고 고민했다.
기망살수는 매우 골치 아프다. 판단을 내리는 데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특히, 몽설처럼 매우 운이 좋아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온 경우는 더 조심해야 한다.
꼬리 잡힌 살수를 기망살수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살수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회유(懷柔)다.
목숨이 아까워서 적에서 투항하는 경우, 이중간자로 활동하는 경우…… 정말 피곤해진다.
멀쩡하게 살아왔다면 반드시 기망 여부를 살펴야 한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기망살수 한 명이 취화원을 뿌리째 흔들 수 있다.
살수가 꼬리를 잡히면 죽는 게 마땅하다.
무공이 워낙 강해서 활검문을 압도할 수 있는 살수는 생각하기 어렵다.
활검문 입장에서도 살수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강조 집안은 활검문 일 년 예산 중 절반가량을 감당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보물처럼 감싸 안아도 부족한 귀빈이다. 그런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살수를 살려 보내나.
활검문은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럼 몽설이 백만대군에게 포위되고도 멀쩡하게 살아왔다는 말이 된다.
‘몽설 말이 사실인가? 거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확해.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아.’
바로 그 점이 형옥주를 고민하게 만든다.
어떤 일이건 완벽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강조를 죽인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그동안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큰 사달이 났다.
이 정도 사건이면 약간이라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너무 완벽하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취조가 끝났는데도 사건을 정리하지 못하고 고민한다.
“하아!”
생각을 거듭하지만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겠다. 깊은 한숨만 쏟아져 나온다.
어느덧 날이 밝아왔다.
창문을 통해서 새날의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꼬박 밤을 밝힌 것이다.
몽설의 진술은 아귀가 착착 들어맞는다. 어느 곳도 의심할 수 없다. 형옥에서 확인한 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그 점이 또 고민하게 만든다.
“더 두고 봐야 해.”
형옥주는 탁자에 놓인 책을 집었다.
몽설 사건은 미결(未決)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동안 지켜봐야겠다.
저벅! 저벅!
그녀는 미결 서가로 걸어갔다.
…정말 미결로 처리해도 되나?
그녀는 다시 한번 망설였다.
그녀의 판단은 매우 중요하다. 형옥주가 살수에게 의심쩍다는 느낌을 던지면, 그 살수는 향후 살행에 나서지 못한다. 취화원 동료들의 감시를 받게 된다.
‘그래도 안전한 것이 낫지.’
형옥주는 몽설의 진술서를 미결 서가에 놓았다.
미결 서가!
이곳에 진술서가 놓인 기망살수치고 뒤가 좋은 살수는 없었다. 형옥주의 의심은 언제나 얼마 가지 않아서 현실로 둔갑했다. 그들은 모두 형옥주를 원망하며 죽었다.
이런 부분에서 형옥주의 촉은 매우 탁월하다.
몽설도…… 진술은 앞뒤가 딱 들어맞지만, 왠지 모르게 의심이 든다. 진실을 다 말한 게 아니라는 느낌이다.
이제 아침이 되면 본원을 향해 밀서가 날아갈 것이다. 몽설을 계속 감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고, 바로 장로 회의가 소집될 것이다.
‘됐어.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거야.’
형옥주는 손가락으로 몽설의 진술서를 톡톡 건드린 후 돌아섰다. 그때,
“악!”
밖에서 짧은 단발마가 울렸다.
아주 잠깐 들린 소리라서 잘못 듣지 않았나 싶기는 한데, 분명히 비명이 맞는 것 같다.
뱀 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내지르는 비명이 아니다. 처절한 비명,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비명이다. 배 속에서부터 쥐어 짜내는 비명이다.
쉬익!
형옥주는 재빨리 검을 집었다.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누가!’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빠르다.
비명이 터졌다고 생각한 순간, 형옥주는 이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한데,
“훅!”
형옥주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다시 방안으로 물러섰다.
사내, 거친 사대가 걸어오고 있다. 자신을 향해서, 자신의 거처로 거침없이 걸어온다.
취화원 형옥에는 사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여인뿐이다. 간수도 죄수도 여인이다. 그러니 형옥에 나타난 사내는 침입자일 수밖에 없다.
“웬 놈이냐!”
형옥주가 검을 겨누며 고함쳤다.
그녀의 고함에는 진기가 실렸다.
사내를 향해서 물은 말이지만, 형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쩌렁 울렸다.
비명을 듣지 못한 사람도 그녀가 내지른 고함은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움직임이 없다. 사방에서 제자들이 뛰쳐나와야 하는데 조용하기만 하다.
‘모두 당했다!’
형옥주는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이 살행이다. 은밀히 침입해서 목표를 제거하고 나오는 일을 가장 잘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안다.
“네놈들, 누구냐!”
형옥주의 음성에 불안감이 깔렸다.
사내는 한 명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적어도 이십여 명쯤 되는 것 같다.
사내들이 제자들 숙소에서 나오고 있다.
손에 칼을 들고 있는데, 방금 사용했는지 붉은 핏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제자들이 모두 당했다.
바로 곁에서 사람이 죽고 있었는데, 자신은 까마득히 몰랐다.
상당한 고수들이다. 살수가 아니다. 이들은 은신술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거대한 파도처럼 무력으로 밀고 들어왔다. 살수들이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강한 강자들이다.
더욱 무서운 점은 사내들의 눈가에 사람을 죽였다는 자책감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살수가 사람을 죽여도 찜찜한데, 이들은 오히려 웃는다.
살인을 즐긴다!
형옥주를 향해서 다가오던 사내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아줌마. 이제 아줌마밖에 안 남았는데. 말로 할까? 아니면 짓이겨 줘?”
“뭐, 뭐 하는 놈들이냐!”
형옥주는 재빨리 사내의 전신을 훑었다.
싸움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공의 우열을 가늠해야 하는데, 도무지 사내가 읽히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무공을 구사하는지 감도 안 잡힌다.
오른쪽 허리에는 칼, 왼쪽 허리에는 검.
도법을 구사하는지, 검법을 구사하는지…… 도검을 같이 사용하는 무인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다.
사내가 문 앞까지 다가왔다.
“대답이 틀렸잖아. 말로 할래, 짓이겨 줘? 이런 공갈 협박은 형옥에서 더 잘 알지 않나? 아줌마, 지금 내 말은 어떻게 들려? 그냥 공갈 같아?”
상대할 수 없는 강자다. 그렇다면 선제공격이 답이다. 먼저 치고 물러선다.
생각이 정리되자마자, 몸이 감각적으로 퉁겨져 나갔다.
쒜에엑!
검이 문 앞에 서 있는 사내를 훑어갔다.
상반신을 곧장 찔러간다. 물론 가까이 바짝 붙으면 검초가 변화할 것이다. 방울뱀처럼 검 끝이 떨리면서 가슴을 베고, 쭉 내려와 허벅지를 가른다.
비사찰령(飛蛇礸欞)이라는 검초다. 비사검(飛蛇劍) 십육식(十六式) 중 가장 빠른 검초이기도 하다.
“킥! 말로 해도 되는데, 꼭 이렇게 짓이겨 달래요.”
사내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비웃었다.
형옥주는 눈앞에서 칼날이 번쩍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봤다. 허리에 있던 칼이 느닷없이 얼굴 앞에 세워지더니, 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순간,
“아악!”
형옥주는 미간을 확 찡그리면서 비명을 쏟아냈다.
칼이 어느새 허벅지를 갈랐다. 칼날이 너무 깊이 박혀서 뼈 있는 곳까지 파고들었다.
사내는 칼을 뽑지 않았다.
그가 허벅지에 박힌 칼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어떻게 할지 알지?”
“너! 악!”
형옥주는 또 비명을 내질렀다.
입을 꾹 다물고 비명을 쏟아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칼이 뼈를 훑으면서 흘러내린다. 살을 깎는다. 살을 일시에 싹 베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깎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에 회오리쳤다.
쓰윽!
사내가 허벅지 박힌 칼을 뽑아냈다.
그가 칼을 팔에 댔다.
“다음은 여길 썰 거야. 아이구! 이놈 이거 언제 이렇게 이가 빠졌지? 아예 톱니가 됐잖아? 이거…… 아줌마한테 되게 미안하게 됐는데. 꽤 아프겠어.”
사내가 칼을 들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칼은 이가 빠지지 않았다. 원래 톱처럼 생긴 거도(鋸刀)다.
사내가 안색을 차게 굳히며 말했다.
“묻는다. 이번에 돌아온 기망살수, 비록은 어디 있지?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은 기망살수 비록이다.”
‘몽설의 진술서.’
형옥주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말이냐? 기망살수 비록이라니?”
퍽!
“악!”
형옥주는 느닷없이 가해진 일격에 비명을 쏟아냈다.
이번 공격은 준비 없이 당했다. 사내가 칼날을 보고 있었는데, 그 칼이 예측 불허한 각도에서 내리 찍혔다.
이번에도 칼은 뼈에 닿았다.
칼을 뽑아내지 않은 상태이고,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살을 도려낼 태세가 끝났다.
‘오늘 죽는다.’
형옥주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으악!”
“아아악!”
밖에서 비명이 계속 들려온다.
이들은 형옥에 있는 간수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지금은 죄인들을 죽이고 있다.
“비켯! 이 음악한 놈!”
겁탈하는 소리도 들린다. 아니, 아주 많이 들린다. 상당히 많은 여자들이 봉변을 당하는 중이다.
이놈들, 눈에 보이는 게 없다.
‘무림에 이런 놈들이 있었다니!’
형옥주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마인들이 성검문을 공격해서 문주를 비롯해 세 자식을 죽인 사건은 파장이 매우 컸다.
허도기는 전 무림에 마도 소탕령을 내렸다.
그동안 악행을 일삼거나, 마공을 수련했거나, 도적, 비적, 수적질을 하던 자들이 일거에 소탕되었다.
그 선두에 소축십검이 있다.
성검문이 허공부라는 이름으로 불릴 즈음에는 마인들의 씨가 마른 상태였다.
중원에서 마(魔)라는 말은 완전히 사라졌다.
살수문파도 열에 아홉은 사라졌다. 큰 문파, 작은 문파는 상관이 없다. 최대한 깊숙이 숨을 수 있으면 살고,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죽는 시기였다.
칼을 들고 있는 사내, 이런 자들은 그때 모두 사라졌는데.
“기망살수 비록!”
사내가 눈빛을 차갑게 굳히며 물었다.
형옥주는 독사 같은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몇 살이니?”
“뭐?”
“칼은 더럽게 날카로운데, 하는 짓은 꼭 어린애 같아서.”
“큭큭큭!”
“아이야, 어른이 말을 할 때는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야. 그러니 귀 기울이고 들어야지.”
형옥주가 타이르듯 말했다.
순간, 사내와 형옥주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눈빛과 눈빛이 불꽃을 튀기며 엉켰다.
“이런!”
사내가 참담한 신음을 흘렸다.
반면에 형옥주는 웃었다. 웃으면서 고개를 뒤로 툭 꺾었다. 입에서 고약한 냄새와 함께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입에 물고 있던 독단을 깨문 듯하다.
“피해!”
사내가 버럭 고함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형옥은 만일에 대비해서 폭파 설계가 되어 있다. 허공부 소축십검이 밀고 들어올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옛날 유산이다.
형옥주는 기관장치를 가동시켰다.
사내의 칼이 팔을 가를 때, 그녀의 손은 탁자 밑에 있던 밧줄을 힘껏 당기고 있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말 몇 마디 나누는 시간만 벌면 형옥에 들어온 자들은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쉿! 쉿쉿쉿!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내들이 메뚜기처럼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