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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44화 (44/600)

#44화. 第九章 파란(破卵) (4)

취화원주의 거처에 많은 사람이 모여 앉았다.

그들은 차분하게 앉아서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혹은 차를 마시기도 했다.

회합을 하려고 한다.

아직 사람이 모두 모이지 않아서 안건을 토론하지 않고 기다리는 중이다.

“원주님, 언질이라도 주시죠? 이번에 동승에서 난리가 났는데, 그 일과 연관 있는 겁니까?”

모인 사람 중 한 명이 웃으면서 물었다.

취화원주는 뒷짐을 진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짹! 짹! 째짹!

작은 새들이 화원 사이를 누비면서 짖어댔다.

아침 특유의 맑은 공기와 청아한 새소리는 유독 잘 어울린다. 거기에 꽃도 섞여 있으면 금상첨화다.

“새 소리가 참 고와. 흔한 기회가 아니니까 귀 기울여서 들어봐. 얼마나 고운지.”

취화원주는 눈을 감고 새소리를 들었다.

질문은 없었던 것이 되었다.

모두 하던 일로 돌아갔다. 잡담을 하던 사람은 계속 잡담을 주고받았고, 차를 즐기던 사람은 찻잔을 다시 들었다. 서가에 꽂힌 책을 집는 사람도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녀는 먼 길을 달려왔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왜 이렇게 늦었……!”

사장로(四長老)는 늦게 온 육장로(六長老)를 질책하려다가 말문을 뚝 끊었다.

“원주님!”

육장로가 취화원주를 쳐다봤다.

취화원주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왜 늦게 왔는지, 숨은 왜 턱에까지 차서 헐떡이고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앉지.”

취화원주가 회의 탁자를 가리켰다.

“음!”

침음이 흘러나왔다.

화전민촌 사람들이 몰살당했다. 한 사람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회전민촌 사람들은 민초다. 백성이다.

그곳에는 젊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인도 있고, 아녀자와 어린아이도 있다.

모두 다 죽었다.

취화원의 삼수탈겹은 이미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비밀이 되었다. 그래서 삼수탈겹을 역이용하려는 문파도 심심찮게 나타나는 추세다.

그래서 삼수탈겹 위에 한 겹 더 감시자를 붙였다.

육장로가 맡고 있는 주요 임무 중 하나가 그것이다.

화전민촌, 길가에서 길을 안내하는 노파, 그리고 마차까지…… 멀리서 지켜본다.

이번에는 단단히 사달이 났다.

화전민촌 사람들이 깡그리 몰살당했다. 인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살겁이 한 마을을 휩쓸었다.

“인원은?”

“대략 스무 명 정도입니다.”

“스무 명?”

“하나같이 고수예요. 뭐라고 할까? 사나운 늑대들? 길들지 않은 산짐승? 그런 냄새가 풍겼어요. 사납고, 흉포하고, 거침없고. 아이를 죽이면서도 웃었으니까.”

육 장로에게 말만 들었는데도 부르르 치가 떨렸다.

사내 스무 명이 한 마을을 생명 없는 땅으로 만드는 장면이 쉽게 상상되었다.

“칼이면 도법인가?”

“그런데 그게…… 딱히 도법이라고 할 수는…… 도법은 아니고, 그냥 막 휘두르는 것 같았어요. 내리치고, 쓸어내고, 때리고. 초식은 없었습니다.”

오 장로가 손짓까지 섞어가며 설명했다.

하기는 무공도 모르는 약자를 공격하는 데 초식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살검이 꼬리를 타고 들어왔다.

저들 스무 명은 몽설을 쫓아왔다. 몽설이 가는 곳을 정확하게 알고 훅! 들이쳤다.

“꼬리가 잡혔네.”

이 장로가 신음하듯 말했다.

“몽설은?”

취화원주가 물었다.

“화단에서 오색화에게 물을 주고 있습니다.”

대답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쯧! 지금이 어느 땐데 한가하게 꽃에 물이나 주고.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삼 장로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어느 선에서 자를까요?”

일 장로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꼬리가 잡혔으면 도마뱀처럼 일정 부분을 잘라야 한다. 더는 꼬리를 잡고 들어서지 못 하게 해야 한다.

“기다려 보자고.”

“네? 더…… 기다립니까?”

일 장로가 의아한 표정으로 원주를 쳐다봤다.

원주는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아까 그 새인지 모르겠는데, 새 한 마리가 째짹! 맑은 소리를 토해내며 지나갔다.

“도지(桃枝)님, 시신을 찾았습니다.”

“뭐라!”

일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원주를 쳐다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원주는 여전히 창밖을 쳐다보고 있다.

이런 일을 예상한 것 같다.

“몽설, 이 계집애.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오 장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은 오 장로가 했지만, 사실 모든 장로가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몽설이 무슨 일을 벌였는데, 무슨 일인가?

잠시 후. 영원히 침묵할 것 같던 원주가 입을 열었다.

“취화원을 해체할 거야. 지금 바로 흩어져. 최대한 빨리. 앞으로 반 시진 안에 일차 정점으로 이동해. 본원 흔적은 일체 지우고. 건강하고, 또 만나자.”

“원주님!”

일 장로가 당황해서 취화원주를 쳐다봤다.

십오 년 전, 허공부가 중원 마인들을 가차 없이 베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지지도 하늘을 찔렀다. 중원에 뿌리박은 나쁜 잡초들을 싹 쓸어버리겠다고 하는데 지지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모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하지만 취화원은 정반대 상황에 처했다. 취화원 자체가 척결 대상이었다.

그래서 만일에 대비해서 탈출 준비를 했다.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해산!

해산 명령이 떨어지면 아홉 장로가 휘하 제자들을 이끌고 일차 거점으로 간다.

일차 거검은 오직 장로만 안다. 취화원주도 모르고, 장로를 쫓아서 이동하는 제자도 모른다. 본원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취화원이라는 말은 사라지는 것이다.

일차 거점에 도착하면 각개 해산한다.

모두 살길을 알아서 가야 한다.

개미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한 사람이 잡혀도 다른 사람이 잡히지 않는 구조로 만들었다.

도주에 필요한 물건이나 자금은 모두 일차 거점에 준비해 놓았다. 몸만 빠져나가면 중원 끝까지라도 도주할 수 있도록 탈출 계획이 철저하게 수립되어 있다.

하지만…… 해산이 이토록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라면…… 취화원이 다시 모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원주조차도 장로들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모이나.

해산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만 시도해야 한다.

한데 원주가 방금 해산을 말했다.

취화원주가 말했다.

“방금…… 형옥이 무너졌어.”

“네!”

“아니! 이럴 수가!”

장로들이 깜짝 놀라서 경악성을 토해냈다.

“허공부인가요?”

이 장로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조를 죽인 대가로 멸문되어야 하냐는 물음이다. 강조의 죽음을 보고 허공부가 화내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다. 허공부는 취화원을 샅샅이 조사해 놓은 상태이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칠 수 있다.

“아니, 허공부는 저렇게 잔인하지 않아. 적어도 아이까지 죽이지는 않아.”

“…….”

모두 말문이 막혔다.

맞는 말이다. 그럼 누가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인가?

형옥은 매우 은밀한 곳에 세워져 있다. 절벽을 파고 들어가서 뇌옥을 만들었기 때문에 침입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더욱이 형옥 곳곳에 기관 장치까지 설치해 놨다.

형옥이 무너졌다는 말은 형옥주가 죽임을 당하면서 사력을 다해 붕괴시켰다는 뜻이다.

형옥을 무너트리는 방법은 오직 형옥주만 안다.

또 이것은 취화원에 대한 신호이기도 하다. 형옥이 붕괴되면서 엄청난 모래 폭풍을 일으키는데, 이 폭풍을 반나절 정도 떨어져 있는 취화원에서도 볼 수 있다.

취화원주는 창밖을 계속 지켜봤다.

혹여 폭풍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기어이 뿌연 먼지를 보고야 말았다.

형옥주는 침입자 중 상당수를 지옥으로 끌고 갔다. 백 장 높이의 절벽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인데, 그 속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실, 침입자들 전부가 매장되었다고 믿고 싶다.

형옥을 조사해 볼 것인가, 이대로 해산할 것인가? 침입자가 살아남았을까, 몰살당했을까? 모두 죽었는데 해산하면 멍청한 짓이 된다. 살아남은 자가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참살당한다.

원주가 말했다.

“잘 들어. 우린 이자들을 몰라. 누군지 모르는 자들에게 공격받고 있는 거야. 위험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경우지. 그러니 해산이 답이야. 모두 떠나. 건강하게 잘 지내고.”

원주는 말을 마치고 즉시 일어섰다.

반 시진은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 안에 제일 거점까지 몸을 피해야 한다.

“빨리들 가.”

원주는 아직도 일어서지 않고 앉아있는 장로들을 재촉했다.

* * *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아삼이 찾아왔을 때 마음을 모질게 먹고 내쳐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아걸, 그놈…… 이제 죽을 길을 가네.

-그냥 죽치고 있으면 안 되나?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죽을 길이니 어쩌니 하는 거야?

-일홀도 아닌가. 일홀도 천성이 피를 찾아다니는 것인데 어떻게 하겠나.

-죽을 길이면 혼자 가야지. 애꿎게 정혼녀는 왜 찾아. 정신 똑바로 박힌 놈이면 일부로라도 찾지 말아야지.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가르친 거야? 같이 죽자는 거야?

-둘 다 컸는데 얼굴이나 보게 해줘야지.

-다섯 살, 여섯 살 때 정혼 말 한 마디 꺼낸 건데, 그게 아직도 꼬투리가 돼?

-난들 그 생각을 왜 안 했으려고. 했지. 어렸을 때 본인들도 모르게 맺어진 정혼인데 깨면 어떤가. 비야에게 좋은 짝이 생겼을 수도 있고. 더욱이 아걸 이놈은 죽음의 길을 걸어갈 놈이니 정혼녀라는 게 거치적거리기만 하지.

-그 생각 밀고 나가.

-그런데 한 가지가 걸린단 말씀이야. 혈검경. 아걸 그놈에게 혈검경 하권이 있잖아. 그거 정혼녀에게 주려고 하니까 이리 내놔라 하면 내놓을 놈이지만……. 그 생각을 하니 너무 불쌍해서 말이지. 얼굴이나 보게 하자고.

-안 돼. 봐서 좋을 게 없는 인연이야. 비야, 지금 잘 살고 있으니까 굳이 정혼녀를 찾겠다면 싸움 다 끝내고 오라고 해. 그게 사내지. 등에 짐 잔뜩 지고 왜 찾아와? 좋은 가마는 못 태워줄망정.

-나도 같은 생각이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하고 옆구리 한 번 찔러봤지.

아삼이 그런 말을 했을 때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용건을 마치고 일어서려던 아삼이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헝겊에 둘둘 감긴 것을 꺼냈다.

-이건 어떻게 할까?

-뭔데?

-보면 알지.

헝겊을 풀어봤다.

반으로 갈라진 동경(銅鏡)이다. 크기가 아이 손바닥만 해서 들고 다니기 딱 좋다.

남소 선배 물건이다.

동경은 구리로 만들어서 힘으로는 갈라지지 않는다. 예리한 검으로 갈라냈다. 한순간의 호흡으로 거침없이, 매우 빠르게 갈라내야만 쪼개진다.

-누구야?

-허도기.

말문이 막혔다.

아걸의 검은 허도기를 향한다. 허도기 면전까지 다가갈 수도 없지만, 가까이 가려고 한다.

허도기는 아걸에게나 오비야에게나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다.

한 사람은 흉수에게 다가서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주저앉아 있다.

-……선배를 죽인 게 누굴까 했어. 허도기일까. 서리가헌? 서리형개? 허도기였네.

-죽을 게 워낙 뻔해서 같이 가자고는 못 하겠고. 그래서 혈검경도 받을 겸, 얼굴이나 보게 하자는 거였지. 자네 생각 알았네. 혈검경은 인편으로 보내줌세.

-앉아. 생각 좀 해 보게.

그 말…… 앉으라는 말이 실수였다.

그냥 일어서서 가게 내버려 두는 거였다. 그랬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취화원이 해산하는 이 혼란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걸의 칼이 허도기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벌써 사람이 얼마나 죽어 나가고 있나.

‘몽설을 보낸 것이 실수였어.’

원주는 고개를 휘휘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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