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第九章 파란(破卵) (5)
오색화는 기르기 힘든 만큼 뛰어난 약성을 지닌다.
마음이 울적해진다거나,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거나, 불면증으로 시달린다거나,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작은 병치레에는 아주 좋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꽃을 꺾을 필요가 없다. 오색화는 향기가 약이다. 냄새만 맡아도 마음이 풀어지고, 정신이 개운해진다. 밤에 잠도 잘 온다.
주룩! 주룩! 주룩!
몽설은 아주 조금씩 물을 주었다.
물을 주는 도중 가끔 고개를 들어서 원주님 집무실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회합이 끝나면 기별을 주기로 했다.
살행을 다녀왔으니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오늘 아침 회합은 꽤 길어지고 있다.
‘무슨 일이 있나?’
큰 신경은 쓰지 않는다.
취화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다. 도로가 망가졌다거나, 축대가 무너졌다거나, 연무장에서 자라는 잡초를 뽑아야 한다거나 하는 일들뿐이다.
원주님께 인사를 드리고, 거처로 가서 방 청소도 하고, 목욕도 하고, 오랜만에 푹신한 침상에서 잠도 푹 자고…… 정말 편안한 곳으로 돌아왔다.
그래, 이곳이 집이다.
몽설은 활짝 웃었다. 딱히 웃을 일도 없는데, 괜히 즐거웠다. 언제 검이 날아올지 긴장하지 않아도 좋고, 추격자를 신경 쓰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데,
스읏!
등 뒤에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건너와 그녀의 등 뒤로 살짝 내려섰다.
기척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무엇이 움직인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하다. 누군가가 등 뒤로 내려섰다. 온몸이 긴장감으로 자르르 울리지 않는가.
‘누가?’
몽설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무심히 뒤돌아서는 우행도 저지르지 않았다.
상대는 좋은 뜻으로 오지 않았다. 그럼 뭔가?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맞다. 그런 뜻으로 왔다. 지금 등 뒤에서 살검을 쳐내기 위해 기회를 엿본다.
스읏!
오른발을 뒤로 반 보 뺐다.
몸을 언제든지 반전시킬 수 있다. 완전히 돌아설 필요는 없다. 반만 돌아서도 일격을 가하기에는 충분하다.
주룩! 주룩! 주루룩!
물통이 거진 비워졌다. 이제 물을 주고 싶어도 줄 물이 없다. 하면 움직여야 한다.
‘어떻게 하지?’
효율적으로 암습하는 수련을 하고, 암습에 대비해서 역습하는 수련까지 쌓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수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상대가 너무 고명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 느낌도 없어.’
상대가 살수를 썼다면 벌써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도무지 막을 방도가 없다. 누군가가 등 뒤에 있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침착! 침착하자!’
몽설은 스스로 타일렀다.
삼빙(三冰)! 세 가지 얼음!
마음을 얼음처럼 차게, 몸을 얼음처럼 굳건하게, 눈을 얼음처럼 고요하게.
취화원에서는 위기에 처했을 때 되든 안 되든 한 번쯤은 삼빙을 떠올려보라고 가르친다.
삼빙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면 말할 나위 없이 좋다. 그때는 능히 어떤 위기도 타개할 수 있다. 삼빙을 구사하지 못해도 삼빙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일단 삼빙을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차가운 얼음덩이를 심장에 댄다.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다.
몸은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설혹 기습을 막지 못해서 죽는 한이 있어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그리고 마지막, 빙안(冰眼)…… 얼음 같은 눈으로 상대를 살핀다.
검이 날아온다! 느낌이 일어난다! 확실한 공격!
몽설은 즉시 신형을 비틀었다.
슈각!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머리 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귀밑으로 빠져나갔다.
촌각이라도 대응이 늦었다면 머리가 꿰뚫렸다.
휘릭!
몽설은 손에 들고 있던 물통으로 기습해온 자를 공격했다. 검을 피하는 즉시 뒤돌아섰다. 그리고 물통으로 암습자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곳을 힘껏 내리쳤다.
쒜엑!
물통은 빈 허공을 후려갈겼다.
‘응?’
암습자는 없다. 뒤돌아섰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다. 틀림없이 있었다. 귀밑으로 빠져나간 검날을 똑똑히 보았다. 검이 흘린 예기가 아직도 볼을 흔든다. 검의 감촉이 얼얼하게 남아 있다.
마음을 얼음처럼 차게! 심빙(心冰)!
일말의 동요도 없이 주변을 살핀다. 당황한다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침착하게 살핀다.
‘웃!’
몽설은 급히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쒜엑!
파공음이 등에서 터진다.
기습자는 몽설의 등을 놓치지 않고 있다. 몽설이 돌아서면 그도 돌아선다. 그리고 계속 등을 노린다.
휘릭!
몽설은 물통을 밑으로 내려서 지면을 휩쓸듯이 쓸어냈다. 상대방의 다리를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물통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했다.
물통을 휘두르면서 뒤를 살펴봤는데, 아무것도 없다.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인다.
하면 등을 쓸고 지나간 검풍은 무엇인가?
있는 듯 없는 듯 형체와 숨을 감추고, 언제나 등 뒤에 서 있고, 공격은 한 번으로 그치고, 공격 즉시 모습을 감추고…… 귀영보(鬼影步)!
귀영보는 취화원과 함께 양대 살맥(殺脈)으로 일컬어지는 귀문(鬼門)의 무공이다.
귀문 살수가 취화원 본원 안까지 침투했다.
스릉!
몽설은 침착하게 검을 풀어냈다.
상대가 귀문 살수라면 임기응변으로는 대적할 수 없다. 전력을 다해야 하고…… 그러려면 부득이 수련이 금지된 마학, 혈검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왜 주변에는 아무도 없지?
자신이 일으킨 움직임만 해도 작지 않은 소음인데, 왜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지?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혈검경 하권 혈검심경(血劍心經)에 기재된 공부를 일으켰다.
‘역혈활류(逆血滑流) 니환일검(泥丸一劍)…….’
휘류릉!
심공을 일으키자 피의 순환이 평소보다 세 배를 빨라진 듯 맹렬하게 휘돈다.
몸속에 흐르는 피의 흐름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몽설은 감지한다. 그것도 평상시보다 세 배, 네 배는 빠르다. 심장에 흘러나온 피가 순식간에 다리를 휘돌고 다시 머리로 운집한다.
혈검심기(血劍心氣)가 일어났다.
혈검심기가 휘도는 중인데, 그것이 마치 피의 흐름처럼 느껴진다. 사실 혈검심기는 혈맥을 따라서 휘돈다. 혈맥과 진맥이 같은 경로에 있다. 그래서 피가 휘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전신을 휘돈 혈검심기는 위로 쭉 치솟아서 니환궁(泥丸宮)에 운집된다.
일반적으로 진기가 단전에 운집하는 내공심법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공부다.
니환궁은 상단전(上丹田)을 말한다.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뇌(腦)다.
머리에는 구궁(九宮)이 있는데, 니환궁은 가장 중심에 위치한다. 머리 한가운데 있다.
그렇다. 혈검경은 도가에 뿌리를 둔다. 도가 검공이다. 언제 누가 창안했는지는 상권이 없어서 알지 못하나, 도가제일검법(道家第一劍法)인 것만은 틀림없다.
혈검신기가 니환궁에 운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
니환궁에 운집한 진기는 심검(心劍)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니환일검이다.
니환일검은 몸의 모든 감각과 연결된다. 오감(五感)이 니환일검을 둘러싼다. 다섯 가지 감각이 니환일검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서 움직인다.
혈검경 중권에 기재된 검경은 니환일검의 조정을 받는다.
이때에서야 평범했던 철검이 한낱 무명인에게 혈해검성이라는 무명을 안겨준 가공할 혈검으로 변한다.
니환일검으로 펼친 혈검과 단전진기로 펼친 혈검은 하늘과 땅만큼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검초의 변화, 빠름, 파괴력…… 모든 면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인다.
츄르릉!
니환일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릿속에서 검 한 자루가 둥둥 떠다닌다. 핏빛을 머금은 혈검이 사방을 노려본다.
이 순간, 몽설은 깨달은 것이 있다.
혈검경을 수련하면 삼빙은 덤으로 안겨진다.
빙안을 수련할 필요가 없다. 니환일검은 빙안보다 더 차가운 눈으로 사방을 살핀다. 빙심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니환일검에 집중하면 저절로 빙심이 된다.
몽설은 혈검심기를 실전에서 사용해 본 경험이 없었다.
당연히 혈검신기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혈검신기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다.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슛!
검이 날아온다.
이번에는 전처럼 막연한 느낌이 아니다. 검이 날아오는 모습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스읏! 쒜에엑!
몽설은 침착하게 뒤돌아섰다.
검이 날아오는 모습을 봤다. 검이 어느 정도의 빠름으로 어떤 변화를 그리는지도 안다.
당황할 것이 없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고 있어서 침착할 수 있다. 상대방이 펼친 검초를 어떻게 쳐내야 하는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까앙!
기습하던 검이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그리고 연이어 쏘아진 검이 상대방을 후려갈긴다. 그때!
“그만!”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너무 잘 아는 음성, 항상 마음속을 포근히 감싸고 있던 음성!
‘원주님!’
몽설은 검을 멈췄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빠르게 검을 썼는지 알지 못한다. 음성 한 마디에 멈출 수 없는 검이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만!’이라는 음성을 토했을 때는 검이 이미 목에 닿아있었다. 그러니 검을 멈춘다고 해도 이미 격살한 후가 된다.
그런데도 검이 목 앞에서 우뚝 멈췄다.
“원주님!”
몽설이 반색했다.
취화원주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검을 쳐다보면서 거친 숨만 뿜어냈다.
‘이 아이가 혈검경을 완전히 얻었어!’
취화원주는 확신했다.
그녀의 무공은 매우 강한 편이다. 살법까지 가미하면 소축십검까지도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한다.
방금, 몽설은 그녀의 살법을 파훼했다.
암영검(暗影劍)을 무너트렸다. 그리고 암영검의 주인을 저승 문턱까지 밀어 넣었다.
암영검은 취화원 제일 절기다.
취화원과 함께 양대 살맥으로 일컬어지는 귀문은 암영검을 본떠서 귀영보를 만들어냈다.
귀영보는 암영검의 짝퉁이다.
몽설은 그런 절기를 단 일 수만에 파훼했다.
공격을 멈춘 것도 놀랍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거리에서 검이 멈췄다. 검에 붙은 가속을 단숨에 멈춰 세웠다.
힘차게 질주하던 말이 갑자기 제 자리에 우뚝 멈춰 선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게 가능한가?
“호호! 우리 몽설…… 다 컸네?”
취화원주는 손을 들어서 몽설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아직 어린아이인 줄 알았다. 살수랍시고 살행에도 나갔지만, 삼류만 상대했을 뿐이다. 이번에 활검문에 침투해서 강조를 죽인 것이 최대 성과다.
그러니 세상을 보는 눈도 얕지 않을까?
아니다. 몽설은 절대 어리지 않다. 어미의 눈으로 보면 마냥 어린애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취화원주로서 냉정하게 봤을 때는 살수 열 명 몫을 해낼 아이다.
“혈검경 하권을 얻었구나.”
“아, 역시 원주님이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제 검이 달라졌죠?”
몽설이 신이 나서 말했다.
몽설은 형옥주에게는 아걸에 대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원주에게만은 숨기지 않는다.
“아걸이란 사람, 보니까 어때?”
“네? 아걸을…… 아세요?”
“아걸 이름은 흔(昕)이야. 성은 두 개나 있지. 허 씨와 서리 씨. 허흔, 서리흔. 네 정혼자.”
“네엣? 원주님, 지금 무슨 말씀을……? 아걸이 제…… 정혼자요?”
“네 이름은 몽설이 아니라 오비야. 오 씨 성에 비야. 오비야. 내 언니 남조와 일홀문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
취화원주는 한 토막 과거사를 끄집어냈다.
원래는 숨기려고 했던 사실이나, 몽설의 검을 보니 사실대로 말해주는 것이 마땅하다 싶다.
모든 사실을 말해준다.
판단은 몽설에게 맡긴다.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몽설이 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