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第十章 무가불가(無可不可 : 어쩔 수 없이) (1)
할배는 아직도 혼수상태다.
녹산마황은 모두 할배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많던 거머리들이 모두 녹아버렸다.
상처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요행히 상처는 아물었다. 검상 치료에는 녹선마황처럼 뛰어난 것도 없다.
할배의 몸에는 깊은 흉터가 새겨졌다.
몸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버린 흉터라서 고개를 저절로 돌려버릴 만큼 끔찍하다.
그래도 살이 잘 아물었다.
할배는 겉모습만 보면 멀쩡하다. 그런데 혼절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다. 잠을 얼마나 자야 직성이 풀릴 건지, 도무지 깊은 잠에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몸 돌립니다.”
아걸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오래 있으면 살이 물러진다. 그러니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을 돌려 주어야 한다. 수시로 대소변도 살펴봐야 하고.
혼절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여간 고되지 않다.
“쬐그만 노인네가 무겁기는…….”
아걸은 투덜거리면서 할배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후에는 상처를 소독한다. 이미 다 여물어서 살이 올라온 상태이지만, 그래도 매일 손수 만든 약물로 몸을 닦아 준다. 그리고 깨끗한 붕대로 묶는다.
할배는 신경을 많이 다친 것 같다. 경맥도 상당 부분이 잘려 나가서 기운이 잘 돌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숨은 돌아왔다. 미약하지만 가슴 고동도 느껴진다.
몸만 멀쩡하면 된다.
언젠가는 깨어나겠지 하면서 기다린다. 목숨이 살아있는데, 잠 좀 깊이 자면 어떤가.
할배를 치료한 후에는 당연히 일홀도를 되새긴다.
제일대 일홀문주가 가졌던 칼을 떠올린다.
‘환부살도. 십육 식 백이십팔 초.’
사부가 춤을 춘다. 매우 느리게…… 거의 반 시진에 걸쳐서 백이십팔 초를 펼쳐 보인다.
사부가 동굴에서 환부살도를 보여 줬을 때부터 벌써 십오 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지금도 사부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춤을 추면서 내뱉는 호흡까지 느껴진다.
할배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할배는 ‘귀신이 시샘할 놈’이라고 욕했다.
십오 년 전에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가 딱 한 번 본 무공 초식을 기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거기에 호흡까지 느낀다는 것은 초식을 흘려내는 묘리를 기억한다는 것인데, 그런 기억과 감각을 타고난 놈은 세상 천지에 너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때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또 할배에게 거짓말을 해서 뭐 하나.
스읏! 슷! 스스슷!
손이 움직인다. 몸도 움직이려고 한다.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움직였을 것이다.
기억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따라서 시전해 본다.
사부는 반 시진에 걸쳐서 환부살도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다시 되새김하는 데는 한 시진이 가볍게 지나간다. 손이 제대로 가지 않으면 다시 움직여봐야 하니까.
제이대 일홀문주는 목도일참(木刀一斬)이라는 분이다.
목도일참은 어떤 싸움에서든 단 일 초만 사용했다.
병기끼리 부딪치는 일이 없다. 일 초에 살을 벤다. 칼을 썼으면 반드시 죽인다.
일명 목도삼법(木刀三法)이라고 한다.
목도일참이란 분이 강호를 종횡하면서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철칙이다.
사실, 일홀문의 싸움방식은 제이대 일홀문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목도일참에게는 팔십일(八十一) 참도(斬刀)가 있다.
칼로 사람을 베는 여든한 가지 방법이다. 상향도(上向刀), 하향도(下向刀), 직참도(直斬刀), 회선도(回旋刀), 후배도(後排刀)…… 칼 쓰는 방법이 이토록 많다는데 놀랄 것이다.
아걸은 이 역시 따라 해 본다.
그러면 두세 시진이 훌쩍 지나간다.
서른여섯 개의 일홀도 중 두 개만 따라 해도 반나절이 지나가 버린다. 점심 먹고 눈을 감았다가 이제 그만하자 하고 눈을 뜨면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다.
아걸은 일홀도를 서른여섯 가지나 알고 있다.
일홀문주 서른여섯 명의 일홀도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사실…… 사부님은 마지막 순간에 욕심을 많이 가졌다.
일홀도를 얻지 못한 제자에게는 선대 문주의 일홀도를 보여 주지 않는 것이 관례다.
선대 문주의 일홀도를 보여 주면 따라 하기 바쁘다.
자신만의 일홀도를 가져야 하는데, 너무 강한 일홀도를 보여 주면 누구든 쫓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홀도는 절대로 보여 주지 않는다.
서리가헌, 서리형개, 동박…… 세 사형은 백검도(百劍刀)를 보았다.
검법, 도법이 주를 이루고 창법과 궁법, 간법 등 온갖 병기술이 가미된 무공 백 개를 봤다.
세 사형이 모두 같은 무공을 봤다.
사부가 시연해 보였고, 비급으로 남겼고, 토론이 허가되었다.
일홀도는 백검도를 따라가지 않는다. 백검도를 참고로 해서 자신만의 공부를 창안해 낸다. 새로운 무공을 창안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겠냐마는, 일홀무인들은 해냈다.
사부는 제자들을 방치하지 않았다.
그들을 혼자 살게 했고, 혼자 수련케 했지만, 항상 뒤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살폈다.
잘된 길로 가면 내버려 두었다. 잘하고 있는데 간섭할 필요는 없다. 잘못된 길로 가면 비무 형식을 빌려서 깨우쳐 주었다. 말보다 직접 느끼는 것이 효과적이다.
싸움이라는 재주를 타고난 사람들에게 이런 지도법은 딱 들어맞는다.
십 년 걸릴 것을 일 년 만에 끝내줄 만큼 온몸에 확 와 닿는다.
일홀도는 혼자 얻은 것이 아니다. 사부가 뒤에서 힘껏 도와주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걸에게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사부가 해 준 일이라고는 서른여섯 개의 일홀도를 보여 준 것뿐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서리 성을 주었다. 일홀도를 얻기는커녕 걸음마도 떼지 못했는데.
어린아이에게 산삼 백 뿌리를 먹인 격이다.
일홀도는 도법의 정화다.
서른여섯 가지 일홀도 중 절학 아닌 것이 없다.
그중 하나만 무림에 내놓아도 능히 일파를 재건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
그런 것을 서른여섯 개나.
사부가 무슨 생각에서 일홀도를 보여 주었는지 모르겠으나…… 서른여섯 가지 도법은 아걸의 몸속에 녹아 있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다.
일홀문주 두 분의 무공을 살핀 후에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대소변을 살핀다.
오물이 묻어 있으면 새로운 기저귀로 간다.
상처를 다시 한번 소독하고, 마른 붕대를 감아준다.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상처를 살핀다.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던데, 할배 보면 그렇지도 않은가 봐. 그것참, 술 생각은 안 나? 술을 받아와서 코앞에 따라놓으려다가 참는 거야. 고마운 줄 알아.”
아걸은 할배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저녁이 되면 동박이 펼친 일홀도를 떠올린다.
일홀도는 수많은 무공을 살핀 끝에 자신에게 맞는 도법을 찾아낸 것이다.
자로 체격을 재서 옷을 맞춰 입은 것과 같다.
아걸이 알고 있는 서른여섯 가지의 일홀도도 모두 남이 입었던 옷이다.
내게 맞는 옷이 아니다. 각각 개개인에게 맞춰진 옷이다.
체격이 같아도 남이 입었던 옷을 입으면 어쩐지 어색하다. 하물며 일홀도 무인들은 체격이 너무 다르다. 개개인의 특성이 너무 진해서 도저히 융합되지 않는다.
사부의 일홀도는 오직 사부만 사용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사용하면 어색해진다.
일반 사람이 사용하면 어느 정도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다. 흉내를 내면 비슷한 위력도 구사된다. 나름대로 강한 무공을 수련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일홀무인이 선대의 일홀도를 고스란히 사용하는 것은 치명적인 해가 될 수 있다.
동박이 그래서 죽은 것이다.
동박은 사부의 일홀도를 흉내 냈다.
자신도 마찬가지다. 아직 일홀도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사부의 일홀도를 흉내 낸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점은 뭘까?
동박에게는 사부의 일홀도가 최고로 강한 무공이었다. 더 이상 강한 무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홀도만 수련하면 최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걸에게 사부의 일홀도는 서른여섯 가지 중의 하나였다. 사부의 일홀도 역시 최정상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만, 자신이 가질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동박은 아걸의 무공만 봤다.
아걸은 동박의 일홀도와 사부의 일홀도를 비교했다.
사부의 일홀도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을 때 드러나는 허점을 봤다.
‘사형들은 자신만의 일홀도를 가졌단 말이지. 최정상의 무공인데, 내가 보지 못한 것. 지금 상태에서 부딪치면 필패인데…… 싸우지 않을 수도 없고.’
“그것참! 쓸데없이 일을 벌여가지고는.”
아걸은 누워 있는 할배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일홀문주의 무공, 동박의 무공을 되새김하는 것은 혹시 그 속에서 사형들을 상대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물론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걸은 도읍으로 나왔다.
할배의 몸을 소독하기 위해서는 약초가 필요하다. 약초가 한두 가지라면 직접 산에서 채취하겠지만, 소독약을 만드는 데는 무려 십여 가지나 있어야 한다.
이럴 때는 괜히 고생하는 것보다 약방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여천 강 씨가 지원을 끊었다며?”
“응. 끊었대. 자기 자식이 죽었는데 복수도 해 주지 않은 활검문이 곱게 보이겠어? 활검문은 살수도 잡지 못했잖아. 앞으로는 활검문도 살림이 쪼들리겠어.”
“취화원을 박살 낸 것으로도 분이 안 풀리나?”
“취화원만 박살 내면 뭐해? 정작 자식 놈을 죽인 살수는 놓쳤는데.”
사람들은 둘만 만나면 활검문 이야기로 활기를 띠었다.
‘취화원이 박살 나?’
아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취화원은 강조를 죽인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삼이 찾아가서 몽설을 지목했다. 그리고 살수행을 부탁했다.
이 일이 어떤 식으로 되돌아올지 예상하지 못했다면 취화원은 무림에서 살 자격이 없다.
강조는 취화원 살수 몽설에게 죽었다.
활검문이나 여천 강 씨에게는 몽설이 취화원 살수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취화원에 책임을 묻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살수 몽설을 잡는 것뿐이다.
취화원은 강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 증거를 수집해 놨다.
활검문이나 여천 강 씨가 취화원에게 책임을 물으면, 취화원은 증거를 당당히 공개할 것이다.
강조가 이런 놈이다!
우리는 강조에게 해를 당한 누구의 부탁으로 강조에게 대가를 받아낸 것뿐이다.
한 마디로 죽일 놈을 죽였다는 거다.
‘타당한 살행’은 취화원이 허공부의 거센 검풍 앞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패였다.
이런 사실은 무림이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취화원 살수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면 ‘어디서 못된 짓을 했구나’하고 인식하는 추세다.
그래서 활검문도 여천 강 씨도 취화원에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살수를 잡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아삼은 강조에 대한 증거를 충분히 수집해서 갖다 주었다.
취화원주는 증거를 보고 판단했고, 살행을 명령했다. 강조는 죽일 놈이라고 확정했다.
사태가 여기서 끝난다면 취화원은 멸문당할 일이 없다.
문제는 다음인데…… 일홀도가 나타난다. 애초 목적이 그것이었으니 당연히 나타난다.
이 순간부터 취화원은 제거해야 할 문파로 지목된다.
일홀도와 관계 맺은 살수 문파.
일홀도를 아는 사람들은 일홀도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
일홀문의 부활이다.
허도기와 서리가헌, 서리형개의 가슴에 칼을 꽂겠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몇몇 사람만은 확실하게 안다.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났어도.
사실이 이러니 저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도 예상된다.
당연히 취화원을 제거한다. 공식적으로 제거할 대상은 아니고, 비공식적으로 멸문시킬 것이다.
일홀도 싸움에서 동박이 이기든 아걸이 이기든 취화원과는 상관없다. 취화원은 무조건 제거된다. 설혹 취화원이 일홀도와 아무 연관이 없어도 제거할 것이다.
취화원주는 이런 움직임을 환히 꿰뚫고 있다.
그런데도 가만히 앉아서 멸문당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멸문은 표면적인 일일 뿐이다.
아걸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흘려들으면서 약방으로 들어섰다.
“상황버섯, 자소엽, 황금, 인삼…….”
“됐네. 전에 가져간 게 있으니 그걸 보면 되지. 곧 준비해 줌세.”
의원이 뒷말은 듣지도 않고 약장으로 걸어갔다.
“누가 크게 다쳤나 보지?”
“…….”
“이 정도 약재를 쓸 정도면 의원에게 보이는 것이 좋을 것이네. 내가 따라가 줄까?”
“괜찮습니다.”
아걸은 무심히 의원에게 말했다.
갈근, 형개…… 의원은 전에 써 놨던 약방문을 보면서 부지런히 약재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