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47화 (47/600)

#47화. 第十章 무가불가(無可不可 : 어쩔 수 없이) (2)

“사자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인데, 어지간히 놀리고 끝내지. 즐겨도 너무 즐겼군.”

서리형개가 중얼거렸다.

꾸르르릉!

강물이 천둥소리를 내며 흐른다.

동박과 아걸, 두 사람은 강을 건너갔다.

한 사람은 밧줄에 의지해서 건너갔고, 또 한 사람은 두 발로 굳건히 걸어갔다.

강에 두 사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곳까지 왔으니 못 찾지. 힘들지도 않나? 뭐 하러 이런 곳까지 기어 올라와.”

서리형개가 연신 투덜거렸다.

“입 다물고…… 가자.”

서리가헌이 졸린 눈으로 수림을 쳐다봤다.

동박이 사고를 당했다.

아걸을 잡으러 간 놈이 아직까지 소식 한 장 보내오지 않는다는 것은 비정상이다.

동박을 본 사람도 없다.

아걸을 쫓아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 동박을 봤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짐작대로라면 동박은 죽었다. 무인이 사고를 당했다면 죽는 일밖에 더 남나.

지금은 추측이지만 곧 현실이 될 것이다.

“저곳으로 간 것 같은데?”

“맞다. 가자.”

서리가헌과 서리형개가 수림으로 들어섰다.

동박이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쓰러져 있다.

두 발은 엉겨있다. 왼발은 앞으로 쭉 뻗었고, 오른발은 반으로 접힌 채 구부러져 있다.

상반신이 나무에 얹히는 바람에 완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서 있는 상태에서 타격을 당했다.

“싱거운 놈이네. 그깟 놈에게 당해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 피죽 먹을 자격도 없는 놈이군.”

서리가헌이 동박의 상처를 살폈다.

서리형개도 동박을 살폈다. 머리에 일격을 당한 것은 분명한데, 어떤 칼인지 모르겠다.

“이게 뭐지?”

서리형개가 중얼거렸다.

서리가헌도 침묵했다. 그도 서리형개와 같은 심정이다. 이게 뭔가 하는 눈빛이다.

동박을 죽일 정도라면 아주 강한 칼이어야 한다. 적어도 일홀도는 되어야 한다.

동박이 비록 일홀도를 얻지 못했지만, 최강 고수 중의 한 명인 것만은 틀림없다. 허공부 소축십검조차도 눈 아래 둘 정도로 강한 칼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 머리에 난 상처는 고수답지 않게 투박하다.

칼로 그은 것이 분명한데, 마치 날아오는 난석(亂石)을 맞고 머리가 깨진 느낌이다.

일홀도와는 거리가 먼 칼이다.

“이놈, 일홀도가 아닙니다.”

서리형개가 말했다.

“일홀도일 수가 없지. 사부가 죽었는데, 일홀도를 누구에게 배워. 그럼 혼자서 터득한 칼인데…… 먼저 본 놈은 분명히 일홀도에 당했거든. 약한 놈은 일홀도로, 강자는 마구잡이로 쳐죽인다? 재미있는 놈이군.”

서리가헌이 웃었다.

먼저 봤던 활검문 문도의 시신은 분명히 일홀도에 당한 게 맞다.

칼이 아니라 작두를 사용했지만,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게 숨을 끊었다.

하지만 그 칼은 동박보다 못했다.

그 칼에는 칼을 이렇게 써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있었고, 동박은 생각 없이 쪼개는 칼을 가졌다.

동박이 한 수 위다.

그런데 그 칼을 쓰지 않고 전혀 다른 칼을 썼다. 너무 투박해서 일홀도라고 부를 수 없는 칼을.

이런 칼에 굳이 이름을 붙이면, 즉흥도(卽興刀)다.

칼을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자가 막무가내로 뻗어낸 칼인데, 운 나쁘게 걸린 것이다.

서리가헌과 형개는 동박의 옆머리에 새겨진 도흔을 유심히 살폈다.

머리뼈를 가른 게 아니라 으깨면서 지나간 칼.

슷! 슷!

서리형개가 허공에 손짓을 했다.

칼이 나아가는 궤적을 그려본다.

동박의 칼은 잘 알고 있으니, 우선 동박의 칼부터 그려본다.

동박의 칼은 사부의 칼이다. 그것이 일홀도가 아닌데, 굳이 따라서 한다.

무엇을 하든 내버려 두었다.

서로 사형제의 정리나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 자신의 길을 가는 처지다. 간섭할 이유가 전혀 없다.

스으읏!

사부의 일홀도, 단숨에 내리찍는다.

동박은 사부의 일홀도에 못 미친다. 속도 면에서 눈 한 번 깜짝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 정도의 차이라면 칼 앞에 심장을 내놓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박은 몰랐겠지만.

츠으읏!

‘칼로 옆머리를 뭉개려면…… 이쯤에서 이런 각도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러자면 동박의 칼을 흘려보내야 한다. 칼이 다가오기 전에 친 것이 아냐. 칼을 피하고 친 거야. 이놈!’

서리형개의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 튀었다.

서리가헌의 눈빛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도 동박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냈다.

서리가헌이 일어섰다.

그는 서리형개를 보더니 어깨를 툭툭 쳤다.

“네 차례야.”

서리형개는 입술을 비틀며 웃기만 했다.

* * *

“뭐냐!”

서리형개가 몹시 화난 듯 이를 악물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그 앞에 선 사내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서리형개가 화를 내면 목숨이 위험하다. 누구든 예외가 아니다. 방금 칭찬을 받았던 자도 분노 앞에 서 있다가 목숨을 잃은 경우가 왕왕 있었다.

지금 서리형개가 분노하고 있다.

“네놈들, 그 꼬락서니는!”

“형옥이 붕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제…….”

사내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습관처럼 그도 ‘제 잘못입니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화를 내고 만다.

서리형개는 다르다. ‘제 잘못’이라고 하면 그럼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며 목숨을 빼앗아 버린다.

“형옥이 붕괴해?”

“형옥 전체가 일시에.”

“기망살수 비록은?”

“미처…….”

쫘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이 올라왔다. 보고하던 사내의 얼굴이 한 바퀴 휙 돌았다.

그러나 사내는 곧바로 다시 섰다.

왼쪽 볼이 퉁퉁 부어오르고, 입안이 터져서 핏물이 입술 밖으로 흘러내리지만 아픈 표정조차 짓지 못했다.

“스무 명이 가서 여섯 명만 돌아온 것도 죽을죄인데, 기망살수 비록까지 놓쳐!”

“…….”

“모두 죽여라. 죽이다 보면 활검문에 향했던 살수가 튀어나올 터, 죽인 후에 보고해라.”

“네!”

사내가 깊이 부복했다.

“네가 직접 나설 줄 알았는데, 아이들을 시킨 거야? 시킬 거면 좀 야무진 애들을 보내지.”

서리형개 옆에 한 사람이 섰다.

“쓰레기를 치워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물에서 건져내니까 보따리 내놓으라고 해?”

서리형개가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 선 사내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쓰레기라는 말 좀 하지 마라.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귀에 못이 박인다.”

“크크크!”

서리형개가 웃었다.

옆에 선 사내, 소축십검 중 진개(塵芥)다.

진개는 달리 쓰레기라는 말이다. 허도기가 흘린 쓰레기는 그가 모두 치웠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진개는 매우 용의주도하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가 세상에서 지우겠다고 하면 말끔히 지워진다.

“정동(艇洞)으로 만 냥 보냈다. 그런데 너…… 군대라도 키우냐? 어떻게 일만 했다 하면 돈타령이야? 저 애들은 다 뭐고? 모난 놈이 정 맞는 것 몰라? 너무 튀지 마라.”

“흐흐흐!”

서리형개가 웃었다.

“그런데…… 혈검 맞아?”

“맞다.”

서리형개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네 말 듣고 나도 강조 시신을 살펴봤는데, 난 영 모르겠더라고. 검이 중완혈(中脘穴)로 들어가서 신도혈(神道穴)로 나온 것은 알겠는데, 그런다고 전부 혈검은 아니잖아?”

“중완혈로 쑤셔서.”

서리형개가 진개의 명치 부근에 손을 댔다.

“등 뒤 신도혈로 삐져 나왔어. 아래에서 위로 쑤시는 검이야. 긴 장검을 단도처럼 사용했다고. 네가 이런 식으로 쑤신다면 어떤 초식을 쓸래?”

“으음!”

진개는 침음했다.

사실, 서리형개에게는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도 강조의 시신을 보는 순간 퍼뜩 혈검을 떠올렸다.

죽은 현정부인의 진신 검공!

아니, 혈검경은 현정부인의 부친인 혈해검성의 검법이다.

무공에 별반 자질이 없고, 표사(鏢師) 정도나 하려고 무공을 접했단다. 그러다가 우연히 혈검경을 얻어서 수련했는데, 이후 일약 혈해검성이 되었다.

중원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정고수가 된 것이다.

그런 무공이 강조의 몸에 나타났다.

취화원 살수가 혈검을 사용했다.

취화원이 어떤 연유로 혈검경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성검문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마지못해서 자살을 택한 전대 문주 부인의 무공이지 않은가.

혈검이 나타나고 일홀도가 등장했다.

전대 문주 허도강과 삼십육대 일홀문주는 끊을 수 없는 막역한 사이다.

이건 복수다.

“혈검이 맞아.”

서리형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뒤에서 듣다 보니까 모두 죽이라고 하던데, 누굴 죽이는 거야?”

“취화원 살수. 싹 다 죽인다.”

“해산했잖아?”

“후후! 간 보는 게 습관이군.”

“너 너무 깊숙이 들어오고 있어. 그러다가 정말 정 맞는다. 널 보면 꼭 나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올 것 같아. 서로 선은 지키도록 하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훗!”

서리형개가 피식 웃었다.

허도기는 일홀문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하로 거둔 것도 아니다.

일홀문에게 일정 지역을 할당해 주었다.

풍도곡이다.

말이 풍도곡이지 사방 오백 리가 넘는다. 일개 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일홀문은 풍도곡의 왕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행동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풍도곡을 벗어나면 말이 달라진다.

일체 정보가 차단된다. 풍도곡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풍도곡 안에 전해지지 않는다. 세상이 바뀌어도 알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차단된다.

일홀문의 눈과 귀를 막아버린 것이다.

일홀문은 허공부가 요구할 때만 풍도곡 밖으로 나설 수 있다.

허도기의 특별 명령이다.

물론 이 명령은 언제든 해제될 수 있다. 무공으로 공부 허도기만 이기면 된다. 공부와 일홀문의 싸움은 생사 가름, 허도기를 죽이면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여기 예외가 있다.

진개는 공부의 특별 명령을 어기고 쓰레기를 치우는 일에 서리형개를 쓴다. 그리고 그에게 허공부 밀각(密閣)의 정보를 쓸 수 있게 해줬다.

밀각은 중원 무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서리형개가 밀각 정보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중원 정세를 환히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거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서리형개는 밀각 정보를 이용해서 취화원 살수들을 죽이려고 한다. 밀각에서는 취화원 제일거점 아홉 곳뿐만 아니라 제일거점을 벗어난 후의 행동까지 예측하여 도형으로 표시해 놓았다.

그것을 이용하면 중원에 피바람이 분다.

진개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아! 조용히 끝냈으면 했는데…… 취화원 살수를 깡그리 제거한다니 꽤나 시끄럽게 됐네.”

강조를 죽인 자가 혈검을 사용한다면 취화원 살수를 모두 죽이는 것도 좋은 방책이 될 수 있다.

취화원 살수들을 죽이다 보면 혈검도 나타난다.

혈검까지 죽이면 뒤가 깨끗해진다.

복수고 뭐고 따질 것도 없다. 어떻게 혈검경을 얻었는지 알아볼 필요도 없다. 현정 부인의 뒤만 끊으면 된다. 혈검을 쓰는 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거다.

서리형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뒤나 막아.”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처리해 주고. 너무 깊숙이 들어오지 말고. 이건 진짜 충고야.”

진개가 돌아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