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第十章 무가불가(無可不可 : 어쩔 수 없이) (4)
사형들은 조용하다. 조용할 수밖에 없다. 할배는 지난 십오 년 동안 발자국을 지우면서 살아왔다. 누구도 찾을 수 없게끔 철저하게 흔적을 지웠다.
물론 ‘흔적 지우기’는 일홀문을 염두에 두었다.
일홀문이 찾아올 수 있는 방법을 모든 면에서 차단했다.
아걸이 마음먹으면 두 사형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도 그를 찾지 못한다.
사형들은 지금쯤 동박의 시신은 찾았을 것이다.
활검문은 동박을 찾지 못하지만, 사형 눈까지 속이지는 못한다.
사형 눈에 자신의 일홀도는 어떤 모습을 비쳤을까? 분명히 어설픈 풋내기 솜씨라고 비웃었겠지만, 약간의 긴장감이라도 가졌을지 궁금하다.
이제 풍파를 일으킨다.
자신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싸움이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풍도곡을 찾아갈까? 아니다. 풍도곡이 어딘지 안다. 그래서 할배와 함께 은밀히 잠입해서 구석구석을 뒤져 본 적이 있다.
결론만 말하면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풍도곡은 너무 넓어서 사형들이 어디 기거하는지 거처를 찾기가 불가능했다.
지금 다시 풍도곡을 찾아간다고 해도 빈손으로 돌아 나올 건 분명하다.
‘풍도곡을 아는 사람이 있지. 소축십검.’
아걸은 종이 뭉치를 한 무더기 꺼내서 한 장씩 살펴나갔다.
종이 뭉치는 할배의 역작이다.
할배가 십오 년 동안 중원을 떠돌면서 수집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물론 할배의 정보 수집은 허공부와 세 사형에게 집중된다.
그 외에는 모든 사람이 관심 밖이다. 정의로운 일을 했든 나쁜 짓을 벌였든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이 바로 옆에 있어도 쳐다보지조차 않는다.
하지만 소축십검에 대한 말만 나오면 귀를 쫑긋 세운다.
그들 중 누가 방귀만 뀌었다고 해도 당장 지필묵을 꺼내서 적어 내려간다.
할배는 참 지독했다.
‘그래. 이거.’
아걸은 종이 뭉치 속에서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흑섬(黑蟾) 조추한(趙秋嫻)
소축십검 중 현재 월직인 검은 두꺼비 조추한에 대한 정보다.
그는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산다.
여자를 탐하지 않고, 술을 멀리하며, 도박도 모른다. 가까운 사람도 없고, 친구도 없다.
집에는 하인 한 명, 시비 한 명만 있다.
그는 나이 마흔 중반이 되도록 오직 검만 수련한다. 허도기가 소축 생활을 할 때부터 ‘수련제일(修練第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수련만 했다.
무공에 재질이 없어도 저만큼 수련하면 검귀가 되고도 남겠다.
흑섬 조추한에게 한 말이다.
하물며 조추한은 무공에 대한 재질도 탁월하다. 소축십검치고 무재(武才) 아닌 자가 없다.
툭!
아걸은 찾아낸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튀겼다.
* * *
어두운 밤, 한 사람이 걸어온다. 아니, 걸어오다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선다.
잠시 후, 그가 다시 걸어왔다.
그가 걷는 길에 한 사람이 있다.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를 쳐다본다.
맹수다!
맹수는 맹수를 알아본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인지 비등한 상대인지 단번에 꿰뚫는다.
그가 다가서다가 삼 장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췄다.
“날 기다렸나?”
음성이 매우 차분했다.
“한 시진쯤. 잡무가 많았나 보군. 밤늦게 귀가하는 걸 보니.”
“누구냐?”
“아걸.”
“아! 아걸……. 요즘 한참 난리를 피우고 있는 아걸이 네놈이군. 하하하! 대담해, 참 대담해.”
팔제 흑섬 조추한이 웃었다.
아걸은 여전히 나무에 등을 기댄채 말했다.
“서리가헌, 서리형개. 둘 중 한 명만 넘겨주면 돼. 어디에 있나?”
“그자들 풍도곡에 있잖아. 그것도 몰랐나? 같은 일홀도면 서로 사형제일 텐데.”
“풍도곡은 너무 넓어서. 그리고 사형제라고 반드시 사이 좋으란 법은 없고.”
두 사람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뭐 하자는 거냐?”
“널 잡으려고.”
“가능할까?”
“충분할 것 같아서 찾아왔는데.”
“그렇다면 시험해 봐야지. 남은 이야기는 검이 말하는 것을 들은 후에 하지.”
스릉!
조추한이 검을 꺼냈다.
조추한의 검은 눈부실 정도로 빠르다.
검이 흐르지 않는다. 흐르기는 하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결과만 보인다.
머리를 친다? 머리를 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를 친 모습만 보인다.
쒝! 쒝! 쒝! 쒝!
매서운 칼바람이 어둠을 찢었다.
‘빠르다!’
아걸은 조명천검을 처음 봤다.
할배와 함께 조명천검을 보고자 혈무대 주변을 서성인 적이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소축십검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자 했다.
하나 보지 못했다.
성검문이 허공부로 바뀐 이후에는 혈무대에 오르는 사람조차 없다. 허공부에 도전장을 내밀어서 무공을 입증하려는 사람조차 맥이 끊겨 버렸다.
허공부는 너무 강한 힘으로 무림을 지배한다.
결국, 남들이 하는 말을 주워 모아서 조명천검을 상상으로 만들어냈다. 빠름, 초식 변화, 검에 깃든 묘리까지. 능히 일홀도와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한 무공을 상상했다.
한데 조추한이 전개하는 조명천검은 상상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다. 검초가 단순하면서도 방어할 수 없게 만든다. 계속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슷! 슷! 슷!
조추한은 십 검을 공격했고, 아걸은 열 걸음을 물러섰다.
그동안 아걸은 칼을 들지도 못했다. 몇 번이고 칼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우선 몸을 빼는 게 급했다. 미처 칼을 들어 올릴 틈이 없었다. 검이 밀고, 또 밀어왔다.
조추한 정도 되는 무인이라면 칼을 들 시간은 줘야지. 비겁하게 준비도 안 했는데 공격해!
누가 이런 말을 하랴!
조추한을 탓하지 못한다.
그는 삼 장 앞에서 검을 뽑았다. 삼 장이라는 거리를 단숨에 좁혀올 동안 칼조차 들어 올리지 못한 건 아걸 잘못이다. 무공이 그만큼 미숙한 것을 탓해야 한다.
‘십칠연검!’
진기 한 올로 십칠 검을 연이어 펼쳐낸다.
검과 검 사이의 간극은 거의 없다. 당하는 사람은 십칠 검이 일 검처럼 보인다. 그래서 선기를 뺏기면 여간해서는 만회하지 못한다. 십칠검에게 쫓기다가 꿰뚫린다.
순간, 아걸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자신이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을 잊었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한순간에 잊혔다.
대신 눈이 검을 본다. 검의 변화를 본다.
몰안!
검을 본 후에는 칼을 쳐낸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몸이 쓰였다.
팟!
칼이 조추한을 스치며 지나갔다.
삼십오대 일홀문주의 일홀도, 회륜도(回輪刀)다.
제이대 일홀문주의 회선도와 회륜도는 다르다. 회선도는 칼이 허공에서 선회하는 것이지만, 회륜도는 칼 전체가 핑그르르 휘돈다. 칼이 마차 바퀴에 달아놓은 회륜도가 된다.
파앗!
조추한은 회륜도를 받지 않고 물러섰다.
회륜도에 병기를 부딪칠 무인은 없다. 회륜도에 실린 경기는 무척 강해서 어떤 병기든 토막 낸다.
회륜도는 내공으로 펼쳐내는 칼이다.
파앗!
회륜도가 위로 솟구치더니 이내 낙성(落星)이 되어서 뚝 떨어졌다.
십이대 일홀문주의 유성비도(流星飛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은 참 아름답다. 유성비도도 아름답다. 하지만 곧 피를 튀긴다. ‘어! 피해야지!’ 했을 때는 이미 칼이 몸을 지나간 후다.
휘이이익!
조추한이 무려 다섯 걸음이나 물러섰다.
그에게는 아걸의 반격이 몹시 뜻밖이었을 게다. 십칠연검을 펼치면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데, 아걸은 피했을 뿐만 아니라 생전 보지도 못했던 도법으로 공격해왔다.
“역시 일홀도!”
호흡을 가다듬은 조추한이 재차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검세가 변했다.
검법을 전개하는 것 같지만 한 번 더 보면 힘이 없다. 검에 힘을 실은 것 같지 않다. 정말 공격하는 건가?
조추한의 검초는 비조복개다. 조명천검 중 가장 빠른 검초여서 즉시 피해야 한다. 하지만 검에 힘이 실리지 않아서 칼로 받아내도 무방할 것 같다.
‘장막 뒤에 힘!’
아걸은 조명천검에 실린 힘을 파악했다.
성검문 말로는 은장재계이살이라고 한다.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 하찮은 물에 살검을 담는다. 너무 싱거워서 피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검인데 실은 살초다.
조명천검에 조명십해를 섞었다.
슈웃!
아걸은 칼을 들어 조명천검을 맞이했다.
칼과 검이 부딪친다.
묵직한 칼과 가볍기 이를 데 없어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검이 충돌한다. 순간,
쒝! 팟!
지극히 짧아서 거의 들리지도 않는 파공음 두 가닥이 울렸다.
조추한의 검초가 변화했다. 경검에 실린 살초가 터졌다.
검이 한 치쯤 밑으로 뚝 떨어지더니 아걸의 심장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든다.
아걸의 칼도 변했다.
검과 부딪칠 순간, 아걸의 상반신이 옆으로 뉘어졌다. 조추한의 변검을 봤고, 신법으로 대응했다. 칼도 다섯 자루로 늘어났다. 그리고 다섯 자루 모두 조추한의 몸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제구대 일홀문주의 환도(幻刀)다.
환도는 십이식(十二式)으로 이루어졌는데, 아걸이 사용한 것은 육식이다.
아걸은 매초 다른 도법을 사용하고 있다.
검법이 편법으로, 편법이 다시 창법으로 변하는 것보다 더 큰 변화가 일어난다.
분명한 것은 어느 것 하나 살법 아닌 것이 없다는 거다.
팔제가 처음 겪어보는 무지막지한 도법이다. 칼 그림자가 세상을 가득 메운다. 사방을 쳐다봐도 온통 칼 그림자뿐이다. 세상은 보이지 않고 칼만 보인다.
퍽!
살을 찢는 파육음이 울렸다. 딱 한 차례.
“잡았다.”
“……인정하지. 쿨룩!”
조추한이 거센 기침을 쏟아냈다.
기침을 흘릴 때마다 붉은 피가 샘물처럼 솟구쳐 나왔다.
다섯 개로 변한 칼이 조추한의 가슴을 짓이겨 놓았다. 마치 곰이 달려들어서 확 물어뜯은 것 같다.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가서 갈비뼈도 보이고, 심장도 보인다.
“잡았으니 말하지. 서리가헌, 서리형개 둘 중 한 명은 줘야겠어. 어디 가면 볼 수 있지?”
“그 사람들 잡아서 뭐 하려고? 복수인가? 쿨룩! 아니면…… 천하제일인이 되기 위해서는…… 쿨룩! 초강자들을 꺾어야 하는 일홀문 숙명인가?”
“시간이 많이 없어.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지.”
조추한이 피식 웃으면서 아걸을 쳐다봤다.
“지금 네 무공으로는 가 봤자 죽음이야. 서리가헌은 날 일 초에 끝낼 수 있거든. 십칠연검 따위 펼칠 틈도 없어. 그거에 비하면 넌…… 쿨룩!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
조추한은 서리가헌의 거처를 말해주었다.
그가 말해준 장소는 서리가헌의 숙소가 아니다. 성검문이 그들 사형제를 만나는 장소다.
“하하! 네놈이 누군지 참 궁금했어.”
“그랬나?”
“활검문도 시신을 보내왔을 때, 네놈에 대해서 뭔가 있을까 하고 밀각을 샅샅이 뒤졌지. 아무것도 안 나와. 어떻게 그림자처럼 살 수 있었던 거지?”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지. 세상이 보지 못하게 사는 사람.”
“궁금하군. 네 끝은 어떻게 될지. 그런데 네 칼, 일홀도 맞지?”
“맞아.”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내가 본 것과는 너무 달라서 헷갈렸어. 정말 일홀도인가 하고. 쿨룩! 그건 그렇고…… 몽설이라는 여자, 누구야? 잘 아는 사이지?”
“……!”
아걸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어도 몸으로 말한 것이다.
“취화원…… 참 독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동승 사건에 대해서는 모두 함구야. 그래도…… 쿨룩!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법이지. 쿨룩! 몽설은 드러났다. 혈검을 그렇게 써대는데 모를 수가…… 없…… 지…….”
툭!
조추한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몽설이!’
아걸의 미간은 심하게 찌푸려졌다.
역시 그녀를 싸움판에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할배, 괜한 일을 벌여가지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