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第十章 무가불가(無可不可 : 어쩔 수 없이) (5)
“물 좀 드세요.”
팔 장로가 깨진 사발에 물을 떠 왔다.
원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모두 꼴이 말이 아니다. 전신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돼서 고왔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다.
“이게 전부인가?”
취화원주가 침음하듯 말했다.
“열심히 하신 거예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칠 장로가 위로하듯 말했다.
죽을힘을 다해서 사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역부족이다. 수하들이 너무 넓게 흩어졌다.
살아남은 자가 장로 넷에 수하 열둘이다.
수하들은 아직 더 살아있을 수 있다.
장로들처럼 정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 아직은 살해 대상이 안 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장로 다섯 명은 죽었다.
장로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이미 죽은 후였다.
장로 다섯 명이 죽은 것은 확실하고, 취화원 살수는 삼백일흔두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해산하지 않는 건데.
원주 잘못이다. 해산에 급급해서 해산의 위험성을 충분히 말해주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 잘못이다.
그래도 그렇지……. 취화원 살수들이 은퇴한 후, 한결같이 화원으로 달려갈 줄 누가 알았나.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그냥 놀기도 했다면 표적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저놈들 도대체 누구지? 누군데 이런 칼을 쓰는 거야?”
삼 장로가 날 선 칼을 집어 들었다.
그들을 급습했던 사내들이 사용했던 칼이다.
칼은 종류가 각기 다르다. 환도, 대두도, 귀두도…… 자기 나름대로 쓰고 싶은 칼을 쓰는 모양이다.
도법은 말할 것도 없다. 도법이랄 것이 없다.
칼을 쓰되, 단칼이다. 초식을 구사하는 게 아니다. 감각적인 싸움을 한다.
이런 수법은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온다.
잘하면 왕이 될 수 있고, 못하면 펑펑 나가떨어진다.
저들은 중간이다. 그러니 나가떨어지기도 하고, 왕도 된다. 아주 사납지만 싸울 수는 있다.
“난 누군지 알 것 같아요.”
몽설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사내들의 칼은 마구간에서 본 아걸의 무공과 흡사하다. 작두로 세상을 쪼개던 바로 그 도법이다.
그러고 보니 저들 병기도 모두 칼이다.
“누군데? 어떤 놈들이야?”
삼 장로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몽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홀도다. 그리고 먼 기억 속에 완전히 묻혀서 생각나지도 않는 아버지의 제자들, 일홀무인들이다.
아걸이 이런 자들을 키워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세 명…… 서리가헌, 서리형개, 동박 중 한 명이 키워낸 자들이다. 그러니 거침없이 살인하는 것이다.
그들을 말하면 투지가 꺾인다.
중원 무인 중에서 일홀무인과 싸우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몽설은 일홀무인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
그녀가 아는 것, 아니, 본 것이라고는 아걸의 칼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섬뜩하다. 한데 취화원주는 더 기가 질릴 말을 한다. 일홀문에서 아걸의 무공 따위는 허접한 것이라고 한다. 사형들의 무공은 그야말로 하늘이라고.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싸우나.
몽설의 동료들은 일홀문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니 말해줘도 투지가 꺾이지 않는다.
장로들은 일홀문을 안다. 장로들이 활동할 무렵에는 일홀문도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오죽하면 ‘성검문 위에 일홀문’이라는 말까지 있겠나.
역시 일홀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낫다.
“조금 더 확인해 보고요. 알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지는 않아서요.”
취화원주가 몽설을 힐끔 쳐다봤다.
원주는 이미 몽설의 속내를 읽었다. 그녀가 말하지 않은 부분을 알아챘다.
그래서인가? 원주의 미간이 더 깊이 찌푸려졌다.
“옵니다!”
밖을 경계하던 살수가 안으로 뛰어들면서 소리쳤다.
“또?”
칠 장로가 질린 얼굴로 원주를 쳐다봤다.
모두 의복이 피범벅이다. 혈인 아닌 사람이 없다. 자신이 흘린 피가 아니라 사내들이 쏟아낸 피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또 온다.
“우리가 몇 명이나 죽였지?”
“거의 백 명은 될 것 같은데요.”
백 명이면 일개 문파를 형성하고도 남는다. 더욱이 저들 들개 무리라면 오히려 넘친다.
저들은 문파다.
취화원이 파악하지 못하는 미지의 문파다. 난생처음 보는 무공에, 처음 보는 자들이다.
“여기는 우리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넌 애들 데리고 피해.”
취화원주가 몽설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아네요. 여긴 제가…….”
“이것이!”
취화원주가 노한 듯 눈을 부릅떴다.
“원주님!”
“네 무공은…… 휴우! 아직 어리다. 이제 막 알기 시작했잖니. 조금 더 큰 후에 마음껏 써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 마음껏 휘두르면 어떤 결과가 올지 모르잖아. 아껴. 아껴야 해.”
취화원주는 몽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했다.
니환궁으로 들어간 진기가 심검을 만든다.
이 부분을 원주는 두려워한다.
단전 진기로 심검을 만든다면 얼마든지 설명할 말이 있다.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상궁 진기를 활용한 무공은 너무 생소해서 판단이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 뇌를 너무 가동시키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혈검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그러니 지금은 혈검을 아끼고, 완전히 혈검경을 수련한 후에 쓰라는 말씀이다.
“아뇨. 원주님을 잃을 수는 없어요.”
몽설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 없으면 내가 죽니!”
“저 사람들 같으면 원주님도 당할 수 있어요.”
몽설은 당돌하게 말했다.
자신은 괜찮고, 원주는 당할 수 있단다. 평소 같으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휴우!”
취화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서리가헌이나 서리형개가 양성한 무인이라면 몽설 말이 맞다. 취화원 무공으로는 저들을 상대하지 못한다. 공격해 오는 자들이 지금까지 죽인 자들과 동급이라면 상대할 수 있지만, 조금만 더 강한 자가 와도 힘들어진다.
저들을 상대할 수 있는 무공은 혈검밖에 없다.
“미안하구나.”
취화원주가 몽설의 볼을 만졌다.
정로들과 취화원 살수들은 하루아침에 절정고수가 되어버린 몽설을 놀란 눈으로 쳐다볼 뿐이다.
그들은 몽설이 어떤 무공을 수련했는지 알지 못한다.
핏빛 검이 번쩍이면 사람이 죽는다.
몽설의 검은 마검이다. 몽설이 혈검을 휘두르면 매우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움 속에 사람이 죽는다. 마검도 이런 마검이 또 있을까 싶다.
도대체 어디서 어떤 무공을 수련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그럴 짬이 나지 않는다. 약간이라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가요.”
몽설이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공격해 온 자들이…… 겨우 네 명이다. 이쪽은 열여덟 명인데, 사내들은 달랑 네 명이다.
누가 누구를 공격하나.
하지만 몽설은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원주님, 왼쪽에서 두 번째. 제가 맡아요.”
“……그래.”
취화원주가 사내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강자다.
몽설이 말한 자는 네 명 중 가장 강한 자이고, 다른 세 명도 섣불리 단언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누가 몽설이지?”
역시 왼쪽에서 두 번째로 서 있는 자가 말해왔다.
“나.”
몽설이 그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하하!”
사내가 웃었다.
사내는 왼쪽 허리춤에 칼을 꽂고 있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상태다.
왼쪽에 꽂힌 칼을 왼손으로 뽑아서 사용? 역도(逆刀)다.
역도는 대체로 빠름에 치중한다. 짧고 강한 타격, 재빠른 초식 변화, 숨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공격…… 사내가 어떤 도법을 구사할지 예측된다.
“하아!”
몽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진기가 빠르게 휘돌았다. 니환궁에 밀집된 진기가 붉은빛 감도는 심검을 만들었다.
심검이 사방을 쏘아본다.
“혈검이군.”
사내가 빙긋 웃었다.
혈검을 사용하면 얼굴이 붉게 상기된다. 피가 얼굴로 몰리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낯빛은 혈검의 숙련도에 따라서 붉은 빛, 자색, 검은색, 그리고 다시 붉은색으로 돌아온다. 물론 미숙할 때의 붉은 색과 절정을 이룬 후의 붉은 색은 윤기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혈검을 아는 사람이라면 얼굴만 보고도 숙련도를 알 수 있다.
사내는 혈검을 안다.
그는 몽설의 낯빛을 보면서 웃는다. 그 정도의 혈검은 자신 있다는 듯 밝게 웃는다.
몽설은 조용히 검을 잡았다.
모든 신경을 심검에 모은다. 오감이 상대를 관찰한다. 눈으로 보고 감각으로 느낀다.
“차앗!”
사내가 공격하는 듯 고함을 버럭 질렀다.
몽설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고함만 내지를 뿐, 공격해 오지 않는다. 심검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거센 고함을 듣고도 조용히 기다렸다.
“차앗!”
사내가 또 고함질렀다.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니환궁에 자리 잡은 심검이 일절 움직이지 않는다. 눈은 실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신 감각은 실수하지 않는다.
“찻!”
사내가 세 번째 고함을 내질렀다. 순간,
촤아아악!
칼이 밀려온다. 거센 칼이 니환궁을 쪼개 온다.
몽설은 검을 뽑았다. 니환궁의 심검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움직였다.
검이 위로 치솟는다. 그녀도 검을 위로 쳐들었다.
검을 내리찍는다. 그녀도 내리찍는다.
니환궁의 심검을 보고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다. 니환궁과 그녀는 일체다. 니환궁의 심검과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한 몸이 되어서 동시에 움직인다.
까앙!
검과 칼이 부딪쳤다.
“후욱!”
몽설은 비칠비칠 물러섰다.
상대가 니환궁의 심검을 막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거센 힘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내력에서 압도적으로 차이가 벌어진다.
“큭!”
몽설은 혈류가 역류하는 것을 감지했다.
단 한 번의 겨룸으로 내상을 입었다. 진기가 격탕해서 좀처럼 안정되지 않는다.
사내는 혈검을 어떻게 깨는지 알고 왔다.
원주 말마따나 조금 더 숙련된 상태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너무 숙련도가 낮은 상태에서 상승절기를 사용했으니 이런 꼴을 당할 수밖에 없다.
“가라!”
쒜에엑!
사내의 고함과 칼바람이 동시에 들렸다.
몽설은 칼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기혈이 엉켜버려서 움직일 수가 없다.
“아!”
그녀는 날아오는 칼을 지켜보기만 했다.
“어딜!”
요행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취화원주가 한달음에 달려들어 칼을 막아 주었다.
까앙!
칼과 검이 부딪쳤다. 그리고 취화원주 역시 엄청난 내력에 떠밀려 비칠비칠 물러섰다.
“크윽!”
원주가 입으로 핏물을 한 사발이나 쏟아냈다.
병기를 단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 내상을 입는다. 그렇다. 사내는 병기에 내력만 실은 게 아니다. 병기로 사람을 살상하는 방법, 격산타우(隔山打牛) 수법을 보탰다.
검과 칼이 부딪치는 게 아니다. 내공 대 내공이 부딪치는 것이다. 초식 변화를 염두에 두었지만 실은 무방비 상태에서 내력으로 두들겨 맞은 것과 같다.
“누구…… 냐?”
취화원주가 사내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 무공을 지닌 사내가 이름 없는 졸자로 있을 리는 없다.
취화원주를 일도에 밀어낸다는 것, 내력으로 취화원주를 격타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사내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말해줘도 몰라. 워낙 산골짜기에만 틀어박혀 살아서. 아! 형옥주를 죽인 사람이라고 하면 알라나?”
사내가 칼을 들었다.
그는 취화원주보다 몽설을 먼저 죽이고자 한다. 칼을 몽설에게 겨눴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