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第十一章 일선희망(一線希望 : 한 줄기 희망) (2)
취화원주는 절망이 가득한 눈길로 몽설을 쳐다봤다.
희망이 없다. 저들을 상대하려면 지금이라도 몽설이 내상을 이겨내고 운기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몽설이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는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지만, 좀처럼 일어서지 못한다.
왜 저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안다. 그래서 절망스럽다.
타인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다른 사람이 알 수는 없다. 안다고 하는 것은 짐작 가능하다는 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취화원주는 정확하게 안다.
몽설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같기 때문이다.
몽설은 내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상이란 오장육부에, 또는 경맥에 충격이 가해져서 온전히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일, 무인은 숱하게 겪는다. 내상을 달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인의 일상이란 내상을 입고 회복하는 일이 반복되는 과정이라도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번 내상은 매우 특이하다.
내상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다. 아니, 내상이라고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가볍다. 오장육부에 강한 충격을 받고 피를 토하기는 했지만, 경맥 손상은 없었다.
그러니 그저 몸 한 번 툭 털고 일어서면 된다.
한데 그렇지 않다.
어떻게 된 것이…… 격산타우에 육신이 타격을 받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경맥이 끊긴다.
몽설은 진기가 끊겼다.
진기를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다.
처음 접전에서 사내는 모든 힘을 몽설에게 집중시켰다. 그래서 똑같이 내상을 입었어도 원주는 검을 들 수 있었고, 몽설은 더 힘들어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접전은 상황이 다르다. 사내의 힘이 오직 원주에게만 집중되었다.
원주는 두 번째 접전을 겪은 후에야 몽설이 어떤 사정에 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
몸에서 진기가 서서히 소멸된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다. 가볍던 도상(刀傷)도 시간이 흐를수록 무겁게 느껴진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만큼 몸이 힘들다는 소리다.
이런 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진다.
단박에 경맥을 끊은 것이 아니라 밧줄에 목이 걸렸을 때처럼 서서히 경맥을 좁힌다.
경맥이 끊기면 끊긴 경맥을 버리고 다른 경맥을 통해서 진기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면 정상적인 위력을 펼치지 못해도 최소한 발버둥은 칠 수 있다.
은살(隱殺)은 이런 가능성까지 차단한다. 진기의 우회조차 막는 것이다.
진기를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 부분이 막혀서 진기가 이어지지 않는지 파악되지 않는다. 내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파악이 되지 않는다.
이 내상도 치유할 수는 있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경맥을 점검해나가면 손상된 부위를 찾아낼 수 있다. 어렵지도 않다. 잘못된 부분이기 때문에 차분히 살피기만 하면 반드시 찾아진다.
그런 후에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치유해 나가면 된다.
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당장 싸워야 하는데 진기가 끊어진 상태이니 어떻게 검을 쓰나.
진기가 없으면 육신이 힘으로 싸워야 하는데, 끊어진 경맥이 육신의 힘마저 통제한다.
몽설은 검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다.
절망이다. 사장로와 십이 살수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 몽설이 진기를 회복하고 검을 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못한다.
“후우!”
취화원주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몽설은 진기가 완전히 끊긴 상태이지만, 그녀는 아직 약간의 발버둥은 칠 수 있다. 진기는 거의 육 할 이상이 사라졌지만, 육신의 힘은 남아있다.
힘이 있을 때, 마지막 한 수를 쳐볼 생각이다.
그녀는 검을 꽉 잡았다.
* * *
몽설은 혈검경 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뇌었다.
어떻게든 니환일검을 일으켜야 한다. 사내를 막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원주가 단 일 초 만에 나가떨어졌는데, 이것 역시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사내가 펼치는 무공, 낯설지 않다.
저런 무공을 본 적이 있다. 아걸이 펼친 작두 도법과 흡사하지 않은가.
일단 초식이 없다. 단지 칼을 매우 빠르게 휘두를 뿐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히 초식이 담겨 있다. 어떤 초식인지 알아내지 못할 뿐이지, 펼치는 자는 분명히 도결(刀訣)에 따라서 칼을 일으키고 거둔다.
저런 칼은 상대하기 곤란하다.
사내의 칼이 아걸의 칼과는 사뭇 다르지만, 같은 종류인 것만은 틀림없다. 왜? 사내의 칼에서 아걸 냄새가 풍긴다. 삭막하고, 팍팍한 쇠 냄새가 풍긴다.
니환일검을 일으켜야 한다.
오직 혈검만이 사내의 무지막지한 삭도(削刀)를 상대할 수 있다.
츠으읏!
진기를 일으켰다. 상궁에 잠들어 있는 니환일검을 꺼내고자 애를 썼다.
그런데 상궁이 열리지 않는다.
상궁이 활짝 열려야 니환일검을 꺼낼 수 있는데…… 상궁 안에 심검(心劍)이 잠들어 있는데…… 상궁으로 들어서지 못하니 검을 꺼낼 방법도 없다.
혈검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뒤적였다. 하지만 도움이 될 만한 글은 찾지 못했다. 비급에 이런 경우까지 대비해서 따로 비책을 적어 놓았을 리 없지 않나. 당연히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워본다.
몽설의 얼굴에 짙은 절망감이 어렸다.
검을 잡았다. 하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제대로 들어 올릴 수가 없다.
‘검을 잡을 힘조차 없어.’
사내에게 받은 타격이 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나?
그녀는 암울한 눈으로 사내에게 맞서 가는 원주를 쳐다봤다.
원주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다.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볼 뿐이다.
“죽엇!”
쒜엑!
칼이 날아온다.
사내들이 펼치는 도법은 한결같이 초식이 없다.
온전한 무공이라고 할 수가 없는 감각도(感覺刀)다.
무공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것 같다. 타고난 싸움꾼 손에 칼을 쥐여 준 것이나 다름없다. 본능적으로 칼을 휘두를 뿐, 일정한 규칙이 없다.
그런 감각도가 체계적으로 수련한 전통 무공을 짓누르고 있다.
살수 무공은 정통 무공이라고 할 수 없다. 기만과 사술이 가미된다. 하지만 그것도 오랜 수련을 통해서 얻은 결과물이지 본능적인 감각은 아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타고난 싸움꾼은 체계적으로 무공을 수련한 무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런 싸움꾼들 스무 명이 일시에 덤벼도 무인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것이 정설이다.
실제로 숱한 싸움, 비무 등 승부를 낼 수 있는 증명 방법을 통해서 확인된 사실이다.
그러면 왜 이들에게는 정설이 통하지 않는 것인가?
이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싸움꾼이 아니다. 단지 이런 종류의 무공을 체계적으로 수련한 것이다.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는 수련.
본능적으로 칼을 쓰는 수련.
정통 무공에 대응할 수 있는 수련.
지독할 만큼 극단적으로 감각을 끌어올리는 수련을 쌓은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은 초식 없는 칼을 쓰는 게 아니다. 나름대로는 정통 무공을 펼치고 있다.
카앙! 깡! 깡!
칼과 검이 요란한 쇳소리를 흘리며 부딪쳤다.
장한들은 무척 거칠게 칼을 쓴다. 사막에서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처럼 모든 것을 날려버리겠다는 심산으로 매우 빠르고 난폭하게 칼을 쳐낸다.
반면에 취화원 살수들은 체계적인 진법으로 맞섰다.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서 오행진(五行陣)을 펼쳤다.
금목수화토 다섯 방위를 점하고 서로 상생과 상극의 묘를 살려서 공방을 이어간다.
장한이 공격해 오면 상생의 묘리를 살려서 방어에 치중한다.
장한이 목(木)의 위치에 있는 살수를 공격해 오면 수(水)와 화(火)의 위치에 있는 살수가 방향을 틀어서 목과 합치한다. 삼재진(三才陣)이 펼쳐지는 것이다.
동시에 상극의 위치에 있는 토금 살수들은 장한의 배후를 공격한다.
목(木)의 상극은 토(土), 금(金)의 상극은 목(木)이다.
어느 쪽으로든 상극에 연결된 만큼, 상극 지점에서 공격을 가하면 타격력이 배가된다.
철저하게 진형에 의지해서 싸운다.
가급적이면 직접 충돌은 피한다. 장한이 어려움을 알고 물러서도록 유도한다.
절대로 맞받지 않는다.
사내는 세 장한과 취화원 살수 열다섯 명의 접전을 지켜봤다.
그들은 한 무더기로 뒤엉켜서 난전을 치르고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한 덩어리다.
장한들도 싸움에 엉켜 있지만, 취화원 살수들도 엉켜 있다.
사내를 막아설 사람이 없다. 있다면 취화원주를 부축하고 있는 삼 장로가 유일하다.
사내는 칼을 들어서 삼장로의 머리를 겨눴다.
머리를 찍어버리겠다는 의사표시.
이걸 막아 봐. 어떻게 막을래? 죽을힘을 다 해도 안 될 텐데, 그래도 살려면 발버둥 쳐야지?
사내가 씩 웃었다.
삼장로를 조롱하고 있다.
아니, 조롱이 아니다. 사내는 조롱을 보내고 있지만, 삼장로는 사내의 웃음을 조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실 그대로…… 죽음의 손짓으로 받아들였다.
“……저 먼저 가야겠습니다.”
삼장로가 부축을 풀고 검을 잡았다.
취화원주는 말리지 못했다. 잘 가라는 인사 따위는 더더욱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떠나보내는 것이 고작이다.
츠읏!
삼장로의 신형이 유령처럼 흐릿해졌다.
취화원 제일절기 암영검이다.
암영검의 두 가지 요소인 암(暗)과 영(影) 중에서 어떤 요소를 중시하느냐에 따라서 성질이 확연히 다른 검법이 탄생한다. 암을 중시하면 삼장로처럼 환검(幻劍) 형태로 드러나고, 영을 중시하면 은밀한 밀검(密劍)이 된다.
삼장로는 절정에 이른 환검을 펼치고 있다.
암영검이 통한다면 사내는 삼장로의 형체를 잡아내지 못해야 한다. 두 눈이 마법에 걸린 듯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삼장로의 모습이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보여야 한다.
타탁! 타타타탁!
사내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그리고 곧 전력을 다해서 달려온다.
시간을 끌 생각이 없다.
그는 이미 삼장로의 본신을 찾아냈다. 아니, 처음부터 암영검에 걸려들지 않았다.
타타탁! 탁!
사내의 신형이 허공이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병아리를 노리는 솔개처럼 득달같이 내리꽂힌다.
페에엑!
삼 장로는 최선을 다해서 검을 뻗어냈다.
사내의 칼에는 거력이 담겨 있다. 그러니 맞받을 수 없다. 내리치는 칼, 쳐올리는 검…… 부딪치면 검이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몸도 쪼개진다.
피할까? 피할 수도 없다. 칼이 너무 빨라서 물러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삼장로가 노리는 것은 사내의 두 다리다.
자신은 죽더라도 다리 쪽에 상처를 만들어 놓겠다는 심산으로 검을 뻗어냈다.
물론 이런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검을 뻗어내면서 느낀 것인데…… 정말 너무 빠르다. 벌써 칼이 머리 위에 있다.
‘세상에 이런 빠름이!’
삼장로가 이를 꽉 깨물었다. 순간,
퍼억!
하늘에서 둔탁한 소리가 터졌다. 동시에 붉은 핏줄기가 솟구쳐서 파란 하늘을 물들였다.
칼을 쳐내려던 사내의 정수리에서 붉은 꽃이 피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칼이 사내의 정수리를 찍었고, 머리가 갈라지면서 붉은 피가 솟구친다.
삼장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내가 터트린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사내 밑에서 검을 쳐올리던 삼장로의 얼굴을 핏물로 물들였다. 눈에, 코에, 입에…… 핏물이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