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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53화 (53/600)

#53화. 第十一章 일선희망(一線希望 : 한 줄기 희망) (3)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취화원 살수들도, 사내를 따라온 장한도 싸움을 멈추고 땅에 쓰러진 사람을 쳐다보았다.

사내가 쓰러져 있다.

무적처럼 보였던 사내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누워있다.

사내의 머리에는 칼이 박혀있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칼이 머리를 찍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이지?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칼 맞은 시신밖에 없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세 장한은 즉시 주위를 돌아봤다.

절정고수가 나타났다. 그것도 사내를 단 일도에 죽일 정도로 아주 강한 상대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고수는커녕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죽었으면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칼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이 없다. 사람은 없는데 칼만 떨어져서 절대 무적에 가깝던 무인을 단숨에 죽였다.

장한들은 공격을 멈췄다.

우두머리가 죽은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취화원 살수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한들은 배고픈 맹수다. 취화원 살수들이 합격진을 펼쳐도 간신히 현 상태만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저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취화원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히 칼을 던진 사람이 있을 텐데.

‘저 칼!’

몽설은 사내의 머리에 박힌 철도(鐵刀)를 한눈에 알아봤다.

아걸의 반철도다.

아삼이 직접 만들어서 아걸에게 건네준 반철도인데 어떻게 몰라볼 수 있겠나.

아걸은 항시 반철도를 차고 다녔다.

‘그 사람이야!’

머릿속에 아걸의 모습이 퍼뜩 스쳐 지나가면서, 반갑다는 느낌이 와락 일어났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아걸의 칼은 천지를 양단하는 천지단검(天地斷劍)이다. 칼을 던지는 비검(飛劍)이 아니다. 비검으로도 사내를 죽일 수 있지만, 그러려면 상당한 공부를 쌓아야 한다.

비검을 전문적으로 수련한 고수만이 지금과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거다.

아걸이 지닌 반철도는 천지단검에는 적합하지만, 비검으로는 부적합하다.

낯선 무공을 적합하지 않은 병기로 펼쳐서 절정고수를 죽였다?

이런 일은 아걸이 사내보다 두세 배 이상 강해야만 벌어질 수 있는데, 아걸이 그렇게나 강했나?

하지만 이런 의문도 곧 사라졌다.

그녀는 아걸이 왔다는 사실에 반가움이 와락 치밀었다. 절망, 공포, 불안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땅에서 불쑥 솟구쳤다. 아니,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아무도 없던 곳인데 문득 그가 서 있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누구지?

그는 무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일단 겉모습부터 무인답지 않다. 무인다운 강한 근육이 보이지 않는다. 근육질 사내가 아니더라도 무인이라면 날카로움이 엿보이게 되어 있는데, 어떤 위협감도 보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눈빛마저 밋밋하다.

눈에 살기나 투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약한 사람의 눈빛도 아니지만 강한 사람의 눈빛도 아니다. 매우 담백하고 담담해서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다.

얼핏 본 느낌은 평범하다.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사내다.

저벅! 저벅!

그가 걸어온다.

걸음걸이도 무인답지 않다. 농촌 총각이 논일하러 갈 때처럼 천연덕스럽게 걷는다. 전신이 모두 무방비 상태라서 언제든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로 보인다.

경계할 필요가 없는 자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이토록 평범한 자가 가까이 다가올 동안 왜 몰랐을까?

아무리 싸움 중이라고 하지만 누군가가 나타났는데, 이제야 알았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

당신 누구야? 어디서 나타났지? 어디서 온 거야?

한 사람, 두 사람……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누군가를 쳐다보자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걸아와 천화원 살수 옆에 섰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취화원 살수가 혼이 나간 듯 엉겁결에 손에 쥔 검을 넘겨주고 만 것이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인이, 그것도 한참 싸움 중인 살수가 자신의 병기를 남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낯선 자에게 넘겨준 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사내가 입을 열어서 검을 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다. 예전부터 아는 사람도 아니다. 지금 처음 본 낯선 사람이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자다.

그런 사람이 손을 뻗자, 취화원 살수는 귀신에 홀린 듯 검을 건네준 것이다.

휘익! 휙!

사내는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검의 무게를 알아본다. 손아귀에 검이 꽉 잡히게끔 위치를 조정한다. 손잡이 굵기도 알아보고, 검의 예리함도 살핀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의 휘두름으로 알아챈다.

사내가 검을 꽉 잡았다.

병기 조율이 끝났다.

저벅! 저벅!

그가 취화원 살수에게 둘러싸인 장한에게 걸어갔다.

장한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칼을 들어 올렸다.

“웬 놈이냐! 웬 놈인데…… 엇!”

장한은 소리를 지르다 말고 황급히 몸을 낮게 수그렸다. 그리고 재빨리 칼을 뻗어냈다.

낯선 자가 벌써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그는 매우 빠르게 솟구쳤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빠르다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밤하늘에 뜬 달처럼, 그가 허공에 있다는 사실만 알았다.

장한은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칼을 뻗어냈는데.

까앙! 퍼억!

검이 칼을 무시하며 내리쳐졌다.

칼이 반쪽으로 쪼개져 나갔다. 동시에 장한의 머리가 힘없이 베어졌다.

“훗!”

몽설은 피식 웃었다.

나타난 사람이 아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팽팽하게 곤두섰던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아걸이 장한을 어떻게 베어내는지 똑똑히 봤다.

마구간에서 본 칼이 아니다.

그녀가 본 칼, 작두로 활검문도를 베어낸 도법은 천지를 단숨에 갈라버리는 천지단도(天地斷刀)였다.

지금 아걸이 쓴 검법도 천지단도와 흡사하다. 하지만 무엇인가 약간 어긋난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는데, 다르다고는 말할 수 있다.

‘고마워. 와줘서.’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땅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었다.

진기가 상당히 불안정하다.

상궁 진기는 흐르는 듯 마는 듯 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어야 하는데, 급류를 탄 듯 마구 꿈틀거린다.

그녀는 눈을 감고,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후우!”

긴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진기를 끌어올려서 사지 백해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상궁으로 집중시켰다. 천천히, 매우 느리게 진행했다.

운공조식(運功調息)!

지금 그녀가 하는 행동을 누군가가 본다면 깜짝 놀라서 기겁할 것이다.

싸움 한복판에서 운공조식을? 지금 제정신인가?

물론 사내에게 입은 내상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은 안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는 검을 쓰지 못한다는 것도.

그러나, 운공조식을 취하는 동안에는 전신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야지에서 운공조식을 취할 때는 동료나 지인이 호법을 서준다. 몽설처럼 호법조차 세우지 않고 운공을 취하는 경우는 없다.

몽설이라고 그런 점을 모를까.

다른 때 같으면 절대로 운공을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음이 매우 편안하다. 운공이 아니라 두 발 쭉 뻗고 누워서 잠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걸이 있다.

지금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그녀를 해한다면, 그때는 아걸이 죽거나 중상을 입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일 것이다.

아걸이 움직이고 있는 한, 안전하다.

그녀는 아걸을 그만큼 믿는다.

아걸과 남녀 간의 정분을 쌓은 것은 아니다. 사랑이나 애정이라고 불릴 만한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정혼녀 아니던가. 비록 명분뿐이지만.

아걸은 그녀가 정혼녀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활검문도를 피해서 마구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강조 살행이 결정된 순간부터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전에 알았을지도 모르고.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다.

나쁜 놈!

어쨌든…… 아걸은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확실하게 믿는다.

‘후우우!’

몽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내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 * *

사삿! 사사사삿!

취화원 살수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들은 오행진을 풀었다. 그리고 멀리 비켜서서 둥글게 대원진(大圓陣)을 펼쳤다.

싸움에 낯선 사내가 개입했다.

취화원 살수와 장한들의 싸움에서 장한들과 낯선 사내의 싸움으로 바뀌었다.

장한 두 명과 사내, 세 명이 싸울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싸울 것이고, 예상으로는 장한 두 명이 패배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경계를 풀지도 않았다.

장한들도 자신들이 사내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보다 훨씬 강했던 상관이 단 일 도에 죽었고, 그들 동료가 일초도 막아내지 못한 채 절명했다.

두 명이 합공을 펼쳐도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도주도 생각할 수 있다.

취화원 살수들을 뚫고 나가는 쪽이 사내를 상대하기보다 훨씬 쉽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취화원 살수도 상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장한 한 명당 상대해야 하는 인원이 여덟 명에 이르는 데다가, 사내까지 쫓아오고 있다.

포위망을 뚫고 나갈 생각이라면 단숨에 뚫어야 한다.

취화원 살수들도 이런 점을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대원진까지 펼쳐서 방비를 단단히 했다.

이제 선택권은 장한들에게 넘겨졌다.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갈래, 말도 안 되는 강자와 싸울래?

“이거…… 오늘이 내 제삿날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씨나 뿌려놓을걸. 제사상 차려줄 놈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킥킥! 우리 같은 놈 팔자야 어디서 뭘 하다가 뒈지는 줄도 모르는데, 제사상은 무슨.”

장한들이 칼을 고쳐잡았다.

‘싸울 생각이야!’

취화원 살수들은 장한들의 마음을 읽었다.

자신들 같으면 철벽같은 사내와 싸우느니 차라리 힘들더라도 가능성 있는 곳을 뚫을 것 같다. 솔직히 장한들 무공이라면 탈출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그런데도 장한들은 싸움을 택했다.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간다고 해도, 뒤에 기다리고 있는 일이 이곳에서 죽는 것보다 재미없다는 뜻이다.

살행에 실패한 살수는 본문에 돌아와도 환영받지 못한다.

일단 형당에 끌려갈 것이고, 용서받을 수 있는 사안인지 조사받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조사가 매우 가혹하다면 귀환보다는 죽음을 택할 것이다. 사실, 중원 살수 대다수가 살행 실패는 곧 죽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장한들도 그런 것이었다.

이들은 대체 어디서 온 자들일까? 성검문이나 활검문이 이런 개망나니들을 양성했을 리는 없고…… 아주 지독한 사파, 혹은 마도 문파에서 왔을 텐데.

“차앗!”

“찻!”

장한들이 일제히 신형을 띄웠다.

순간, 낯선 사내는 두 사내를 향해 검을 던졌다.

만자탈(卍字奪)을 던지듯이, 손잡이를 두 손가락으로 잡고 퉁기듯이 던져버렸다.

휘르르릉!

검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허공을 휘저어나갔다.

“엇! 악!”

“크윽!”

장한 두 명이 동시에 비명을 토해내며 떨어졌다.

한 명은 비검에 맞았다. 팽그르르 회전하며 날아든 검이 복부를 쭉 긋고 지나갔다.

장한은 피하려고 했지만 회선검이 너무 빨랐다.

다른 한 명은 사내 손에 죽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사내가 회선검을 낚아채더니 가슴을 홱 그어버렸다.

눈부실 정도로 빠른 신법이다.

“아!”

취화원 살수들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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