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第十一章 일선희망(一線希望 : 한 줄기 희망) (4)
그가 운기조식 중인 몽설을 쳐다봤다.
그가 무슨 생각에서 몽설을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다. 몽설을 쳐다보는 눈길에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너무 무표정해서 모르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 같다.
눈길이 돌려졌다. 이번에는 취화원주를 쳐다본다.
취화원 살수들은 바짝 긴장했다.
아직 사내가 누군지 모른다. 장한들을 죽였다고 해서 반드시 적이 아니란 보장은 하지 못한다.
아직은 적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다.
만약 그가 취화원주를 공격하고자 한다면 죽기 살기로 막아보겠지만, 힘들 것 같다. 그가 죽인 사내들도 막기 힘들었는데, 이자는 저들보다 훨씬 강하다.
스읏! 푹!
사내가 피 묻은 검을 땅에 꽂았다.
“휴우!”
취화원 살수 중 누군가가 깊은숨을 토해냈다.
사내의 행동을 보고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아직도 그가 적인지 아닌지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취화원과 싸울 생각이 없는 것만은 확실하다.
저벅! 저벅!
그가 취화원주에게 걸어갔다.
취화원주도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가 걸어오자 장로가 앞을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원주에게 제지당했다.
“싸움은 끝났어.”
“문주님!”
“저 사람이 살심을 품으면 우리 모두 살아남지 못해.”
“그래도 손 놓고 죽을 수는…….”
취화원주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장로가 검을 거두고 문주를 부축했다.
취화원주는 내상을 입은 상태다. 아직 운기요상을 하지 못해서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있다.
사내가 원주 앞으로 걸어오더니 우뚝 걸음을 멈췄다.
취화원주에게 달려들던 사내가 하늘에서 떨어진 칼을 맞고 죽은 곳이다.
사내는 죽은 사내의 머리에서 반철도를 뽑아냈다.
휘릭!
반철도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러자 칼에 묻은 피가 작은 알맹이가 되어서 비산했다.
스읏!
사내는 반철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허리띠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취화원주를 향해 다시 걸어왔다.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사내는 담담한 눈으로 취화원주를 쳐다봤다. 적인지 아군인지 도무지 구분되지 않는 눈길이다.
“아걸이라고 합니다.”
그가 말했다.
취화원주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 잘 컸네.”
취화원주가 아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절 얼마나 아십니까?”
“전혀. 거의 모르는 편.”
“임맥(任脈) 구미혈(鳩尾穴), 독맥(督脈) 지양혈(至陽穴). 강기가 지양혈을 통해서 구미혈을 관통. 진기통타(眞氣痛打)는 매우 고절한 수법인데, 이런 자가 자유롭게 쓰니 이제는 고절하다는 말도 빼야 할 것 같군요.”
아걸이 죽은 사내를 쳐다봤다.
죽은 자는 ‘이런 자’라고 무시당할 사내가 아니다. 그는 대단한 상승 고수다. 취화원주를 단숨에 궁지로 몰아넣는 일은 결코 ‘이런 자’가 할 수 없다.
“진기통타가 뭐지? 처음 듣는데?”
취화원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모를 수밖에 없다. 진기통타는 일홀문 삼십육대 문주, 사부님의 비전비수(祕傳秘手)다.
“모를 때는 답답한데 알면 간단한 것이니, 요상부터 하시죠.”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식은땀까지 나는 걸 보니 내상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취화원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땅에 앉았다.
진기 격타라는 수법이 있다.
진기로 혈을 격타하는 방법인데, 타격 강약에 따라서 요상수법이 될 수도 있고, 치명상을 입히기도 한다. 타격하는 부위에 따라서 몸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단순 제압, 기절까지 시키는 침중 제압,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혈격타(死穴擊打)까지 다양하다.
진기격타 수법은 수법에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든 문파에서 활용하고 있다.
혈을 타격한다.
그렇다. 혈자리, 고정된 부위 한 곳을 타격하는 게 진기격타술이다.
사부는 진기격타술을 매우 높은 경지까지 발전시켰다.
몸 앞면을 가격하면 진기가 몸뚱이를 관통해서 등 뒤에 있는 혈까지 타격한다.
일수로 두 부위를 타격한다.
손등에 있는 혈을 타격하면 손바닥에 있는 혈까지 동시에 타격된다.
타격당한 사람은 타격 부위만 살핀다.
정반대 쪽에 또 한 군데 손상된 혈이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손상된 혈을 막거나, 휘돌려도 진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타격 부위가 두 군데라는 사실은 몽설처럼 차분하게 운공조식을 취해야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손상된 혈을 알아낸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타격당했는지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싸움 과정을 수십 번 복기해도 타격당한 적이 없을 테니까.
싸움 중에 진기통타를 당하면 두 다리를 잃은 것과 같다. 단전을 드러내놓고 싸우는 것과 같다.
죽은 자들, 사형 중 누군가의 수하다.
진기통타는 사부에서 제자로, 사형에게 이어졌는데 지금 똑같은 진기통타가 나타났다.
몽설의 등 뒤로 걸어갔다.
그를 막아서는 사람은 없다. 장로와 살수들 모두 원주와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막아서지 않았다.
슷!
몽설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에 손바닥을 댔다.
진기를 불어넣는다.
몽설은 운기조식 중이라서 오감을 완전히 닫아놓은 상태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론이고, 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뱀이 와서 발을 깨물어도 느끼지 못한다. 시각, 청각, 후각과 마찬가지로 통각(痛覺)도 막아버렸다.
당연히, 몽설은 명문혈에 닿은 손도 느끼지 못한다.
누군가가 그녀를 힘껏 때리거나 꼬집어도 전혀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진기 운행 속에 함몰되어 있다.
모든 의식과 무의식이 오직 진기 운행에만 집중된 상태다.
완벽한 몰아일체(沒我一體)다.
무인에게 이런 무방비 상태는 매우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다. 제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누군가가 급습을 가해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토록 깊은 운공은 사방이 완전히 막힌 연공실에서만 시행한다. 밖에서 하더라도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호법을 부탁한 후에야 한다.
몽설은 호법을 전혀 세우지 않고 물아일체 상태로 들어갔다.
내상이 그만큼 중했던 것은 아니다. 싸움이 끝난 후에 운공을 해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망설이지 않고 깊은 운공에 몰입해 들어간 것은 그를 믿어서다.
“위험한 여자군.”
아걸은 낮게 중얼거리며 진기를 불어넣었다.
* * *
“야야(爷爷: 할아버지) 말, 들었어. 시신을 수습해갔다고 하던데, 어디에 모셨어?”
“아니. 할배 죽지 않았어.”
“어멋! 정말!”
몽설이 찌푸렸던 얼굴을 활짝 펴면서 반색했다.
“할배가 마음대로 죽을 수나 있나? 저승까지 갔다가 귀신에게 쫓겨왔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괴도객(怪刀客)에게 베였다는 소리를 듣고 살기 힘들다더니 결국 그렇게 되셨구나 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지금 어디 계시는데?”
“혼수상태.”
“……!”
몽설이 침묵했다.
몽설은 아삼이 한 일을 알고 있다.
활검문도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그리고 십검 중 한 명이며 활검문 제오당 당주인 귀찰검을 죽인 일까지 들었다.
아삼이 귀찰검을? 아삼이 활검문 십검까지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고수였었구나. 하기는…… 아걸 무공을 보면 아삼 무공도 평범하지 않을 것 같기는 했는데.
활검문 사건은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큰 사건이었다.
객잔이며, 다루며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빠지지 않고 흘러나오는 주된 대화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니 듣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귀에 들려왔다.
그녀는 아삼이 왜 활검문에 시비를 거는지 알지 못했다.
아삼과 아걸이 자신의 청부살인을 기회로 모종의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이상은 듣지 못했다. 아삼이고 아걸이고 자세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이번 일에서 살아남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만 했다.
역시 객잔에서 들은 소리이지만 결국 아삼이 괴도객의 손에 죽었다는 소문까지 들었다.
‘결국!’
아삼의 죽음이 놀랍지는 않았다.
헤어지기 전, 두 사람이 워낙 ‘죽음죽음’하고 죽음을 운운했으니 결국 그렇게 됐구나 싶었다.
아삼을 벤 사람은 누구지?
활검문 십검? 활검문주? 아니면 성검문에서 파견한 고수?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 부분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으로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아삼이 살아있단다. 그때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혼수상태란다.
몽설은 짧은 말속에 숨겨져 있는 험악한 상황을 눈으로 본 듯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사람, 누구야? 야야, 벤 사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그래, 그럼. 당장 궁금한 것 하나만 물어볼게. 야야를 벤 사람, 죽었지?”
“…….”
아걸이 몽설을 쳐다봤다.
몽설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토끼 눈 뜰 것 없어. 야야를 벤 사람과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헤어지지는 않았을 것 아냐. 두 사람 사이에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 해결됐으니까 여기 온 거고. 한 사람이 왔으니 다른 한 사람은 죽었을 거고.”
“풋!”
아걸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 순간, 몽설은 웃지 않았다.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었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아걸은 이 싸움이 전혀 승산 없는 싸움이라고 했다. 그 점은 아삼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 싸움을 이기고 온 것이다.
사지 육신 멀쩡하고, 상처조차 입지 않았고, 얼굴에는 이겼다는 기쁨도 들뜸도 없다. 마구간에서 만났을 때처럼 태연하다. 너무 태연해서 얄밉기까지 하다.
“우리……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해?”
몽설이 불쑥 말했다.
“무슨 말이야?”
“그렇게 모른 척하지 말고.”
몽설이 아걸을 빤히 쳐다봤다.
싸움판 한복판에서 운공을 취할 때 이미 본색을 알아봤는데…… 역시 위험한 여자다.
겉모습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처럼 연약해 보이는데, 뱃속에는 철심이 꽉 들어차 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을 강단 있는 여자다.
아걸이 이미 정리해 두었던 생각을 말했다.
“우선…… 정혼은 파기하지.”
“왜?”
몽설은 아걸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되물었다.
“내게는 사형이 셋 있는데, 모두 악귀야. 공부 허도기도 내 사형들은 조심해야 해.”
몽설은 소리 나지 않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아걸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가 이유를 물었을 때, 대뜸 사형 이야기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이런 말을 해주려고 이미 생각해 놨다는 뜻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걸 입에서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사람, 결코 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 무신(武神) 공부 허도기가 거론된다.
아걸의 사형이라는 사람들……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된다.
“야야를 벤 사람이 셋째 사형이야.”
“아!”
사형제 간의 싸움? 넷째가 셋째 사형을 죽였다? 도대체 어떤 무인이, 어떤 문파가 이런 귀신들을 길러냈나.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난 이미 셋째 사형을 죽였어. 이제는 물러설 수 없다는 거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결국 끝까지 가야 하는데, 끝이 어딘지는 알지? 다른 두 사형마저 죽여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해.”
“훗! 내 기억으로는 셋째 사형을 꺾는 일도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 같은데?”
“난 셋째 사형을 정말 요행수로, 어떻게 어떻게 해서 간신히 눌렀는데…… 셋째 사형이 들개라면 다른 두 사형은 호랑이. 이 정도 차이라면 이해될까?”
“그게 파혼하고 무슨 상관이야?”
“적이 사형뿐이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여기 오기 전에 성검문 소축십검 중 한 명인 조추한을 죽였어. 지금쯤 성검문 추격대가 편성되었을 거야.”
몽설은 입을 쩍 벌렸다.
아걸의 말은…… 무신 공부 허도기까지 적이라는 뜻이다.
몽설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싸움을….”
“게다가 이 사람들, 아마 사형의 수족일 거야. 수족이 이 정도인 거지. 그러니 떠나. 되도록 멀리 말이야.”
아걸이 몽설을 쳐다봤다.
그러자 몽설이 눈살을 찌푸리며 침중하게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린 더더욱 갈 곳이 없어. 이제 이해되네. 살수문파가 해산했다는데, 왜 끝까지 쫓아와서 죽이나 했지. 이런 경우는 드물거든. 지금 멀리 도망가도 결국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건데…… 파혼, 안 되겠어. 정혼자로서 정혼녀, 책임져.”
몽설이 다부지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