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第十一章 일선희망(一線希望 : 한 줄기 희망) (5)
“아!”
“휴우!”
취화원 살수 중 몇몇이 탄식을 흘렸다.
몽설과 아걸이 나누는 말을 들었다.
일부러 엿들은 것은 아니다. 주위가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했고,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취화원 살수들은 아걸이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다.
아걸은 신기에 가까운 무공을 펼쳐 보였다. 말도 안 되게 강한 사내들을 벌레 죽이듯이 가볍게 죽였다. 그리고 원주와 몽설을 잘 아는 듯하다.
이 정도면 호기심이 끓어오르고도 남는다.
한데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기쁨은커녕 절망감만 깊이 스며든다.
아걸이 자신들을 구해줄 수호신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저승길로 안내하는 저승사자였다.
아걸이 말이 사실이라면 살 수 있는 길이 없다.
그가 셋째 사형을 죽였다는 말은 현실감 있게 와닿지 않는다. 셋째 사형이 누군지 알지 못하니, 이곳에서 죽은 사내들보다 더 강한 자를 죽였구나 싶다.
하지만 아걸 입에서 소축십검 중 조추한을 죽였다는 말이 쏟아져 나온 순간, 모든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기가 탁 막혔다.
소축십검을 죽였다면 성검문과 전면전을 치러야 한다.
당금 무림 문파 중에서 성검문을 무시할 수 있는 문파가 없으니 결국은 무림 전체가 적이 된다.
감당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아걸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하면 몽설이 스스로 알아서 물러설 것으로 생각한 듯한데…… 몽설이 뜻밖에도 이상한 말을 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파혼하지 못한다고.
물론 몽설이 맞는 말을 하기는 했다.
취화원은 아걸의 청부를 받았다. 명확히는 아삼의 청부를 받은 것이지만, 성검문이나 활검문은 이런저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아걸이 청부한 것으로 치부할 것이다.
성검문, 활검문, 아니, 전 무림은 아걸을 쫓듯이 취화원을 쫓는다.
벌써 싸움은 시작되었다.
해체해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살수들이 영문도 모른 채 살해당할 때부터 ‘취화원 살수 몰살 작전’은 시작된 것이다.
이대로 쫓기다 죽느니 아걸 곁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아걸 자신조차도 안전을 도모하지 못할 상황인데, 누굴 보호하겠나.
산 넘어 산이다.
간신히 늑대를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맹수들에게 포위당한 상태다.
“하아!”
한숨이 토해진다. 그리고 그 한숨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 * *
“훗!”
취화원주는 피식 웃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키워서인지, 지금도 마냥 철없는 어린애로만 생각했다.
몽설, 다 컸다. 이제 어른이 됐다.
몽설은 그 짧은 순간에 취화원 전 식솔의 생사가 걸린 일을 단호하게 결론지었다.
물론, 몽설이 내린 결론은 자신 개인에게만 해당한다. 그래서 한 줌 거리낌 없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자신의 이야기가 취화원 식솔 모두에게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말했을 것이다.
현재, 취화원이 갈 길은 몽설이 말한 길 이외에는 없다.
아걸과 떨어져서 삶을 모색할 것이냐, 아니면 같이 죽음의 길로 걸어갈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위험하기는 해도 아걸과 함께 가는 것은 안 된다는 쪽으로 결정할 것이다. 죽음이 워낙 빤히 보이기 때문에.
몽설처럼 아걸과 함께 가겠다고 결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런 결론을 내리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그렇다. 성검문과 적이 된다는 생각만 떠올려도 당장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난다.
아걸이 워낙 강하니까 그와 함께하면 요행히 목숨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철없는 소리!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부 허도기’ 이름이 거론된 이상, 살기는 틀렸다.
취화원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두 가지이지만, 두 가지 모두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니 두렵지 않은 결정, 아걸과 헤어지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몽설이 한 말은 옆에서 듣는 사람에게 가벼운 한 마디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정작 결정하는 사람은 살 떨리는 두려움을 꾹꾹 짓눌러야만 했다.
괜히 철없는 여자가 정혼자와 헤어지기 싫어서 함께 하겠다고 말한 게 아니다.
취화원주는 이런 점을 읽었기 때문에 ‘다 컸다’라고 생각한 거다.
취화원주는 문득 자신이 할 일을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언니 딸…… 다 컸어. 이만하면 잘 키운 것 같은데. 만족할지 모르겠네?’
몽설의 모습에서 당차고 야무졌던 남소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남소에게 한 약속은 지켰다는 자부심이 치밀었다.
몽설은 현명하다.
남소에게서는 비상한 머리, 일홀문주에게서는 뛰어난 무인의 피를 물려받았다.
머리가 너무 일찍 깨면 위험한 행동을 할 것 같아서 일부러 눈을 막고 귀를 가렸다. 병서(兵書)는 손도 못 대게 했고, 기보(棋譜)나 주역(周易) 같은 책도 보는 족족 치워버렸다.
머리를 깨우는 책, 사고(思考)를 깊게 하는 책은 모두 멀리했다.
그런데도 몽설의 머리는 점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가르친 것이 없는데도 취화원 살수 중 늘 돋보였다. 상황판단이 매우 빨랐고, 특히 위험을 느끼는 감각이 남달랐다.
몽설은 강조 살행에 나서기 전까지 육살(六殺) 경험이 있다.
살행에 여섯 번 나섰고, 깨끗하게 성공했다. 모두 암살(暗殺)이다. 무공으로 절명시킨 것이 아니다.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빈틈을 만들어냈고, 틈이 생기면 즉각 기습했다.
치밀한 안배, 망설임 없는 결단이 만들어 낸 살행이다.
위험할 때는 혈검도 사용했지만, 육살 중 혈검을 쓴 적은 한 번밖에 없다.
몽설이 머리를 쥐어 짜내서 상대방을 죽였다는 사실은 원주와 몇몇 장로밖에 모른다. 다른 살수들은 그저 살행에 성공했구나 하는 정도만 안다.
몽설은 무공도 놀랍게 발전하고 있다.
일홀문주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암영검을 깊이 있게 가르친 적이 없는데, 아주 능숙하게 다룬다.
혈검은 본인 스스로 깨우쳤다.
취화원 살수 중에는 혈검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사부도 있을 수가 없다. 수련하려면 오직 혼자서 비급에 의존해 갈고 닦아야 한다. 잘잘못을 스스로 판단하면서.
그 결과는 조금 전에 사내와 싸우면서 여실히 보여주었다.
몽설의 현재 무공은 취화원주를 능가한다.
혼자 깨우친 무공으로 평생을 무림에서 보낸 초특급 살수검을 이겨낸 것이다.
몽설은 다듬지 않은 원석(原石)이다.
몽설은 아걸에게 파혼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정혼녀의 위치를 지킬 생각인 것 같다. 아걸과 같이 행동하면서.
끄덕! 끄덕!
취화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혼자만 의미를 알 수 있는 끄덕임이다.
장로들이 그녀 곁에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원주가 왜 고개를 끄덕이는지 알 수 없었다.
* * *
원주와 장로 네 명, 화녀(花女) 열세 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백여 명에 육박하던 취화원 가족이 열여덟 명밖에 남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수, 해산 명령을 내린 결과다.
차라리 해산하지 않고 취화원을 지키고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지 않았을까?
“취화원 해산 명령을 내렸는데…… 호호! 우리는 해산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구나.”
모두 원주만 쳐다봤다.
“몽설, 네가 취화원을 맡아라.”
“네?”
몽설이 깜짝 놀라서 원주를 쳐다봤다.
“임시로 맡으라는 것이니 너무 놀랄 것 없다.”
“아뇨. 임시라고 해도 제가 맡기에는…… 저는 경륜도 짧고, 무림도 잘 모르고…….”
“그만! 결정됐다.”
원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암영검의 최상수(最上手)는 사생락이다. 저자와 싸울 때 펼쳐 보였으니 봤을 테지만, 지금 너희가 펼치는 암영검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아! 그 무공이 암영검이었구나!
죽음처럼 고요하고 얼음처럼 차디찼던 무공!
‘사생락…….’
암영검의 최상수가 사생락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암영검을 수련하고 수련하면 저승사자처럼 검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암영검은 단순한 살수검이 아니다. 수련하기에 따라서는 절대 무공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원주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죽을힘을 다해서 무공을 수련할 이유가 없었지. 내 무공 정도면 쓸 만했고. 내 위치에서 문파를 이끌어가는 것은 무공이 아니라 정치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만한 이유가 생겼으니…… 사생락을 십 성 깨우쳐야겠다.”
원주가 하는 말에는 약자의 고뇌가 담겨 있다.
살수문파는 너무 강하면 안 된다. 강하려면 그 누구도 함부로 찝쩍거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해야 한다. 그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면 적당한 선에서 강해지는 것을 멈춰야 한다.
살수문파 존립은 정치에 달려있다.
무림 최고수가 한쪽 눈을 감고 봐줄 때, 존립할 수 있다. 점점 강해져서 위험하다 싶으면 즉각 제재가 들어온다. 경고로 문파를 절반쯤 망가트리거나, 문주를 죽이기도 한다.
무림에서 정도를 걷지 않는 한, 언제든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
원주는 사생락을 십 성 연마하지 않았다. 일부러 중도에서 수련을 멈췄다.
성검문이 주시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피곤해진다.
사생락을 십 성 연마해서 성검문을 상대할 수 있다면 벌써 연마했을 것이다. 하지만 십 성이 아니라 십이 성 연마한다고 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공부 허도기는 무신이다.
이것이 약자의 설움이며 고뇌다.
“그럼 원주님이 오실 때까지 장로님이 우리를 이끌어주시면…….”
원주가 손을 들어서 몽설의 말을 제지했다.
“이 이야기는 끝났다. 내가 올 때까지 몽설, 네가 취화원을 이끌어. 지금부터 네 임무는 이 이상의 희생 없이 최대한 도망 다니는 것이다. 알았니?”
몽설이 원주를 쳐다봤다.
원주의 의지가 확고하다. 무슨 뜻에서 자신에게 취화원을 이끌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이미 원주의 뜻이 굳어졌다.
“희생 없이 최대한 도망 다니는 것이 네 임무라고 말했다. 대답해야지?”
“…….”
몽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원주는 임시로 취화원을 이끌라고 했다. 하지만 말이 잘못되었다. 취화원 규정에 ‘임시’라는 말은 없다. 원주가 있고, 살수가 있다. 그 외에는 없다.
지금 원주의 물음에 대답한다면 원주직을 승계하겠다는 의사표시가 된다.
몽설이 말했다.
“지금 저희에게 닥친 위험을 보면 제 대답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제게 왜 이러세요?”
취화원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역시 몽설은 다 컸다. 철부지 같으면 대뜸 대답했을 텐데, 물음 속에 숨겨진 암수를 찾아냈다.
이 자리에는 장로도 네 명이 있다. 그들처럼 취화원 규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다. 잠자면서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단단히 각인해 놨다.
하지만 장로들은 ‘임시’라는 말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였다.
임시로 원주직을 넘겨준다고 해도 딴죽을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은가.
현재 상황이 너무 나쁘다. 원주는 사생락을 십 성 연마하겠단다. 그러니 임시로 취화원을 이끌라는 말이 정당하게 들린다. 그 대상이 몽설이라는 점도 이해한다. 몽설의 무공이 갑자기 일취월장해서 문주와 비등하지 않은가.
오직 몽설만 ‘임시 원주’가 지닌 뜻을 알고 있다.
취화원주는 활짝 웃었다.
“호호! 네가 이래서 네게 맡기는 거야. 이제는 대답할 수 있겠지?”
“확신하세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그래. 잘할 거야.”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더는 죽는 사람이 없도록 잘 도망 다닐게요.”
“호호! 그래, 그래야지.”
원주는 밝게 웃으며 품에서 작은 소도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 끝부분을 살짝 잘라냈다.
“받아.”
원주가 자른 머리카락을 몽설에게 주었다.
몽설이 원주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 모아서 공손히 머리카락을 받았다.
“엇!”
“아!”
사 장로와 십이살수가 옅은 경악성을 토해냈다.
원주가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서 후인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임시로 원주직을 이양한 것이 아니다. 정식으로 원주직을 넘겨준 것이다.
장로들이 황급히 일어나서 옷매무시를 공손히 여몄다. 그리고 몽설을 향해서 대례를 취했다.
“취화원 십이대 원주님을 뵈옵니다.”
장로 네 명…… 몽설에게 살수비기를 가르쳐주고, 기본공부를 전수해 주었던 무공 교두들이 머리를 숙였다.
“취화원 십이대 원주님을 뵈옵니다.”
취화원 살수들도 일제히 일어나서 몽설에게 예를 취했다.
몽설, 취화원 원주가 되었다. 다 무너져서 와해 직전, 또 거대한 격랑 속에 휘말려서 생존 여부조차 불분명하게 되어버린 문파를 이끌게 되었다.
“제 최대 임무가 도망 다니는 것이니 잘 도망 다닐 거예요. 모두 잘 따라와 줘요.”
몽설은 장로와 사저들의 대례를 차분하게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