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第十二章 도치(刀齒) (2)
삐걱!
산신각 문이 열리며 이장로가 나왔다.
산신각은 두 사람이 앉으면 조금 넓고, 세 사람이 앉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좁았다.
그곳에 다섯 사람이 들어가서 앉았다.
취화원주와 장로 네 명이 산신각에 앉아서 운공조식을 취했다. 장로 네 명이 운공을 취하면 원주가 명문혈을 짚어서 경맥 흐름을 살폈다.
사생락을 본격적으로 전수해 주는 것이다.
원래 사생락은 원주만 수련할 수 있는 취화원 비전비기다. 원주에서 원주에게로 이어진다. 원주 즉위식을 마친 날, 마지막 의식으로 사생락을 전수한다.
그런데 두 가지 변수가 생겼다.
첫째는 십이대 취화원주인 몽설이 암영검을 전문적으로 수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생락은 암영검을 절정으로 수련한 후, 마지막 한고비를 넘어서는 단계다. 암영검을 절정까지 수련해내지 않으면 사생락을 맛볼 수 없다.
사생락을 전수하지 못하게 되었다.
둘째, 몽설은 혈검경을 수련했다. 굳이 사생락을 수련할 이유가 전혀 없다.
여기서 취화원주는 큰 결단을 내렸다.
사생락을 남은 문도 모두에게 전수한다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결단을 내렸다.
장로들은 암영검을 거의 절정 수준으로 수련했다. 그래서 장로에게 먼저 전수한다.
십이살수는 아직 암영검 절정을 모른다. 그러니 후일 장로들이 전수하기로 한다. 일단 장로들이라도 먼저 수련해서 몽설에게 힘이 모일 수 있도록 한다.
이 결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공 전수는 빨리 진행되었다.
장로들은 사생락을 습자지에 먹물 스며들 듯 빠르게 흡수했다.
먼저 운공을 배우고, 검결을 외우고, 검초를 전개한다. 검초 수련은 하루 이틀에 끝날 문제가 아니지만 운공과 검결을 외우는 데는 하루면 족하다.
“끝나셨어요?”
몽설이 산신각 문을 밀치고 나오는 이장로에게 물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이장로가 짐짓 정색하며 말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예전처럼 지내요. 사고(師姑)님께서 이러시니 제가 어색해요.”
“안 됩니다. 취화원 사람 중 원주님 곁에 앉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원주님 휘하. 말씀을 낮추세요.”
“알았어요.”
“또!”
“……알았어.”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다 끝났어?”
몽설이 이장로 말을 쫓아서 하대했다.
말을 하는 게 무척 껄끄럽다. 사백에게 하대하자니 모래를 씹은 듯 씁쓸하다.
“끝났습니다. 곧 모두 나올 겁니다.”
“원주님은?”
“전임 원주님이라고 하셔야지요.”
“전임 원주님은 왜 안 나오시고……?”
“가셨습니다.”
“가시다니?”
“서로 얼굴 마주쳐봐야 말만 길어진다고…… 벽이 갈라진 틈으로 빠져나가셨어요.”
“아!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데…….”
몽설은 사뭇 섭섭했다. 원주가 떠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인사도 없이 갈 줄은 몰랐다.
그녀는 원주가 걸어갔을 길을 멍하니 쳐다봤다.
* * *
아걸은 취화원 살수들과 떨어져서 혼자 지냈다.
멀리 떨어지지는 않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만 벌려 놨다. 아무래도 여인들과 섞여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안전하다고 생각될 때까지만.
아걸은 취화원 살수들이 자신의 싸움에 휘말리는 게 싫었다. 원치 않았다. 그래서 되도록 빨리 떨굴 생각이다. 하지만 취화원 살수들을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이미 그녀들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으니까.
몽설은 누워있는 아걸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저기, 뭐 좀 물어봐도 돼?”
“해.”
“내가 정혼녀라는 것, 언제 알았어?”
“진작.”
“그럴 줄 알았어. 야야가 취화원에 청부를 넣을 때부터 알았겠구나?”
“…….”
“날 지목한 것도 그럼 네 생각이야?”
“아니, 그건 할배 뜻. 한 번은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셔서. 혈검경도 건네줘야 하고.”
몽설은 등을 보이고 누워있는 아걸을 쳐다봤다.
아걸은 일부로인지, 천성이 그런지 무척 차갑게 대한다. 두 사람 관계에 정혼녀, 정혼자라는 사실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무심히 대한다.
사실, 그런 점은 그녀도 마찬가지다.
아걸에게 애정을 느낀다거나, 그가 한없이 좋게만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마구간에서 처음 만났다.
상처 입은 그녀를 그가 치료해줬고, 치료가 상당히 민망했지만, 지금은 모두 지난 일이다.
그것뿐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정혼자? 사실, 정혼자라는 말이 매우 신기하다. 갑자기 불쑥 정혼자라는 말을 듣게 됐는데…… 정혼자가 마침 도움을 받은 사람이니 호기심이 바짝 당긴다.
지금이 태평세월이라면, 두 사람 모두에게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다면, 정혼이라는 말이 상당히 무게감 있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정혼이라는 말을 가지고 놀기에는 사치스럽다.
“계속 누워있을 거야?”
“…….”
“내 정혼자라는 거, 인정해?”
“파혼이 안 된다며?”
“인정한다는 말이네?”
“…….”
아걸은 침묵했다.
“그럼 정혼자 책임을 다해. 명색이 정혼자인데 정혼녀가 죽는 걸 보지는 않겠지?”
“뭘 해줄까?”
“생각한 건 있는데…… 하루만 더 생각해 보고.”
몽설이 일어섰다.
아걸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멀어져 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정혼자 책임을 다해.
무심히 한 말이지만, 참으로 입 밖에 내기 힘든 말이다.
그녀는 활검문도에게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도 구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존심이 강하다.
만약 취화원 살수들이 없었다면, 그녀가 혈혈단신이었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은 말을 했을까?
그녀는 열여섯 명의 목숨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훗!”
아걸은 실소를 흘렸다.
몽설의 모습에서 사모(師母)의 모습을 봤다. 사부의 모습도 가끔 보인다.
몽설은 부모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아걸은 기억한다.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사실부터 그분들이 돌아가시는 장면까지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봤다.
몽설의 임무는 잘 도망다니는 것이라고 했나?
참 재미있는 임무다.
그에게도 임무가 세 가지 있다.
첫째는 부모님과 형제를 죽인 자,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讎)를 처단하는 일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행해야 한다.
둘째는 사부와 사모를 해친 자, 반도를 징계해야 한다.
열 번을 죽었다가 환생한다고 해도 반드시 이뤄야 하는 천명이다.
셋째가 몽설을 보호하는 일이다.
사부가 자신을 보호했듯이, 자신도 사부의 핏줄을 보호한다.
이 세 가지 중 최우선하는 것은 없다.
세 가지 모두 함께 이뤄야 한다. 다른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면 세 가지 모두를 포기한다. 결국, 세 가지 모두 포기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그러니 몽설의 말을 들어주는 것에는 거리낌도, 망설임도 없다.
‘어디로 데려갈까?’
아걸은 눈을 감은 채 한적하고 은밀한 장소를 떠올려봤다.
사형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 성검문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 단 하루라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곳,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 곳.
없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그런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로 데려가지? 할배라면 방법이 있었을까?’
아걸은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하고 연신 뒤척거렸다.
* * *
꼬끼오!
멀리서 수탉이 울어댄다.
‘날이 밝았군.’
아걸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안전한 장소를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고 한 것이 그만 밤을 꼬박 밝히고 말았다.
아걸은 일어나 앉았다.
더 누워있어 봤자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몽설도 지난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것 같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아걸은 못 본 척 살짝 눈을 돌렸다.
몽설은 사부의 혈육이고 동생 같은 여자이지만, 낯선 여자이기도 하다. 또 아걸은 여자와 지내본 경험이 없다. 그의 옆에는 늘 할배만 있었다.
여자가 지내는 것이 껄끄럽다.
사박! 사박!
그녀가 아침 이슬을 밟으며 걸어왔다.
아걸은 못 들은 척 담요를 개어서 행낭에 쑤셔 넣었다.
“사람을 죽여줘.”
그녀가 불쑥 말했다.
아걸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취화원 살수다. 아니, 취화원 원주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면 그녀가 전문이다.
몽설이 다시 말했다.
“감쪽같이. 흔적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알았어. 그러지.”
아걸이 대답했다.
“누굴 죽여 달라고 하는지 물어보지 않아?”
“누구를 죽일까?”
몽설은 지난밤에 적어뒀는지 품에서 종이를 꺼내 살짝 손에 쥐여 주었다.
“죽일 사람이 머무는 장소야. 그곳에 있는 사람을 죽여줘. 참고로, 거기까지 가기가 쉽지 않아. 무작정 치고 들어가면 가능하기는 한데, 그런 식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나 더 말할까? 우리 중에는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어. 원주님이 계신다고 해도 안 돼.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어려운 일이군.”
“어려워. 단순히 죽이는 것만 해도 어렵지만, 감쪽같이, 흔적 없이 죽인다는 게 더 어려워.”
아걸은 종이를 펼쳐서 글을 읽었다.
- 상량산(上梁山) 오곡(五谷) 섬암(蟾巖)
지명이다.
상량산 다섯 번째 계곡 두꺼비 바위.
이곳에 가면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자를 감쪽같이 죽여 달라는 주문이다.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은데.
잠깐 생각을 거듭한 아걸이 입을 열었다.
“누군지 알려줄 수는 없나?”
“말해줘도 몰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거든. 하지만 말해주는 게 좋겠지?”
몽설이 눈빛을 반짝 빛냈다.
몽설이 아걸의 손을 잡아서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손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 귀문(鬼門) 문주(門主) 마구영(馬句暎).
취화원과 더불어서 이대살맥을 형성하고 있는 귀문 문주의 이름이 쓰였다.
“이 사람을 왜?”
“죽여주기만 해. 그런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사부, 사모 얼굴 기억나?”
아걸은 몽설을 빤히 쳐다봤다.
몽설은 무심히 말하는 듯하지만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입꼬리까지 파르르 떨린다.
아걸이 말했다.
“아니. 기억 안 나. 워낙 어렸을 때 일이라서. 그래서 모른 척 지내려고 했는데, 할배가 일을 터트리는 바람에.”
“그렇구나. 그래. 죽여주기만 해. 정혼자의 책임은 거기까지 해주는 것으로 할게.”
몽설이 방긋 웃으면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