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第十二章 도치(刀齒) (3)
스으읏! 슷! 슷!
공기가 매우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땅속에서 귀신들이 불쑥불쑥 솟구쳤다.
이들은 땅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가 일어서자 갑자기 땅속에서 솟구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동하는 모습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꼭 귀신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일어서기만 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세운 후에는 장승이라도 된 듯 꼼짝하지 않고 앞만 쳐다봤다.
스읏!
뒤늦게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귀신들이 서 있는 곳까지 태연히 다가왔다. 그리고 귀신들이 쳐다보는 것을 봤다.
시신들!
“음!”
그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제일 먼저 머리가 반쯤 갈라진 시신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당할 놈이 아닌데.”
그가 중얼거리며 칼을 뽑았다. 그리고 칼을 시신의 갈라진 머리에 밀어 넣었다.
잘라진 머리를 다시 자르는 것은 아니다. 칼을 어느 깊이까지 맞았는지, 어떤 식으로 공격당했는지 알아볼 셈이다.
“이거 깊이가 이상한데?”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으켜 세워 봐.”
그가 시신의 머리에 칼을 꽂은 채 물러섰다.
그러자 주위에 늘어서 있던 귀신 중 두 명이 나와서 시신의 양쪽 겨드랑이를 잡았다.
스읏!
시신이 다시 일어섰다.
“조금 왼쪽으로.”
귀신들이 조금씩 시신을 움직였다.
“아냐. 이게 아냐. 두 발이 땅을 딛고 있었다면 칼에 맞는 순간 목뼈도 타격당해. 이건 약간 짓눌린 건데…… 허공이군. 허공에서 맞았어. 위로 띄워봐. 이놈이 잘 쓰던 칼은 비첨도(飛尖刀)니까…… 두 발을 오므리고, 팔은 위로 쳐들어.”
귀신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시신을 조정했다.
시신을 허공에 번쩍 쳐들었다. 한 손으로는 한쪽 발을 꺾고, 다른 손으로는 팔을 들어 올렸다.
양쪽에서 발을 잡고 시신을 띄웠는데, 시신이 전혀 흔들림 없다.
귀신들의 내력이 심상치 않다.
“……맞아. 이거야.”
그는 시신의 머리에 꽂힌 자신의 칼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낙, 낙화도(洛花刀)!”
낙화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칼이다. 벼락처럼 떨어지는 칼이 아니라 꽃잎 떨어지듯 하늘거리면서 떨어진다. 물론 공격당하는 자는 어떠한 기미도 알지 못한다.
문득, 머리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불이 확 일어나면 이미 낙화도가 끝난 것이다.
낙화도는 이십일대 일홀문주의 무공이다.
“나, 낙화도가 어떻게!”
그는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허공에 쳐들린 시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시신에게 달려갔다.
쉬잇!
그는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신법을 사용했다. 한달음에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마음이 급했다.
그가 달려간 곳에는 시신 두 구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한 명은 배에 일격을 당했고, 다른 한 명은 가슴에 치명타를 맞았다. 배를 그은 일격은 오장육부를 갈라버렸다. 가슴이 베인 자는 심장이 깨끗하게 절단되었다.
두 명 다 즉사다.
“발자국을 찾아!”
그가 시신을 보면서 말했다.
귀신들이 즉시 움직였다. 시신들이 쓰러지기 전에 어디에 서 있었는지 찾아내려는 것이다.
스읏! 스읏!
귀신들이 각기 위치를 잡고 섰다.
귀신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몸짓으로, 행동으로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한다.
“음! 합공을 생각했단 말이지. 절망과 공포에 찌든 채. 그럼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들어야지. 너! 칼을 가슴에. 네가 공격을 막아줘야 해. 넌 즉시 반격. 치올리는 칼. 하단세(下段勢)!”
귀신들이 그가 말하는 대로 칼을 잡았다.
한 명은 칼을 가슴에 모아 단단히 방어태세를 취했다. 다른 한 명은 즉시 칼을 쳐올릴 준비를 마쳤다.
“이걸 벤다 이거지. 저놈은 배를 갈랐고, 이어서 저놈 가슴을…… 이게 되나?”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를 빠져나온 칼이 가슴을 치려면 위로 쳐들려야 한다. 그런데 가슴을 베인 자는 쳐들리는 칼에 당한 게 아니다. 내리긋는 칼에 당했다.
배를 가르고 이어서 가슴을 벤 것이 아니다.
가슴을 베고 배를 가르는 쪽으로도 생각해 봤는데, 이 역시 칼이 들어가는 각도가 맞지 않는다.
“이놈들 거리로 보면 일수에 두 놈을 베야 해. 숨 돌릴 시간이 없어. 그럼…… 파라라라락?”
그는 손가락을 바람개비처럼 휘돌렸다.
칼이 바람개비처럼 휘돈다. 안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사부의 사부, 사조(師祖)의 무공이 회륜도다. 그 윗대는 너무 까마득해서 모르지만 삼십오대 일홀문주의 무공이 무엇인지는 안다.
“회륜도를!”
회륜도를 써서 배를 가른다. 칼이 빠져나온다. 회륜도는 허공에 떠 있는 칼이다. 굳이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아도 칼이 스스로 배를 가른다.
손은 이미 칼이 빠져나올 자리에 가 있다. 그리고 빠져나온 칼을 잡는다. 잡고, 꺾고, 벤다. 칼을 잡고, 손목을 꺾어 올리고, 가슴을 일격에 갈라낸다.
손목의 움직임을 극대화시켜서 온갖 변화를 일으키는 칼, 만완도(萬腕刀)!
십오대 일홀문주의 칼이다.
“이놈 봐라?”
서리형개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만 놈은 일홀문주 세 명의 무공을 펼쳐냈다.
세 명의 무공을 펼칠 수 있다면 서른여섯 명 모두의 무공을 펼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또 한 명 확인할 시신이 있다. 죽은 자는 네 명이고, 그중 세 명의 사인을 찾아냈다. 하지만 서리형개는 또 한 명의 시신을 살펴보지 않았다.
“찾아!”
서리형개가 귀신들에게 명령했다.
* * *
귀신들은 산신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뭐야?”
귀신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방향을 가리켰다.
취화원 살수들이 우르르 몰려있는데, 그중 한 명이 다른 길로 빠져나갔다.
“아걸이냐?”
귀신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흔적은 찾을 수 있지만, 무공 고하까지 찾아내는 것은 무리다. 도주하는 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는 것도 무리다. 산속 추격은 찾아낼 수 있는 단서가 많지 않다.
“음!”
서리형개는 고민했다.
다른 쪽으로는 많은 자가 이동하고 있다. 오직 한 명만 다른 길로 가는 중이다.
“너희는 계속 추격해. 너와 난 이쪽으로 간다.”
서리형개는 귀적칠흔(鬼籍七痕), 귀신 족보를 가진 일곱 명의 사내를 보며 명령했다.
여섯 명은 계속 흔적을 찾아서 쫓아간다. 한 명은 그와 함께 혼자서 빠져나간 자를 찾는다.
서리형개는 혼자 빠져나간 자가 아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 *
턱!
취화원주는 바위에 등을 기댔다.
주위에 맹수가 있다. 잔뜩 굶주린 맹수가 공격 기회를 엿보면서 주위를 배회한다.
취화원주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취화원을 공격한 자는 일홀문을 배신하고 사부를 시해한 반도의 수하다.
반도가 직접 온 것도 아니고 그 밑에 있는 수하가 달려들었는데도 꼼짝하지 못했다. 때맞춰서 아걸이 와주지 않았다면 모두 몰살당할 뻔했다.
그런 자들이 또 왔다면…… 가망 없다.
‘운이 나쁜 건가? 사생락을 십 성 연마하려고 했는데, 기회를 안 주시나?’
취화원주는 암울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누가 쫓아온다는 기미는 없다. 무엇을 본 것도 아니고 어떤 기척이 들린 것도 아니다. 단지, 막연하게 맹수가 쫓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귀를 기울여 뒤를 살펴봤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끔 바람이 지나가면서 성질을 부렸지만, 사람이 일으키는 소리는 없었다.
‘괜히 신경이 예민해졌나?’
취화원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취화원이 멸절 직전까지 치몰린 상태라서 신경이 예민해졌을 수도 있다. 자신이 잘못해서 원도들을 생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같아서 자책감도 심했다.
원주는 고개를 흔들면서 몸을 추슬렀다. 그때,
스읏!
무엇인가가 눈앞에서 번뜩였다.
취화원주는 검을 꽉 움켜잡고 앞을 노려봤다.
역시 사람!
안색이 매우 창백한 자다. 핏기가 전혀 없어서 얼굴에 분칠한 것 같다. 거기에 무표정하기까지 하다. 감정을 일절 드러내지 않아서 시신처럼 여겨진다.
“뭐야?”
그는 취화원주의 일갈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싸울 뜻은 없어 보였다. 병기는 휴대하고 있지만 뽑을 생각이 없다. 아예 싸우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뒤로 스르륵 물러서기까지 했다.
‘뭐지?’
상대가 누군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척 기분 나쁘다.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이다.
스읏!
취화원주는 사내를 노려보면서 옆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사내는 그가 움직여도 따라붙지 않았다. 그저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사기(死氣)!’
취화원주는 사내가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알아냈다.
사내는 육신이 죽은 상태다.
진기를 운용해서 일부러 육신의 기능을 상당히 낮은 수준까지 떨어트렸다.
왜 그랬을까? 다른 기능을 높이기 위해서다.
시신처럼 창백한 모습…… 핏기가 없어서 그렇다. 피의 순환을 최대한 억눌렀기 때문에 이런 상태가 일어난 것이다. 혈류를 억제한 대신에 기감을 최대한 높였다.
움직임을 잃는 대신에 감각을 최고로 끌어올린 것이다.
살계(殺界)에서는 이런 기공을 ‘사기침류공(死氣沈流功)’이라고 부른다. 짧게 말하면 사기를 수련했다고도 한다.
사기를 수련하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부작용으로 언어를 잃게 된다.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다음으로는 욕정을 잃는다. 사내 구실, 여인 구실을 못하게 된다. 목석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은 최악인데, 단명한다.
사기를 수련하면 마흔을 넘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우!”
취화원주는 긴 숨을 몰아쉬었다.
사기침류공을 수련한 자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 누군가의 길잡이에 불과하니까.
맹수가 쫓아온다는 직감은 옳았다.
“누구냐?”
취화원주는 사내를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후!”
왼쪽 숲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키가 크고 늘씬한 자가 걸어 나왔다.
원주는 눈살을 좁히면서 상대를 쏘아봤다.
처음 보는 자다. 무림에 이런 자가 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사내는…… 그냥 칼이다. 도기 어쩌고 어쩌고 말할 필요가 없다. 육신 전체가 칼이다.
이런 사내도 존재했구나!
원주는 문득 아걸을 떠올렸다. 아걸이 사형 동박을 죽였다는 말도 기억해냈다.
“일홀문도군.”
“후후후!”
사내는 부인하지 않았다.
“서리가헌인가, 서리형개인가?”
“우리 이름까지 알고. 아걸 그놈 입이 싸군. 칼만 어설픈 줄 알았더니 더 배울 게 많은 놈이야.”
스릉!
사내가 칼을 뽑았다.
취화원주는 마지막을 생각했다. 이자를 이길 방법은 없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 승부는 일 초에 끝날 터이니, 진기도 아끼지 않는다. 목숨도 연연하지 않는다. 그래,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펼치는 게 좋겠다. 같이 죽자.
스읏!
검을 들고 진기를 끌어올렸다.
사생락이 펼쳐진다. 원주의 모습이 귀신처럼 흐릿해진다.
순간, 사내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하지만 점점 빠르게…… 아! 너무 빨라서 형체를 잡지 못하겠다. 무슨 신법이 이렇게 빠르…… 퍽!
취화원주는 전력으로 사생락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미 사내의 칼이 육신을 훑고 지나간 후였다.
“큭! 너무…… 빨라!”
“후후! 삼도일살이라는 거다. 딱 한 번 패했지. 사부에게.”
사내가 옷을 헤집어 배를 보여주었다.
그의 배에 칼자국이 길게 새겨져 있다. 누군가가 그의 배를 길게 갈랐다.
“단 한 번의 패배가 만든 상처다. 그 후로 나는 배만 갈라.”
“큭!”
취화원주는 또 한 번 신음을 흘리며 무너졌다.
칼은 한 번밖에 맞지 않았는데, 고통은 연속해서 다가왔다. 칼을 몇 번이나 맞은 것처럼.
“아걸, 복도 많군. 헛걸음한 덕분에 저승 갈 시간이 하루 길어졌어. 가자.”
서리형개는 배가 갈린 채 절명한 취화원주를 힐끔 쳐다본 후, 신형을 쏘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