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第十三章 진참패(眞慘敗) (3)
푹!
아걸은 반철도를 땅에 꽂았다.
반철도를 들고 있을 힘도 없다. 과다출혈은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게 힘을 소진시킨다. 까마득하게 멀어져가는 의식을 의지로 붙잡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다.
내력에서 워낙 차이가 난다.
천지양단을 일으키는 강한 힘은 가벼운 손짓에 막혀 버렸다. 몸을 철옹성처럼 보호해주는 수신도 역시 무참하게 깨졌다. 수신도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격을 당했다.
너무 빠르다.
서리형개는 그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고, 현란하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걸은 이번 싸움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다.
몰안 역시 무너졌다. 고도의 정신 집중이 깨졌다.
지금까지 몰안으로 본 곳을 놓친 적이 없다. 몰안이 점찍은 곳은 반드시 칼날이 닿았다.
오직 서리형개만 베지 못했다.
몰안으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는데…… 빠름에서 뒤지니 결국 베지 못했다.
어린애와 어른의 싸움이 아니다. 어린애와 무공을 수련한 무인의 싸움이다.
이런 싸움에서는 일말의 요행도 기대하지 못한다. 애초에 요행을 바랐던 것은 아니다. 서리형개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무너질 줄 알았다.
“후욱!”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모든 것이 무너졌으니 남은 것은 딱 하나!
칼을 땅에 꽂았다는 것은 잉어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듯이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승천도(昇天刀)를 펼치겠다는 뜻이다.
죽음은 생각하고 있다. 피하지 않는다.
오직 한 칼…… 기회를 정확하게 잡아서 딱 한 번만 치고자 한다.
승천도가 성공한 적은 없다. 승천도를 펼친다는 것은 전신 기력이 모두 빠져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을 들고 있을 힘도 없어서 땅에 놓고 있다.
슷!
서리형개가 칼을 쳐들었다. 그리고 아걸이 들고 있는 반철도를 향해 툭 내리쳤다.
깡!
반철도가 힘없이 퉁겨나갔다.
아걸은 반철도마저 놓쳤다. 육신을 반철도에 의지하고 있었던 상태라서 쓰러질 듯 비칠거리기까지 했다.
다 잡은 물고기!
“한마디 안 할래?”
아걸이 초점 잃은 눈으로 서리형개를 쳐다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주변에 너란 놈은 없었거든. 우리가 사형제라면 네놈 나이 예닐곱 살 때 칼을 잡았어야 하는데, 그런 똘마니는 없었어. 뭐냐? 일홀도는 어떻게 접한 거야?”
툭!
아걸이 무너졌다.
그는 서 있을 힘이 없어서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직도 서리형개를 노려보고 있지만, 저항할 기운은 사라진 지 오래다. 사실, 첫 번째 칼부터가 치명적이었다.
아걸이 침묵하자, 서리형개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졌다.
살기!
아걸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그때, 갑자기 서리형개가 아주 크게 웃었다. 천지가 떠나가라 배를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서리형개의 웃음소리가 산을 울리고 되돌아왔다.
“너…… 우리 문도 맞구나. 일홀문도가 맞아. 사부가 언제 네놈을 들였는지 모르겠다만, 우리 셋 이외에 또 한 놈이 있었어. 정말 귀신 곡할 노릇 아닌가.”
서리형개의 웃음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말.
아걸의 얼굴에 진한 어둠이 드리워졌다.
모든 것이 막혔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승천도가 아니다. 승천도를 펼치려던 모습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칼을 들 힘도 없는데 무슨 수로 순간적인 기회를 포착할 것이며, 빠름을 따라잡을 것인가.
일홀문 무공 중에는 구명절초(求命絶招)가 없다.
일홀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 외에 다른 공부는 일절 없다. 칼로 싸우고, 싸우다가 힘에 부치거나 무공이 부족하면 죽는 길을 택한다. 구차하게 살아남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사부와 마지막 만남에서, 사부께서는 두참멸공(頭斬滅功)이라는 공부를 가르쳐 주셨다.
구결을 말씀해 주실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난 절공이겠거니 하고 열심히 들었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구명지공(救命之功)이다.
두참멸공을 풀이하면 ‘머리가 베어져서 죽는 무공’이 된다.
기력이 소진되어서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정말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목숨을 귀신에게 맡기고 요행을 바라보자는 공부다.
일단 말 그대로 머리가 베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상대가 다른 곳을 베면 안 된다. 반드시 머리를 베게끔 만들어야 한다.
아걸이 털썩 무릎을 꿇고 무너진 것도 이유가 있다. 서리형개 앞에 머리를 내밀었다. 다른 곳을 칠 수도 있지만 제일 먼저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서리형개는 머리를 벤다.
그 순간, 칼이 내리쳐지는 속도에 맞춰서 머리를 밑으로 떨군다.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뒤통수를 땅으로 향한 채…… 내리쳐지는 칼을 빤히 보면서 고개를 떨군다.
칼이 앞머리를 가격한다.
머리가 베어지고 피가 튄다. 머리뼈가 베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어쩌면 뇌를 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뇌손상은 최소화된다. 진기가 이미 뇌를 보호하고 있다.
머리에 칼을 맞으면 즉사하게 된다.
서리형개는 떠날 것이다. 이미 죽은 자에게 확인한답시고 또 칼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뇌를 보호한 진기는 이틀 후에 풀린다. 그리고 그때까지 요행히 목숨이 붙어 있다면 숨이 돌아온다. 그동안 품에 풀어놓은 녹선마황이 뇌로 기어가야 하고, 베어진 머리에 달라붙어서 출혈을 막아주어야 한다.
칼을 맞을 때 시차를 조금이라도 잘못 계산하면 즉사한다.
서리형개가 죽음을 확인한다고 칼을 또 쓰면 즉사한다.
힘이 너무 많이 소진되어서 진기가 뇌를 이틀 동안 잡아두지 않으면 즉사한다.
녹선마황이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뇌로 가기는 했지만, 상처가 너무 커서 출혈을 막지 못해도 죽는다. 출혈까지는 막았지만 녹선마황이 뼈에 찰싹 달라붙어서 두피 역할을 해주지 않으면 병균이 침입하여 죽는다.
두참멸공은 더는 살아날 가망이 없을 때 펼치는 최후 절초다.
사부는 두참멸공의 성공 가능성을 일 푼으로 봤다. 백 번 시행하면 한 번 성공한다.
한데 아걸은 이 일 푼에 목숨을 걸었다. 일 푼을 믿고 몽설 대신 서리형개를 막아섰다.
꼭 몽설을 보호하기 위해서 뒤를 막아준 것은 아니다. 몽설이 낯선 자들에게 기습당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풍도곡으로 찾아가서 이들과 싸웠을 것이다.
어차피 싸울 상대였기 때문에 나섰다.
물론 자신이 풍도곡으로 찾아갔다면 동박에게 그랬듯이 많은 준비를 했을 것이다. 필승의 요처를 찾았을 것이고, 이기기 위해서 많은 것을 준비했을 거다.
지금은 급하게 싸우지만, 최후의 순간에는 두참멸공을 시전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서리형개가 두참멸공을 알아본다.
그의 앞에 머리를 내밀자 당장 일홀문도가 맞다는 말로 반응을 나타냈다.
두참멸공도 어긋났다.
‘정말 운이 다했군.’
아걸은 입술을 비틀며 쓴웃음을 흘렸다.
서리형개가 두참멸공을 어떻게 알까? 사부가 전수했을 리는 절대 없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부는 이런 공부를 전수하지 않는다. 칼을 배우기 위해서 십팔반 병기를 사용하게 하지만, 검법이나 창법을 전하지는 않는다. 단지 병기 사용법만 알게 해준다.
두참멸공이라는 공부는 일홀문 무공이 아니라 타문파의 무공인 것으로 추측된다.
“궁금한 게 많지만…… 됐다. 죽으면 그만.”
서리형개가 칼을 들어 올렸다.
그때다. 칼 맞아 죽을 운명은 아닌지 때맞춰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는 키가 작다. 보통 여자보다도 작은 것 같다. 등은 살짝 굽었다. 그래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서리형개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뭐냐?”
서리형개의 음성에서 찬바람이 휙 돌았다.
“그놈, 넘겨줘야겠어.”
숲에서 나타난 키 작은 사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눈동자가 기형적으로 번들거린다. 마치 눈에 기름칠을 해놓은 것 같다.
“조추한이 왔었다. 활검문도 시신을 가지고 본문 사람은 본문이 정리하라면서. 그래서 정리하는 중이다. 왜 넘겨줘야 하는지 말해 봐라. 허튼소리를 하면 너도 죽는다고 생각하고.”
“큭! 누가 감히 화염도에게 흰소리를 할 수 있을까. 그놈, 팔제 조추한을 죽였어.”
“뭣……!”
“공부께서 얼마나 화나셨을지 짐작되지?”
서리형개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운이 좋은 놈이군. 내 칼에서 벗어난 유일한 놈이 되었어. 너무 자만하지 마라. 공부에게 죽을 테니까. 만약 무사히 나온다면 다시 한번 붙어보고.”
아걸은 서리형개를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힘이 풀려 있었다. 출혈이 너무 심해서 안색이 백지장보다도 하얬다.
“좋……지. 다음에는…….”
아걸은 하고 싶은 말도 끝맺지 못했다.
쿵!
아걸은 땅에 얼굴을 부딪치며 쓰러졌다.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팽팽하게 곤두서있던 긴장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서리형개가 칼을 들어 키 작은 사내, 산묘 신도파를 겨눴다.
스읏!
칼이 미끄러져 나갔다. 신도파의 얼굴을 곧장 찔러갔다. 빠르게 찌른 것은 아니다. 천천히…… 피하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속도로 찔러갔다.
신도파는 피하지 않았다.
스읏!
칼이 귀밑에 닿았다.
“너희 소축십검…… 이제 성장을 멈춘 거냐? 열 놈 중 한 놈 정도는 일홀도를 보자고 할 줄 알았는데, 한 놈도 안 와. 어디 가서 무인이라고 하지 마라.”
톡! 톡!
서리형개는 귀밑에 대고 있던 칼로 신도파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신도파는 모욕을 당하는 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 여전히 웃었다.
“우리가 무인이라고 한 적은 없지. 검을 들고 싸웠을 뿐이야. 그러는 일홀문은 계속 성장 중인가? 세 명 중 한 명은 공부께 도전할 줄 알았는데, 한 명도 안 와. 그래서 우린 야성을 잃고 가축이 된 줄 알았지. 아! 한 명은 저승으로 갔지? 쯧!”
“후후! 죽고 싶어서 안달이군.”
스읏!
신도파가 손을 들어서 볼에 닿아 있는 칼을 치웠다.
“난 이만. 공부께서 기다리고 계셔서.”
그가 태연히 몸을 돌려 아걸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걸을 잡아서 옆구리에 끼었다.
쉬잇!
신도파가 신법을 펼쳐서 멀어져 갔다.
서리형개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멀어져가는 신도파를 쳐다보기만 했다.
“공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리형개는 허도기의 공칭(公稱)을 중얼거렸다.
* * *
그는 신도파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외눈에 안색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사람, 독안혈검 전가성이다.
꾸욱!
전가성은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신도파는 공부의 명령을 이틀이나 늦게 전달했다.
외장은 중원에 많은 눈과 귀를 가지고 있다. 성검문이 운영하는 정보망도 있지만, 각 지역마다 성검문과 연관된 문파가 있어서 살아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데 이런 문파들은 외장에서 담당한다.
성검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외장 담당이기 때문에, 문파 관리도 외장에서 한다.
중원에 나오면 외장 무인은 내장 무인보다 눈이 열 배는 밝아진다. 외장 무인에게는 온갖 정보를 스스럼없이 주는데, 내장 무인에게는 외장 무인 눈치를 보면서 준다.
신도파는 이곳까지 매우 수월하게 왔다. 거의 추격다운 추격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틀이나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경쟁에서 일단 불리해졌다. 또 모든 정보를 차단당하는 불이익도 맛봤다. 중원 문파들이 모두 정보를 함구했다.
그는 본인 스스로 흔적을 찾아서 쫓아왔다.
아걸은 당연히 신도파 몫이다. 그렇게까지 치사하게 수를 써놓고도 아걸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병신이다. 그리고 신도파는 전가성도 방심하지 못하는 여우다.
‘잘 데려가라. 성검문까지는 먼 길이니까. 끝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전가성은 딱딱한 얼굴을 살며시 일그러트렸다.
“그러나저러나 삼도일살…… 더 강해졌어. 형개 저놈 전력을 다한 것 같지도 않고. 일홀문. 반드시 없애야 하는 놈들이야. 살려두면 언젠가는 말썽을 일으킬 놈들이야. 공부께서는 저런 놈들을 왜 살려두고 계시는 건지.”
전가성은 멀어져 가는 서리형개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