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69화 (69/600)

#69화. 第十四章 탈태(奪胎) (4)

관도는 수구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루터로 가기는 하는데, 고수진과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곳이다. 그곳으로 가려면 반나절은 더 걸어야 한다.

몽설은 관도에서 벗어나 고수로 걸었다.

비록 거친 자갈밭 길이지만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넓다.

“물 냄새가 나.”

“곧 강이야.”

“여가 와 봤어?”

“한 번. 할배와 함께 안 가본 곳이 없거든. 여기서도 하룻밤 묶었던 기억이 나.”

‘하루?’

몽설은 ‘하루 머물렀는데 그게 기억나냐?’라는 말을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걸과 할배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추측할 수 없다. 아걸을 약간 아는 사람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지독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밖에 없다.

아걸이 수구진을 기억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구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기는 왜 들렸지? 유람 삼아서 들른 곳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니, 분명히 무슨 일인가 있었을 텐데.

관도에서 벗어나 자갈길을 대략 반 시진 정도 걸었을 때, 진한 녹색빛을 띤 강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

몽설은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아걸 말대로 고수는 꽤 큰 강이다.

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산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강물이 더 깊어 보인다.

강에 산 그림자가 비쳐 있다.

“길이 끊겼어. 배가 있어야겠는데…….”

“조금 밑으로 내려가 봐.”

“밑으로? 여기로?”

몽설은 길 아닌 곳을 눈짓으로 물었다.

“조금만 내려가면 돼.”

몽설은 아걸 말을 듣고도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걸이 말한 곳은 강물 속이다. 강에 뿌리를 박은 수풀이 높게 자라있다. 강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고, 뱀 같은 것이 서식하기도 좋아 보인다.

“괜찮아. 깊지 않아.”

아걸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누, 누가 깊을까 봐 그래? 어쨌든 신발이 젖잖아!”

몽설이 툭 쏘아대며 강물로 발을 디뎠다.

* * *

수풀 속에 배 한 척이 숨겨져 있다.

오래전부터 숨겨놓았는지 배가 다 삭았다. 제 몫이나 할 수 있으려나? 뱃전에 물이 반쯤 차 있는 것을 보면 구멍도 뚫려서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이게 움직여?”

몽설은 아걸을 뱃전에 뉘였다.

“삿대가 주변에 있을 거야.”

아걸이 강 건너에 있는 큰 산을 쳐다보며 말했다.

“삿대? 노가 아니고?”

몽설은 배 안에 있는 물을 퍼내려다가 ‘삿대’라는 말을 듣고는 주변을 살폈다.

아걸이 말한 대로 뱃전 바로 옆에 삿대가 있다.

대나무로 만든 삿대가 미리 말을 듣지 않았으면 찾을 수 없게끔 물속에 잠겨있다.

“이건 멀쩡하네?”

몽설은 삿대를 흔들어봤다.

대나무로 만든 삿대는 너무 멀쩡하다. 이제 막 만들어 놓은 듯 탄력이 탱탱하게 살아있다. 배가 삭은 것과 비교하면 상당이 이질감이 난다.

몽설은 즉시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아걸 곁에 사람이 있다. 조직인지 그를 도와주는 몇몇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분명히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배는 은폐된 것이고, 삿대는 방자(幇者)가 만든 것이다.

몽설은 배에 올라탔다.

배에는 물이 절반쯤 들어차 있지만 퍼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퍼내지 않아도 배가 움직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은폐된 배는 언제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멀쩡한 상태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아주 위급한 순간에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을 퍼내고 자시고 할 틈이 없다. 배에 타자마자 즉시 움직여야 한다.

“어디로 가?”

아걸이 고갯짓으로 강 건너를 가리켰다.

* * *

‘여긴 요새다!’

몽설이 놀란 눈으로 마을을 살폈다.

구수진이라는 마을은 작고 아담하다. 가구 수라고 해봐야 겨우 이십여 호밖에 살지 않는다.

마을 전체가 한 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의 특색은 마을 전체가 집 하나로 묶여 있다는 점이다.

집집마다 구분은 있다. 네 집, 내 집이 따로 있다. 하지만 집이 붙어 있다. 첫 집을 지을 때부터 아예 작심하고 통으로 지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집 앞에 있는 좁은 골목이 마당이다. 집안에는 마당이 없고 부엌과 방만 있다.

몽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중 한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은 매우 좁다. 옻칠을 한 문이 있고, 회를 칠한 벽이 있다. 그리고 그 너머는 다른 집이다.

이것을 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방이 아닐까?

“여기?”

“들어가.”

“안에 아무도 없어? 불쑥 들어가도 돼?”

“훗! 이미 눈치 다 챘으면서. 들어가. 오래 머물지는 못해도 당분간은 쉴 수 있어.”

“여기 뭐 하는 마을이야?”

“적랑대 잔당. 적랑대는 멸살되었지만, 가족들은 남았으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아!”

몽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삼이 노호조파검을 사용한다. 찰유보법도 쓴다. 모두 멸문된 살수문파 적랑대 무공이다. 그때부터 아삼과 적랑대가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는데…… 역시 연관이 있다.

문득, 아삼과 자신의 신세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몰살된 살수문파 적랑대, 초토화된 살수문파 취화원.

겁화를 피해서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취화원에 십여 명 정도가 남아있지만, 그 정도로는 전멸을 피했다고 보기 어렵다. 취화원이 재기불능 상태이니까.

앞으로 강호상에 암영검을 쓰는 사람이 나타나면 멸문된 살수문파 취화원을 떠올릴 것이다.

적랑대와 취화원은 같은 입장이다.

적랑대는 이런 식으로 살아남았나 보다.

자기들끼리 마을을 이루고, 외인을 배제하면서 힘들게…… 그러나 행복하게 살아간다.

취화원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삐걱!

나무 문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생각한 대로 아주 좁았다. 오랫동안 비워놓은 듯 퀘꿰한 곰팡이 냄새도 풍겼다.

몽설은 팔을 걷어붙였다.

“여기서 푹 쉬고 있어. 이런 건 내가 아주 잘해. 취화원에서 대청소 날이 되면 내가 제일 펄펄 날았다니까.”

* * *

똑!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몽설은 눈빛을 반짝 빛내면서 조심스럽게 검을 잡아갔다.

“문 열어. 옆집 사람이야.”

아걸이 눈감고 누운 채로 말했다. 잠을 자는 줄 알았는데, 깨어있었던 모양이다.

몽설이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회족(回族) 여인이 서 있었다. 머리에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단박에 회족임을 알아보겠다.

“신혼부부?”

여인이 안을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네? 아, 아뇨.”

몽설이 말을 더듬었다. ‘신혼부부’냐며 묻는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사 온 지 일 년이나 됐는데, 아직 인사를 못 했네. 이것 좀 드셔보슈.”

“네?”

몽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인이 내민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릇은 따뜻했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고기국수가 한 그릇 가득 담겨 있었다.

“사람이 도통 문밖으로 나와야 인사를 하지. 어쩌면 일 년 내내 방 안에만 있는 거유?”

“네?”

몽설은 이상한 말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사 온 지 일 년? 방 안에만 있어서 인사도 못 했다? 처음 봤는데도 친근하게 말한다?

“우리 남편은 사람 실으러 갔수.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건너편에 손님이 왔지 뭐유. 수십 평생을 살아도 손님 오는 것을 못 봤는데.”

여인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경고다!’

몽설은 눈빛을 반짝 빛냈다.

“우리 애들이 시망스러워서 좀 시끄러울 거유. 저놈의 장난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래도 벽은 때리게 하지 않을 테니까, 시끄러운 건 이해해 주슈.”

‘이것도 경고!’

“네. 알겠습니다.”

몽설은 머리를 숙여서 인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사할 틈을 놓쳐버렸다.

할 말을 마친 회족 여인이 뒤도 안 돌아보고 옆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인사를 하러 왔다고는 하는데, 말은 공손하지만 태도는 불청객을 보는 듯하다.

몽설 일행이 반가운 손님은 아닌 것이다.

“벽을 치면 도주하라는 거지?”

“쉿!”

몽설은 아걸을 쳐다봤다.

아걸이 무섭게 긴장한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온 신경을 두 귀에 모으고 있다.

‘벌써 강을 건너왔나? 시간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몽설도 긴장했다.

건너편 강에 손님이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삼군 신도파를 떠올렸다. 그가 추격해 왔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의 추격술이라면 턱밑까지 쫓아온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때, 아걸이 빠르게 말했다.

“부엌 아궁이 옆의 장작더미를 옆으로 치우면 지하 밀실이 있어. 지금 들어가야겠어.”

“지금?”

“빨리!”

몽설은 즉시 움직였다.

그녀는 아직 위기라거나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아걸이 말하는 것이니 믿는다.

부엌으로 가서 장작더미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부엌 바닥에 작은 널빤지가 나왔다. 널빤지까지 옆으로 밀어내자 진한 흙냄새가 확 풍겨왔다.

몽설은 재빨리 아걸을 안아 일으켜서 지하통로에 밀어 넣었다.

“이건 어떻게 닫아?”

“우리가 닫지 않아도 돼. 조금 있으면 사람이 와서 닫아줄 거야. 하지만 그때 피하기에는 늦을 것 같아서. 빨리 내려와. 움직임은 적을수록 좋아.”

몽설은 급히 지하통로로 뛰어내렸다.

* * *

탁! 후두둑!

널빤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장작더미를 흩어놓는 소리가 바로 뒤이어 들렸다.

아걸의 말대로 누군가가 와서 뒤처리를 했다.

몽설은 자신들에게 국수를 가져다준 아낙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 여자가 뒤를 막아줬을 것이다.

지하 밀실은 사방이 꽉 막혔다.

두 사람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바깥 동정을 살폈다.

덜컹!

문을 밀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발로 차며 들어섰다.

“응? 여긴 빈집인데?”

“아휴! 곰팡내. 가자. 다른 집이나 뒤지자고.”

한두 명이 아니다. 여기저기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발소리가 뒤엉켜서 들렸다.

삼군 신도파가 아니다. 누가 온 것일까?

“선주(船主)! 이것들은 어떻게 된 게 금붙이 하나 없어요. 확 불을 싸질러부릴까요? 그럼 깨끗할 텐데.”

“너 모가지가 몇 개야?”

“네?”

“시키는 대로 그놈이나 찾아!”

“아, 네…….”

저들은 대화를 숨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언성을 높여서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수적(水賊)들은 거리끼는 게 없다.

고수를 활동 영역으로 해서 암약하는 수적이라면 어떤 놈들일까? ‘선주’라는 호칭을 들어보면 배가 최소한 두 척 이상인 것 같은데, 그럼 꽤 큰 수적 집단이다.

‘성검문!’

몽설은 아걸이 왜 그토록 긴장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

그녀가 짐작한 대로 삼군 신도파가 뒤쫓아 왔다. 하지만 혼자서 온 것이 아니다. 성검문이 동원할 수 있는 문파들을 대거 동원했다. 마을을 뒤지고 있는 수적집단도 그중 하나다.

수적은 성검문 입장에서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만 일정한 한계를 두고 통제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취화원과 귀문이 여전히 암약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 성검문 말을 특히 잘 들어야 한다.

성검문이 없애려고 마음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멸살당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몸을 사린다.

이들 뒤에는 삼군이 있다.

아걸이 발견되면 삼군 혼자서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 수적들, 그리고 함께 동원된 수많은 무인들이 일시에 달려든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진다.

이들이 두려워서 경계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발각되면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에 경계한 것이다.

발각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몽설은 숨죽이고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