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第十五章 일단승(一段昇) (1)
벌모세수는 신체를 정화시킨다.
피를 맑게 해주고, 뼈를 단단하게 해주며, 살을 윤택하게 만들어 준다. 진기에서 사기와 마기 같은 악기를 말끔히 씻어낸다. 오장육부를 씻어주고, 감각을 최고로 끌어올려준다.
오물을 씻어낸 느낌이 든다. 헌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을 입은 느낌이다.
어느 날, 무심히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세상이 바뀌어 있다.
힘들고, 답답하고, 혼탁하던 세상은 사라지고 맑고 깨끗한 세상이 확 들어온다.
몽설은 진기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보통 단전이라고 하면 하단전을 일컫는다. 하지만 의술에서는 단전을 두 개 더 취급한다. 중단전과 상단전이 있다. 단전은 모두 세 개다.
무인은 하단전을 이용해서 진기를 운용한다.
몽설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르다. 세상이 바뀐 게 아니라 그녀의 몸이 바뀌었다. 하단전 중심의 운공에서 하단전과 상단전 상호 교류의 운공이 되었다.
몸 안에 진기의 방이 두 개 있다.
진기를 운용하면 하단전에도 쌓이고, 상단전에도 쌓인다.
한 번 운공으로 단전 두 곳에 진기를 쌓을 수 있다. 내공이 같은 노력으로 두 배 이상 빠르게 증진한다.
효능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두 곳의 진기는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작용을 한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러한 순환 작용은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미 순환 작용에 탄력이 가해졌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계속 지속된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한가롭게 책을 읽을 때도 진기는 순환한다.
진기 순환이 무엇인가? 운공이다.
일부러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공을 취하지 않아도 저절로 운공이 된다.
상처를 입어도 시간만 흐르면 운공요상한 것과 같은 효과가 일어난다. 치유가 상당히 빨리 된다. 특히 점혈(點穴)이나 독상(毒傷)에 효과가 좋다.
몽설은 운공을 즐긴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조용히 눈을 감고 진기가 순환되는 모습을 지켜본다.
운공을 취하는 게 아니다. 운공이 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정신이 맑아지고, 그 속에서 번잡했던 일을 떠올리면 일시에 해결책이 튀어나온다.
머릿속에 있는 단전, 니환궁이 작동했기 때문에 뇌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운공으로 얻는 효과가 매우 많다.
평화롭다. 고요하다. 상쾌하다. 울적함이나 불안감은 없다. 활기가 넘친다. 지금보다 더 기분 좋을 수는 없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몽설이 아걸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괜찮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맙기는 한데,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
아걸이 그녀를 쳐다봤다.
몽설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말 속에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다.
“나, 결심했어.”
“…….”
“파혼은 안 돼. 우리 정혼은 계속 이어갈 거야.”
“어쩔 수 없으니 관계를 유지하자는 게 아냐. 우리가 정말 혼인할지, 아니면 이대로 끝날지는 모르지만…… 달라질 건 없어.”
“…….”
아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바글거리는데, 한 마디도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얘기하자.”
“아니. 나중에 할 게 아닌 것 같아. 난 할 말 다 했으니까, 너도 할 말 있으면 해.”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 정혼, 심상치 않잖아. 양가 부모님들, 우리가 이런 길을 가게 될 줄 몰랐을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부모가 누군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냥 사정이 있으니까 버렸겠지 하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우리 부모님, 내 품에 혈검경을 찔러 넣고는 취화원에 보냈어. 날 취화원에 보낼 때 이미 탈이 났다는 거지. 우리가 이런 길을 가게 될 줄 예상하셨을 거야. 그러니 우리는 헤어지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가야 해.”
“그래, 그러자. 그럼 같이 가자.”
아걸이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했다.
“……너무 쉽게 대답하는 거 아냐?”
몽설이 되물었다.
“난 정혼자, 넌 정혼녀.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자는 거잖아. 계속 이 관계 유지하자고.”
“아니.”
“……?”
“난 당신 부인, 당신은 내 남편. 혼인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관계는 이런 관계야.”
“……풋!”
아걸은 몽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몽설이 말한 관계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어떤 관계든 인간관계는 산 사람들의 몫이다. 죽은 사람, 혹은 죽음이 약속된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맺을 수 없다.
몽설과 무슨 관계일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몽설이라는 여자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몽설과 자신을 엮어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정혼? 정혼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실일 뿐, 그런 것에 구애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몽설은 사부님의 딸이다.
자신을 구해주었고, 아버지와 얽힌 인연 때문에 결국은 죽음까지 맞이한 은인의 딸이다.
그러니 보살펴야 한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던져야 한다면, 기꺼이 웃으면서 던질 수 있다. 사부와 사모도 그랬으니까.
그녀를 보살핀다는 것은 도덕적 의무다.
이 의무에 대해서 ‘난 모르겠다.’ 하고 눈감아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혹은 지워질 수 없는 의무이니, 기필코 보살펴야겠다면 그것도 한 방편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무방하다. 몽설을 보살펴야 한다는 절대적인 구속력은 없다.
다만, 아걸은 후자를 택했다.
그녀를 피가 튀지 않는 안전한 지역에 옮겨놓고 싶다. 검과 칼이 닿지 않는 거리에 밀쳐놓고,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몽설에 대한 감정은 그것밖에 없다.
한데 할배는 그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어렸을 때 맺은 정혼을 사실처럼 여긴다. 아걸과 몽설이 만나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가정을 일궈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굳이 잘 있는 그녀를 끄집어내서 강조를 죽이게끔 만든 것이다. 아귀들이 득실거리는 싸움판에 순하디순한 사슴을 끌어들인 것이다.
몽설이 할배와 같은 생각을 한다.
몽설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다.
취화원, 몽설, 그리고 아걸과 할배……. 이들은 세상에서 내동댕이쳐진 쓰레기다. 세상 측면에서 보면 이른 시일 내에 치워버려야 할 골칫거리다.
이제는 서로 운명공동체로 묶였다.
끝이 빤히 보인다? 결국은 죽는다? 이제부터 계속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한다? 이런 것은 상관없다. 어디까지 가게 될지 모르지만, 가는 곳까지 함께 가자는 거다.
몽설에게도 정혼은 구실이다.
이제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죽고 못 사는 관계가 되겠나? 절망적인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 사내가 무엇이 좋다고 과거 인연을 끄집어내서 부부지연을 맺자고 하겠나.
아걸이 손을 내밀어 몽설의 손을 잡았다.
몽설이 움찔거리면서 즉시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도 아걸의 손을 잡았다.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의 떨림이 손을 통해서 전해져온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관계…… 계속 유지하는 거지?”
“그래. 유지.”
“그럼 호칭부터 정리해야지? 앞으로 어떻게 불러야 해? 가가(可可)? 에이, 이건 너무 낯간지럽고. 장부(丈夫)? 노공(老公)? 전부 다 껄끄러워. 입에 안 붙어.”
“아걸.”
“그냥 이름을 부르라고? 정혼자인데?”
“어차피 속명(俗名)이니까 상관없어. 진짜 내 이름은 서리흔(徐離昕). 일홀도를 얻으면 서리 성을 쓰는데, 나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성만 미리 받았어.”
아걸은 허흔이라는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서리 성 외에 또 하나 존재하는 하나의 성씨. 아걸은 허흔이라는 이름이 싫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서리흔. 이름 좋네. 그래, 그럼 그냥 아걸이라고 부를게. 나도 그냥 몽설이라고 부르면 돼. 어차피 살명(殺名)이니까. 내 이름이 오비야라는 건 알지? 나도 사실 오비야라는 이름, 원주님이 말해주셔서 얼마 전에 알았어.”
몽설이 활짝 웃었다.
하얀 이가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여자, 부인……. 이런 건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걸은 몽설을 쳐다봤다.
약속에 얽매인 정혼녀가 아니라 서로가 앞날을 약조한 정혼녀가 눈앞에 있다.
느낌이 전혀 다르다.
단순히 의무로 그녀를 구해주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온몸을 다해서 돌봐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사부의 딸에서 내 여자로 바뀌었다.
단지 느낌뿐이지만, 짧은 생각 전환이 그녀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버렸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어? 아는 대로 말해줘. 어차피 지금부터는 모든 것을 같이 해야 하니까. 나도 내 복수는 해야지. 원수가 누군지도 알아야 하고.”
몽설이 불쑥 말했다.
이런 말도 나올 줄 알았다. 오히려 너무 늦게 물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아걸이 입을 열었다.
“먼저…… 할배가 일을 터트렸는데, 잘못 터트린 거야. 지금 우리는 정말로 곤란하게 됐어.”
숨길 생각이 없다. 그녀도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몽설은 운명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벌모세수를 이룬 지금은 운명을 감당할 자격도 갖췄다.
* * *
탁탁! 탁탁탁! 탁탁탁탁!
아걸과 몽설은 연속해서 수검(手劍)을 주고받았다.
수검 교환은 수련을 목적으로 한다. 절대로 비무하려는 것이 아니다. 초식의 정교함을 수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내력을 사용할 이유도 없다.
힘이 실리지 않는 수검으로 초식 교환만 한다.
탁탁탁! 탁탁탁탁!
아걸이 수검을 쳐냈다. 몽설이 수검을 받아냈고, 다시 역공을 취해왔다.
탁탁탁! 푹!
몽설이 연속된 수검을 마지막까지 받아내지 못하고 어깨를 찔렸다.
“실수했네.”
몽설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날아오는 건 봤어?”
“응. 봤어. 막을 생각이었는데 미처…….”
“다시 하자. 이번에는 선공을 취해.”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물어봐.”
“그때 말이야. 보름 전에. 내게 상단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도와준 거야? 혈검경을 펼쳐본 적이 없으니 니환일검도 알지 못했잖아.”
“일기삼전(一氣三田)이라는 말이 있어.”
“일기삼전? 처음 들어봐. 삼전은 삼단전을 말하는 것일 거고…… 무슨 뜻이야?”
“맞아. 삼전은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 일기는 삼전에서 일어나는 기운. 세 곳에서 일어나는 기운이 하나. 하나가 셋, 셋이 하나. 삼단전은 원래 하나인 것이고, 그러니 삼단전에서 일어나는 기운도 하나. 일기삼전을 통천기(通天氣)라고도 해.”
“그럼 난……?”
“이제 두 곳을 연 거야. 나머지 중단전도 열어야 하는데, 언제 열릴지는 나도 모르겠다.”
“일홀문도는 모두 일기삼전을 사용해?”
“아마도?”
“치잇! 그럼 너도 사용하는구나? 벌모세수했다고 괜히 잘난 척했으면 망신당할 뻔했네.”
“이런 말도 있어. 일기삼전이 진심일공(眞心一功)만 못하다. 진심으로 운공하는 게 최상, 최적, 최고의 법이야. 자, 다시.”
아걸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탁! 탁탁!
몽설이 두 손으로 아걸을 공격해 들어갔다. 상단전에 우뚝 선 검, 니환일검이 지시하는 대로, 손을 움직였다. 아걸의 허점을 보고 빠르게 공격했다.
탁탁! 탁탁탁!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공격이라고 여겼는데, 아걸은 정말 잘 막아낸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유유히 손을 쓴다. 춤을 추듯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창밖으로 달이 떴다.
수구진에서 보는 스물다섯 번째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