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第十七章 장복(腸伏) (3)
“이게…… 수로?”
아걸에게 종이 뭉치가 건네졌다.
사십 년 전, 남모르게 진행되었던 공사 흔적이다. 수로의 설계도 이십여 장이다.
“맞아. 수로야.”
몽설이 활짝 웃었다.
“취화원이 찾아낸 거야?”
“정랑은 우릴 너무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어. 호호! 우린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지?”
“그런 말이 아니잖아.”
“알아. 무슨 말인지. 이건 내가 찾은 게 아니야. 전대 취화원주님들이 노력해 주신 덕분에 찾은 거야. 취화원이 노선을 잘 택한 덕분에 찾았다고 해야 하나?”
아걸은 몽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취화원이 찾은 것만은 확실하다.
“이거 얻은 대가로 마구영을 죽여주기로 했어. 공짜가 아니라 청부 사례금이야. 호호!”
몽설은 한 사내를 떠올렸다.
그는 잠잘 곳이 없어서 석실에 기어든 거지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누워있었다.
초라한 형색, 일그러진 얼굴, 왜소한 몸.
횃불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이 아니었다면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지나쳤을 것이다.
그 사내가 도면을 주었다.
촤락!
아걸은 도면을 펼쳤다.
제일 먼저 청부사자가 사용했던 수로가 어디서 끝나는지 살폈다.
도면 한 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른 도면을 찾아서 수로를 이었다. 그래도 끝나지 않는다. 다시 다른 도면을 찾아서 수로 끝부분에 붙였다.
그렇게 도면이 무려 일곱 장이나 이어졌다.
“이게 거리로 얼마야?”
아걸이 놀란 눈으로 도면을 보며 말했다.
“정확하게 십삼 리.”
“십삼 리?”
“수로가 끝나는 곳은 구절곡(九折谷)이야.”
아걸은 도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물길이 무려 십삼 리에 걸쳐서 이어졌다. 청부사자가 죽통을 넣으면 십삼 리를 흘러가야 한다.
왕죽을 땅에 묻으면 썩는다. 그러니 썩지 않게 방부 처리를 해야 하고, 석회도 사용해야 한다. 물길이 계속 흐르게끔 단차도 잘 조정해야 한다.
보통 작업이 아니다. 치밀한 계산과 섬세한 토목 기술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중원 무림에서 이 정도 토목 기술을 가진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그 중, 귀문이 두각을 나타낼 무렵에 명성을 떨쳤던 사람을 찾으면 범위는 더욱 축소된다.
‘그렇군. 그렇게 찾는 방법이 있었어.’
아걸은 몽설을 쳐다봤다.
자신은 추격 단서가 끊겼다고 생각했는데, 몽설은 다른 방면에서 단서를 찾아냈다.
“석실에 있던 사람이……?”
“동석이라고 해. 이걸 만든 사람의 아들.”
몽설은 백자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백자형은 섬서성 제일 건축가다.
산악지형인 섬서성에서 이름난 성(城), 장원, 전각은 모두 그가 지었다.
그는 사십 년 전에 실종되었다.
사실은 실종이 아니라 참살이다. 귀문 수로처럼 비밀스러운 공사를 하게 되면 끝이 좋지 않다.
백자형도 죽음을 예감했는지, 늘 현장에 데리고 다니던 아들을 이때만큼은 데려오지 않았다.
백동석, 당시 십육 세.
열 살 때부터 현장을 따라다니면서 건축 일을 한 탓에 건물을 보는 눈이 아버지 못지않다.
백자형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귀문도 안다. 하지만 아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아들은 수로 공사는 알지도 못했고, 또 백동석이 알아서 숨죽였기 때문이다.
백동석은 어린애에 불과한데 무엇을 알겠나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묻혔다.
하지만 백자형은 집을 떠나기 전, 이미 수로에 대한 구상을 마쳐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해서 도면 스물한 장 물길을 상세히 남겨놓았다.
몽설이 말했다.
“다른 도면도 이어봤어. 약방 물길도 구절곡에서 끝나. 귀문은 구절곡에 있어.”
구절곡은 매우 아름다운 계곡이다.
구절곡에 발을 들여놓으면 제일 먼저 용 두 마리가 기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좌우로 높은 산들이 꿈틀거린다. 그 모습이 마치 용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산과 산 사이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구절곡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한 계절도 아름답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이 발길을 들여놓지 않는다.
구절곡에는 나무마다 뱀굴이 있다고 할 만큼 뱀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사곡(九蛇谷)이라고도 부른다. 워낙 뱀이 많아서 땅꾼조차 들어서기를 꺼린다.
계곡은 아홉 굽이로 꺾인다.
굽이마다 굴곡이 워낙 급격하게 꺾어서 굽이 너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걸이 수려한 계곡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도록 길만 만들면 딱 좋겠는데?”
“그렇지? 마문(魔門)이 자리 잡기에는 딱 좋은 곳이야. 여기 있는 뱀들이 절정고수 백 명 몫은 해주는 것 같아. 웬만한 사람은 들어올 엄두도 못 내잖아.”
아걸과 몽설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추괴한 사내가 슬그머니 다가와 손짓을 했다.
“저기…….”
아걸과 몽설은 동석이 손짓한 곳을 쳐다봤다.
사내는 구절곡 중 두 번째 계곡, 좌측 능선을 가리켰다.
동석이 말했다.
“날 저기로 데려다주시오.”
백자형의 도면은 구절곡에서 멈춘다.
왕죽 수로가 어디로 빠져나오는지 세부적인 부분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
결국, 구절곡을 모두 뒤져야 한다.
넓디넓은 계곡에서 왕죽 구멍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니, 이것도 백사장에 떨어진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다.
한데, 동석이 제안을 해왔다.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 수로가 빠져나오는 곳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동석을 당장 데리고 왔다.
그가 손으로 가리킨 좌측 두 번째 봉우리까지 단숨에 올라왔다. 구사곡이라는 말처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뱀이 불쑥불쑥 나타나서 놀라기는 했지만.
동석은 두 번째 산봉에서 구절곡을 예리하게 살폈다.
그가 보는 것은 산세가 아니다. 물길을 본다. 계곡을 따라서 흐르는 물줄기를 쳐다본다.
“여기서 가장 가능성이 큰 곳은 저깁니다.”
그가 우측 여섯 번째 산봉 밑을 가리켰다.
“내가 살펴보지.”
아걸이 나섰다.
“아니, 탐색은 우리가 더 나을 것 같아.”
몽설이 아걸을 만류했다.
* * *
스륵! 스르르륵!
뱀들이 뜨거운 불길이라도 만난 듯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뱀 많은 구절곡에 뱀 없는 공간, 뱀이 들어서지 않을 안전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스륵! 스르륵!
뱀들이 이동한다.
뱀은 그들이 내줬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대신 앞쪽에 길을 열어주었다.
뱀들이 물러나고 다시 모인다. 그때,
스읏!
뱀들이 물러난 자리에 검을 든 무인 두 명이 내려섰다.
그들은 주변을 예리하게 살폈다. 나무 위도 쳐다보고, 풀숲도 뒤적거렸다.
뱀이 물러난 이유를 찾는다.
잠시 후, 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서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뱀들이 이상하게 행동하기는 했는데,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스읏!
그들은 다시 사라졌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태양이 중천에 오르고, 다시 서녘 하늘로 떨어진다.
뱀들은 그들 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취화원 살수들은 아주 강력한 뱀 기피제를 만들어서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녀들이 맡은 일은 대부분 잠입을 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풀숲, 천장, 도랑 등 해충이 많은 곳을 지나가야 할 경우가 많다.
뱀, 쥐, 모기, 파리, 개미 등 피해야 할 것이 많다.
“이거 편한데?”
아걸이 작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주머니 속에 뱀 기피제가 들어있다.
주머니를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봐도 아무런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그런데 뱀은 냄새를 맡는다. 너무 싫은 냄새라서 아예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몽설이 말했다.
“왜? 불안해? 일홀도가 굉장한 건 아는데, 사람에게는 몫이란 게 있거든. 이런 일은 우리가 훨씬 잘해. 많이 해봐서 경험이 축적되어 있거든.”
“누가 뭐래?”
“편히 쉬면서 기다려봐.”
사실, 조급해할 사람은 몽설이다.
팔 장로와 아홉 살수가 귀문을 염탐하기 위해 들어갔다.
그들이 너무 늦는다. 온전히 하루가 지나가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래도 몽설은 편안해 보인다.
일부러 편안한 척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운공조식만 취한다.
“훗!”
아걸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사부의 핏줄을 이어받은 여자다. 일홀도를 얻은 무인의 여식이다. 그 핏줄이 어디 가겠나.
스읏!
그때, 한 명이 돌아왔다.
그녀는 오자마자 눈인사조차 생략하고 다짜고짜 지필묵을 꺼내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머릿속에 담긴 정보가 변질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작성한다.
“귀문이 있는 것은 확인했는데, 안은 살피지 못했어요. 제 무공으로는 뚫고 들어갈 수 없어요.”
그녀가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몽설에게 건넸다.
“여긴 어디야?”
몽설이 그림에서 한 곳을 가리켰다.
“창고에요.”
몽설이 붓을 들어서 그림 옆에 고(庫)라고 적었다.
스읏!
또 한 명이 왔다. 그녀도 먼저 왔던 살수와 마찬가지로 즉시 그림을 그려나갔다.
“전 동북방을 살폈는데, 별다른 건 없어요. 이쪽은 지형이 험해서인지 경계도 느슨했고.”
팔 장로와 아홉 살수는 흩어져서 수색했다.
몽설은 그녀가 그린 그림을 받아서 동북방 쪽에 놓았다.
먼저 온 살수가 그린 그림은 서방이다. 동북방 그림과는 한 곳에서 만난다.
아마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을 약속한 모양이다.
그림 열 장이 완성되었다.
아주 큰 지도가 땅 위에 펼쳐졌다.
몽설이 아걸을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정랑 차례야. 우리 할 일은 다 했어. 팔 장로님도 발각될 걸 우려해서 안을 살펴보지 못했다면, 여길 지키는 자들은 정말 고수야.”
몽설이 그림 중 한 곳을 가리켰다.
귀문 문주 마구영이 거처하는 곳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아니면 집무실이던가.
“이제 우린 쉬어도 되지?”
몽설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걸은 그림 열 장을 뚫어지게 살폈다.
몽설이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림을 완성한 데는 ‘비밀’이라는 중요한 요점이 있다.
문주를 죽이되, 절대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 일을 해달라고 이토록 신중하게 그림을 그리고, 수색까지 한 것이다.
무작정 치고 들어가서 죽이는 것이라면 당장 칼을 들었을 텐데.
아걸은 그림을 보고 또 봤다. 상대방이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염두에 두었다. 그에 대비해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모든 일이 생각처럼 되지는 않는다. 특히 살행에서는 온갖 변수가 난무한다.
“아!”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아걸이 탄성을 내질렀다.
이제야 비로소 몽설이 왜 귀문 문주를 죽이려고 하는지, 왜 여기에 살길이 있다고 하는지 알겠다. 몽설이 말해주지 않은 이유도 확실히 알았다.
이건 미친 짓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하하. 아무래도 정혼 잘못 한 것 같아. 너무 약해서 무림 풍파나 견뎌낼 수 있을지 염려되었는데…… 하하!”
아걸은 몽설이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몽설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대충 짐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