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第十七章 장복(腸伏) (4)
스읏!
아걸은 물이 많은 계곡으로 움직였다.
취화원 살수는 귀문 무인들이 잠복해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파악해 놨다.
취화원 여인들이 감지한 것은 그도 감지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숨어 있다. 나무 뒤, 바위 뒤, 땅속에 굴을 파고. 두 명, 혹은 세 명씩 짝을 이뤄서.
그들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이동했다.
일홀문은 오직 칼만 수련한다.
하지만 무공은 칼만 잘 쓴다고 강해지는 게 아니다. 보법, 신법, 권법, 각법 등 도법을 보조해 주는 부분들이 많다. 기본공(基本功)을 충분히 수련한 다음에 칼을 수련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는 일홀문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일홀문도의 기본공 수련은 치가 떨릴 만큼 잔인하다.
굳이 칼을 수련하지 않고 기본공만 수련해도 무림에 나가면 악귀나찰처럼 싸울 수 있다.
동박이 그런 경우다.
다만, 일홀문도가 오직 칼만 수련한다는 말은 도법은 추구하되, 기본공은 특별히 선호하는 무공이 없다는 뜻이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면서 각법을 수련한다. 나무를 타고, 개울을 건너뛰면서 신법과 보법을 수련한다. 기본공을 형식으로 수련하지 않고, 자연에서 터득한다.
아걸의 움직임에는 일정한 형식이 없다.
타앗!
바위를 밟고 뛰었다.
왼쪽 나무 위에 귀문 무인이 숨어 있는 것을 안다. 바위 위로 신형을 날리면 발각될 것도 안다. 그런데도 태연히 신형을 움직인다. 마침 그가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스으읏! 스읏!
바위를 건너뛴 후에는 다시 숲으로 스며들었다.
아걸은 네 곳을 주시했다.
각기 다른 곳에 숨어 있고, 그중 두 명은 오직 계곡만 지켜본다. 반대로 다른 두 명은 숲만 본다.
‘경계가 삼엄해.’
아걸은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서른 명은 제친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앞에도 이만한 수가 더 있다.
‘저기군!’
아걸을 벼랑을 발견했다.
취화원 살수들이 그려준 그림에서 찾은 곳이다.
목적지를 뒤로 돌아갈 수 있으며, 길이 아닌 곳이라서인지 경계도 느슨하다.
스읏!
벽호공(壁虎功)이 시전되었다.
세간에서 무인들이 수련하는 벽호공은 아니다. 그런 무공은 어떻게 펼치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아걸은 두 팔과 다리가 절벽에 찰싹 달라붙은 듯 빠르게 기어 올라갔다.
‘바로 위, 한 명!’
경계하는 무인이 절벽 위에 한 명 있다. 그리고 이 장쯤 떨어진 곳에 또 한 명이 있다.
귀문은 모든 경계망을 이중으로 깔아두었다.
아걸은 절벽을 박차고 위로 솟구쳤다. 동시에 반철도가 허공을 야무지게 찢었다.
슈릿!
“커억! 컥!”
절벽 위에서 경계를 서던 무인이 날벼락을 맞고 풀썩 쓰러졌다.
순간, 아걸은 용수철처럼 퉁겨 올랐다.
츗! 촤악!
반철도가 상대방의 허리를 후려쳤다.
번갯불이 번쩍 빛났다. 이대 문주의 목도일참(木刀一斬)이 귀문 무인의 허리에 작열했다.
“크윽!”
그도 짧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아걸은 이십일대 문주의 낙화도와 이대 문주의 목도일참을 펼쳤다.
두 칼 모두 상대방에게 벼락처럼 강한 충격을 안긴다는 특징이 있다. 칼이 떨어지는 것도 벼락이고, 칼에 맞은 충격도 급살을 맞았을 때처럼 충격적이다.
너무 충격이 커서 몸이 얼어붙는다.
머리를 맞은 자는 비명을 쏟아낸 것만도 다행이다. 머리에 일격을 당하면 꼭 낙화도가 아니더라도 곧바로 절명한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다.
허리를 베인 자는 너무 강한 충격에 머리가 얼어버린다. 칼에 맞은 것은 느끼지만, 어떠한 말도 쏟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입을 벌리고,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흘리기는 했지만 처절한 비명과는 거리가 멀다.
저벅! 저벅! 저벅!
아걸은 소로를 걸어갔다.
벼랑 위에서 목적지로 이어지는 작은 길은 잘 정돈되어 있다. 길에 나뭇잎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아침저녁으로 빗질을 하는 것 같다.
팔 장로는 여기서 걸음을 멈췄었다.
소로 어딘가에는 팔 장로를 멈추게 만든 고수가 숨어 있다.
팔 장로는 취화원 살수들이 목표로 한 곳, 모두가 고수의 숨결을 느낀 전각을 눈으로 봤다. 팔 장로가 감지한 고수도 전각 근처에 은신해 있다는 소리다.
저벅! 저벅!
그는 숨지 않고 소로를 걸었다.
소로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밤이 깊어서 소로는 완전히 칠흑 같은 어둠에 덮였다. 달빛조차도 스며들지 않는다. 그러니 몸을 숨길 필요도 없다.
팟!
일순, 아걸은 살기를 감지했다.
소로 우측에 맹수가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범이 달려들 것 같다.
‘그렇군.’
아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기가 매우 사납다. 꼭 도끼를 들고 미쳐 날뛰는 광인을 만난 느낌이다.
팔 장로가 이 자와 부딪치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두 수만에 승부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적어도 백여 초 이상 손속을 교환해야 그때부터 우열이 가려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 자들이 문주의 호법이라면 귀문도 취화원 못지않은 무공을 지녔다는 것인데
……
.’
상대방의 기도를 탐색했다.
사실, 그는 숨어 있는 자에게 소리 없이 다가설 수 있다. 기척을 죽이고, 뱀처럼 다가가서 와락 덮칠 수가 있다. 지척에서 칼을 쓰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절명한다.
그러나 아걸은 일부러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방이 품은 기운을 읽는다. 상대방이 전개하는 무공을 견식한다. 몽설이 왜 귀문 문주를 죽이려고 하는지 이유를 알기 때문에 일부러 무공을 본다.
‘뭐야, 이 자식!’
낯선 자가 소로를 걸어온다.
그는 매우 평범하다. 무인이기는 하지만 고절한 무공을 지닌 고수는 아니다.
‘잔재주 나부랭이 정도 수련한 것 같은데.’
하지만 놈은 귀문 안방까지 들어왔다. 절벽을 타고 올라와 경계 무인 두 명을 죽이고 소로를 걸어온다. 은신술과 기습이 꽤 뛰어난 놈이다.
하지만 놈의 운도 이제 끝났다.
어둠이 놈을 감싸주고 있지만, 어떤 사람 눈에는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환히 보인다.
스릉!
어둠 속에서 검이 뽑혔다.
숨어 있는 자가 늑대라면 아걸은 호랑이다.
아걸은 이제 막 일홀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선대 문주들의 일홀도가 아니라 자신의 일홀도를 찾아가는 중이다. 자신만의 칼이 어떤 것인지 맛봤다.
숨어 있는 자가 그런 칼을 상대할 수는 없다.
물론 상대방도 이런 사실을 느낄 것이다. 늑대는 절대 호랑이에게 덤벼들지 않는다. 싸우기 전에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껴서다.
그래서 기운을 탈색한다.
몸에서 호랑이의 기운, 맹수의 기운을 빼낸다. 흉포함, 날카로움을 배 속 깊숙이 묻어둔다.
살수 세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퇴빙이라고 한다.
얼음이 매우 천천히 녹는 것, 녹아서 없어져 버리는 것, 그래서 전혀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 뛰어남이나 비범함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
퇴빙은 살수 용어로 살수의 최고봉을 뜻한다.
아걸은 퇴빙이라는 말을 몰랐다. 몽설이 말해주어서 알았다. 마구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너무 평범하고 편안해 보해서 고수인 줄 몰랐다고 하면서,
그 말이 생각나서 기운을 죽였다.
그는 기운을 잘 죽인다. 할배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항상 기운을 죽이면서 살았다.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면 어쩌겠나. 그러니 숨길 수밖에.
기운을 죽이자, 숨어 있는 자가 검을 뽑았다.
‘어떤 무공인지 볼까?’
아걸은 문득 어떤 기운을 느낀 듯 움찔거렸다. 순간,
쒜에에엑!
검이 어둠을 찢으면서 달려들었다.
내리친다! 아니, 올려친다. 몸을 빙글 돌리면서 사납게 후려친다. 양손으로 검을 잡고 곧게 찌른다. 오른손으로 검 등을 촤락! 쳐서 검날을 바꾸더니 쓔웃! 위로 그어 올린다.
사내는 숨 한 모금 들이쉴 사이에 다섯 번이나 검을 쳐냈다.
아걸은 늘 간발의 차이로 검을 피해냈다.
얼핏 봐서는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피한 것 같다.
하지만 이십오대 문주의 수신도를 수련하면 이렇게 된다. 수신도는 칼을 몸에 바싹 붙인 상태에서 상대방의 병기를 맞이한다. 그래서 손가락 한 마디 혹은 두 마디 정도의 공간을 두고 충돌이 일어난다.
아걸은 수신도를 펼치지 않았다. 다만 수신도를 신법으로 변환시켜서 검을 피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상대방이 쳐낸 검은 늘 간발의 차이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스읏!
상대방이 검을 들어 아걸을 겨눴다.
다른 손으로는 허리춤을 더듬어서 작은 죽통(竹筒)을 꺼냈다.
- 귀문은 연사침(連射針)이라는 암기를 사용해. 크기는 손바닥만 한데, 안에는 세침이 가득 들어있어서 피하기 어려워. 특히 밤에는 아예 보이지 않아서……
“누구냐!”
상대방의 음성에 상당한 경계심이 깔렸다.
손속을 교환한 후, 비로소 상대방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걸이 비로소 반철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잔백마검(殘魄魔劍)을 보게 될 줄 몰랐는데.”
“잔백마검을…… 알아봐?”
상대가 상당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실수였다. 그는 놀라는 대신에 연사침을 발사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최소한 공격을 한 번은 더 펼칠 수 있었다.
반철도가 허공을 갈랐다.
쒜엑! 퍼억! 꽈직!
공기를 찢는 소리는 살을 찢고 뼈를 갈라내는 소리로 바뀌었다.
상대가 허리를 왼쪽으로 푹 꺾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반철도가 왼쪽 허리를 가격했다. 몸을 반쯤 가른 후, 앞쪽으로 빠져나왔다.
아걸은 이번에 자신의 일홀도를 펼쳤다.
삼군을 벤 일홀도가 누군지 모를 자를 벴다. 하지만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때 그 칼이 아니다. 그때는 일홀도를 완성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반쯤 펼치다가 만 느낌이다.
아걸은 실망하지 않았다. 뭐든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는 법이니까.
전각을 중심으로 다섯 명이 은신해 있다.
전각 지붕에 한 명이 있다. 동쪽에 한 명, 서쪽에 한 명이 있고, 전각 안에 두 명이 있다.
다섯 명을 일시에 베는 것은 불가능하다.
취화원 살수들은 저들을 감지하는 즉시 멈췄다.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멀리서 관찰했다.
저들 무공은 방금 벤 자와 엇비슷하다.
문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아걸도 전각 안에 있는 자들까지 감지해 내지는 못했다. 운 좋게도 그들 모습이 등잔 불빛에 비쳤기 때문에 알았다. 그러니 안에 몇 명이 더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어쨌든 밖에 있는 자들은 세 명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무공은 잔백마공. 무공은 더 볼 필요가 없겠어. 오랜만에 산양 사냥이나 해볼까?’
아걸은 끈을 꺼내서 바짓단을 묶었다. 소매 끝도 묶었다. 일절 소리를 흘리면 안 된다.
산양은 절벽에 붙어서 산다.
어떨 때는 어떻게 저런 곳에 서 있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위험한 곳에 서 있기도 한다.
산양 사냥을 하려면 절벽을 잘 타야 한다.
산양은 절벽에서 뛰어다닌다. 발 디딜 곳, 손으로 잡을 곳이 없는 곳인데도 거침없이 훌쩍훌쩍 뛰어다닌다. 그러니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산양을 잡기란 무척 어렵다. 거의 모든 사람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스으으으읏!
아걸은 산양을 잡을 때처럼 땅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이 부드럽게 움직여야 한다. 풀이나 돌도 건드리면 안 된다.
절벽을 그렇게 기어 올라가서 산양 곁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잡을 기회가 생긴다.
- 전각 위에 한 명, 동쪽에 한 명, 서쪽에 한 명. 동과 서의 거리는 무려 이십 장. 안에 있는 자는 고사하고 밖에 있는 자도 소리 없이 처리하기는 힘들겠어.
- 할 수 있잖아.
- 날 너무 과대평가하네. 내가 신도 아니고…….
- 공부 허도기는 이 시대의 무신이야. 무신을 꺾으려면 정랑도 신이 되어야지. 신만이 신을 꺾을 수 있으니까. 가서 잘 해봐. 좋은 소식 기다릴게.
아걸은 몽설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농으로 한 말인데, 정말로 농이 아니게 되었다.
밖에 있는 자들을 소리 없이 처리하는 것만도 신이 아니면 불가능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