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第十七章 장복(腸伏) (5)
첫 번째 기습 대상자로 동쪽 사내를 선택했다.
사실 동쪽이나 서쪽이나 다를 게 없다.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하든 전각을 뛰어넘어 반대쪽까지 달려가야 한다. 그것도 거의 시간 차이를 두지 않고.
스읏!
아걸은 동쪽 사내를 이 장 앞에 두고 멈춰 섰다.
맹수가 도약하기 직전에 잔뜩 웅크리는 것처럼, 그도 웅크렸다. 진기를 끌어올리고, 반철도를 들고, 노리는 부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번에도 배를 노린다.
방금 펼쳤던 일홀도를 다시 한번 펼친다.
이번에도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실전을 통해서 알아볼 생각이다.
미완성 무공을 실전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다.
진기가 끊어질 수도 있고, 초식이 막힐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상대가 약한가? 천만에! 완벽한 일홀도를 펼칠 때는 약하지만, 일홀도가 엉키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때는 저들이 호랑이로 둔갑해서 목숨을 위협할 것이다.
모든 것은 순간에 결정된다.
단지 죽이기만 하는 것뿐이라면 어떤 무공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귀문 무인들이 듣지 못하도록 은밀히 암살하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선대 문주들의 일홀도를 사용하면 매우 안전할 것이었다. 저들은 흉내 내기에 불과한 일홀도도 막지 못한다.
하지만 아걸은 그러기 싫었다.
일홀도에 대한 욕심이 너무 강해서 반드시 자신만의 일홀도를 사용하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
일홀도 완성이 코앞에 있다.
지금 이런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실전에서 일홀도를 꺼내볼 수 있겠나.
슷!
그는 막 움직이려고 했다.
그때, 할배의 음성이 벼락같이 뇌리를 강타했다.
- 선대 문주들이 일홀도를 완성한 줄 아느냐? 완성했다면 왜 죽어?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고 살아야지. 누군가에게 죽었다는 것은 일홀도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무공들, 완전히 쓰레기라는 거지. 크크!
할배가 아걸을 약 올릴 때 하던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이 딱 생각났다.
역대 일홀문주 중 누구도 일홀도를 완성했다고 공언한 분이 없었다. 늘 칼을 연구했고, 정진했다. 죽는 순간까지. 물론 그 속에는 사부도 포함된다.
일홀도는 완성되지 않는 무공이다.
하물며 이제 갓 일홀도 맛을 본 주제에 일홀도 완성을 코앞에 두었다고 자신해?
‘난 아직 멀었구나. 겨우 이 정도에 흔들리다니.’
아걸은 반철도를 고쳐 잡았다.
파앗!
땅을 힘껏 박차고 도약했다.
두 팔을 하늘 높이 쫙 펼치고, 두 다리는 땅을 박찬 상태 그대로 오므렸다.
“웃!”
상대가 아걸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검을 뽑았다.
하지만 아걸이 한 수 빠르다. 아걸은 사내에게 검을 쓸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호랑이가 앞발을 들어서 먹잇감의 머리를 후려치듯이, 반철도가 사내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고개가 옆으로 홱 꺾어졌다.
십육대 문주의 점촌일도(佔寸一刀)다.
점촌일도는 느린 듯하지만 빠르다. 전체적인 움직임은 느린 편이다. 하나 순간적인 타격은 무척 빠르다. 상대는 공격하는 모습을 보지만, 타격 모습은 보지 못한다.
파앗!
아걸은 쓰러진 자를 쳐다보지 않았다.
두 번 손 쓸 일이 없게끔 공격을 확실하게 끝냈다.
칼이 상대를 타격하는 순간, 이미 머리뼈가 잘려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으로 알아냈다.
그는 전각 위로 올라갔다.
타타타탁!
전각 위에 있던 자는 이미 그를 향해 달려오는 중이다.
동쪽에 있는 자가 기습당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쓰러지는 모습은 봤다.
아걸은 반철도를 두 손으로 잡았다.
촤르릉!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반철도로 흘러 들어갔다.
순간, 도신합일(刀身合一)이 이루어졌다. 반철도와 그의 육신, 그리고 정신이 하나로 합일되었다.
육신은 사라지고 칼만 남았다.
츄왁!
한줄기 직선이 상대방의 가슴을 향해 그어졌다.
“우웃!”
상대방은 깜짝 놀라서 황급히 검을 휘저었다.
검광이 무수히 피어났다. 검신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화살처럼 날아오는 칼날을 막기 위해 이십사검을 떨쳐냈다. 스물네 겹의 방어막을 펼쳤다.
꽈지지직!
반철도는 밀밀히 펼쳐진 방어막을 찢고 들어갔다. 그리고 상대방의 가슴을 푸욱! 찔렀다.
“커억!”
상대방은 비칠비칠 물러섰다.
물러서고 싶어서 물러선 것이 아니다. 반철도가 찌르는 힘에 떠밀린 것이다.
사대 문주의 탄궁도(彈弓刀)다.
과거, 사대문주는 일초무적도(一招無敵刀)로 불렸다. 강맹한 진기를 실어서 탄궁도를 펼치면 거의 무적이었다. 막을 수 있는 무공이 없었다.
츄웃!
칼을 뽑자 사내의 가슴에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아걸은 허공 가득히 뿌려지는 핏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채, 전각 반대쪽을 향해 치달렸다.
타 타 탓!
전각을 힘차게 차면서 달렸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다.
이미 전각 안에 있는 무인들은 바깥에서 싸움이 일어난 사실을 눈치챘다.
탓! 파앗!
전각을 딛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두 팔과 다리를 큰 대자로 활짝 펼쳤다. 몸으로 사내를 껴안듯이 달려들었다.
검을 뽑아 든 사내가 힘껏 아걸을 갈라왔다.
당연하다. 누구든 이런 검을 구사한다. 상대방이 무방비 상태로 가슴과 몸통을 활짝 열어놨는데, 베지 않고 견디겠나. 당장 두 쪽으로 갈라버려야지.
불행히도 아걸에게는 반철도가 있다.
쒜에에엑!
칼이 허공을 갈랐다.
사내는 머리 뒤에서 앞으로 검을 쳐냈다. 하늘을 갈랐다.
아걸은 다리에서 머리 쪽으로 칼을 쳐냈다. 땅을 갈랐다.
사내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이겼다는 확신이 여실히 묻어났다.
땅에서 검을 쓴 자, 허공에서 칼을 쓴 자.
두 사람이 부딪칠 경우,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사내가 훨씬 유리하다.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 힘을 온전히 쓸 수 있다. 진기도 완벽하게 주입된다. 몸의 중심을 굳건하게 유지한 채 오직 목표를 향해 검을 쓸 수 있다.
허공에서 펼친 칼은 오로지 팔의 힘으로만 쳐내야 한다. 진기를 싣기도 어렵다.
전각에서 뛰어내릴 때 이미 칼에 진기를 실었다면 낙하하는 힘까지 더할 수 있다. 아주 큰 힘이다. 하지만 중간에 도초를 뻗어내는 것은 펼치기도 어렵고, 힘도 제대로 실리지 않는다.
까앙!
칼과 검이 부딪쳤다.
아주 극렬한 쇳소리가 울렸다. 순간,
“큭!”
사내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반철도가 장검을 절단해 버렸다. 그리고 내쳐서 사내의 코에서 이마까지 쳐냈다.
앞머리를 격타당한 사내는 피식 쓰러졌다.
십문주의 천력도(天力刀)다.
칼에 하늘의 힘을 싣는다. 천신이 내리치는 칼을 만든다. 그러려면 전신 진기를 온전히 검에 실을 줄 알아야 한다. 칼이 목표를 향해 날아가고, 몸은 따라가기만 한다.
아걸은 천력도를 십분 활용하지 못했다.
천력도를 제대로 사용하면 일도만 사용해도 탈진이 일어난다. 전신 진기가 모두 빠져나간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천력도에 싣는 힘은 장검을 잘라내는 선에서 그친다. 설마 장검이 잘릴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할 테니까.
쉬잇!
아걸은 사내를 베는 즉시 방향을 틀어서 전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쒯!
전각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검풍이 쓸어왔다.
아걸은 검이 몸에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 검을 향해서 오히려 달려갔다.
검이 몸을 찌르려는 순간, 십삼문주의 단도격타가 터졌다.
스읏! 싸아악!
검을 쳐오던 사내는 잠시 멈칫거리는가 싶더니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네다섯 걸음 정도? 그리고는 쓰러졌다.
사내의 목에서 붉은 피가 뭉클뭉클 피어났다.
‘또 한 명!’
아걸은 즉시 상대를 찾았다.
예기가 등 뒤에서 느껴진다. 쇳가루 맛이 달콤하게 피어난다. 하지만 아걸은 돌아서지 않았다.
탁자에 앉아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수하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도 태연히 붓을 들어서 글씨를 쓰고 있다.
서신을 쓰는 게 아니다. 큰 화선지를 펼쳐놓고 글씨를 쓴다.
무간업화(無間業火).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지독한 불꽃’이라는 글귀다.
스읏!
등 뒤에 있던 자가 슬쩍 움직였다.
“움직이지 마라. 네 검은 이미 파악됐다.”
아걸이 싸늘하게 말했다.
사실,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몽설은 아무도 모르게 귀문 문주를 죽여달라고 했다. 그러면 이 전각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한다.
아걸은 등 뒤에 있는 자도 죽일 수밖에 없다.
한데 왜일까? 지금은 칼을 쓰고 싶지 않다. 무간업화라는 글을 보는 순간 들끓던 살심이 가라앉았다.
글씨를 쓰던 사내가 고개를 들고 아걸을 쳐다봤다.
“굉장한 도법이군. 내 호신육위(護身六衛)를 어린애 다루듯이 베어 넘겼어.”
“마구영?”
“타 문파 문주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다니, 예의가 없군. 아무리 죽이러 왔다고 해도 예우는 해줘야지.”
“누구냐?”
마흔 중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이 대답했다.
“도초문주(稻草門主)라고 들어봤나?”
아걸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도초문주…… 허수아비 문주다. 빈말이 아니다. 이 자는 정말 도초문주 같다. 일신에서 쇳가루 냄새보다는 진한 먹물 냄새가 더 많이 풍긴다.
“후후! 왜 똥 씹은 표정이야? 크게 실망한 것 같은데, 그러지 마. 내 마음이 안 좋잖아.”
“…….”
아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귀문은 취화원보다 훨씬 비밀스럽다. 귀문 문주는 안위에 대해서 백 배 더 신경 쓴다.
맞다. 실망할 것 없다. 귀문 문주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최소한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왔어야 한다. 얼굴도 모르고 귀문에 뛰어든 것이 실수다.
스읏!
아걸이 칼을 들어 올렸다.
“아! 잠깐 기다려. 뭐가 그리 급해.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네 밥인데. 이거 글씨가 잘 되어서 말이지. 갈 때 가더라도 낙인이나 찍자고.”
“찍어. 그동안 넌 나하고 칼이나 섞고.”
아걸이 뒤돌아섰다.
등 뒤에는 검을 든 자가 서 있다. 두 손으로 검을 꽉 잡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아걸이 말했다.
“잔백마검은 실컷 봤어. 다른 걸 보여줬으면 좋겠군. 아! 이 방에 피워놓은 미혼향(迷魂香)은 내겐 안 통해. 사부가 독에 당해서 독을 꽤 많이 연구했거든.”
무간업화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살심이 누그러졌다.
사실은 살심이 누그러진 것이 아니라 몸이 땅으로 꺼진 듯 착 가라앉은 것이다. 미혼향이 훅 밀어닥쳐서 진기를 일시에 풀어버린 현상이다.
아걸은 그 순간에 미혼향을 눈치챘다.
“으음!”
검을 든 무인이 신음을 흘렸다.
아걸은 칼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도초문주, 당신은 계속 낙인을 찍어. 방금까지 당당하더니 왜 갑자기 도주하려고 해. 어차피 이 전각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어. 그 정도는 알잖아.”
“악귀 같은 놈!”
도초문주가 갑자기 책상 서랍을 열더니 죽통 두 자루를 집어 들었다. 순간,
쉿!
아걸 손에 들려있던 반철도가 뒤로 날아갔다.
칼은 도초문주의 가슴 정중앙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컥!”
도초문주가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생각한 대로 도초문주는 무공을 모른다. 귀문 문주가 임시로 세워놓은 허수아비다.
“넌 내가 좀 잡아둬야겠다.”
“후후! 네 멋대로…… 윽!”
사내는 아걸이 빈손이 되자 즉시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 몇 마디를 하던 중 느닷없이 무릎을 풀썩 꿇었다.
철컹!
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너희가 독을 썼으니 나도 독을 쓴 거야. 서로 원망할 건 없어.”
아걸은 사내에게 걸어가서 마혈을 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