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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88화 (88/600)

#88화. 第十八章 청부 외 살인 (3)

아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다고 자신한다.

일체잠행을 펼치면 이동이 느려서 그렇지 추격당하지는 않는다.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하는데 어떻게 쫓아오겠나.

일체잠행을 수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부러라도 적을 만드는 것이다.

적이 악착같으면 더욱 좋다.

적에게 일부러 쫓기면서 일체잠행을 수련한다.

적에게 발각되면 일체잠행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느긋하게 낮잠을 자도 쫓아올 수 없어야 한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의미 없다.

적이 두 걸음 쫓아올 때, 자신은 한 걸음만 움직이고도 찾지 못해야 한다.

일홀문도는 모두 그런 식으로 일체잠행을 수련한다.

아걸도 수십 번에 걸쳐서 일체잠행을 펼쳤다. 할배와 다닌 어린 시절은 쫓김의 연속이었다.

이제 일체잠행은 완성되었다.

몽설과 함께 도주하면서 실수를 철저히 배제했다. 실수가 있을 것 같으면 제자리에 멈춰서 다시 되돌아봤다.

실수는 없었다.

단언하는데 풍도곡 사형들이 추격해도 피할 수 있다.

성검문과 풍도곡으로부터 완전히 숨었다.

그런데…… 자신도 저들을 보지 못한다.

귀문이 저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양쪽이 모두 숨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걸은 어처구니없어서 피식 실소를 흘렸다.

살수문파는 최근 정보에 가장 민감해야 한다. 그런데 최대 적이나 다름없는 성검문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렸다. 아니면 비밀리에 다른 곳에 정보를 수집해 놨거나.

아걸은 후자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오곡주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면 모를까, 문주의 영패를 들고 찾아온 고수에게 정보를 숨길 리 없다. 또 아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미리 숨겨놨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잘됐네. 우리 일 년만 숨어 있어.”

몽설이 차분하게 말했다.

“일 년?”

“일 년이면 사생락을 어느 정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니환일검을 조금 더 끌어올려야 하고. 정랑도 일홀도를 완성해야지? 우리 일 년은 정비하는 시간으로 갖자.”

“그것도 괜찮겠지.”

아걸은 쉽게 동조했다.

할배는 걱정하지 않는다.

적랑대가 이미 손을 뻗쳤을 것이다. 그러면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남은 것은 승부!

서리형개와 부딪쳐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백전백패다. 싸우면 무조건 진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서리가헌이나 서리형개는 허도기 앞에서 숨도 크게 못 쉰다는 것이다. 야망도 웅지도 펴지 못하고 풍도곡 한쪽 구석에서 하늘만 쳐다보면서 세월을 보낸다.

도대체 허도기의 무공은 얼마나 높은 것인가?

‘일홀도가 없으면 안 돼!’

아걸은 일홀도가 절실히 필요했다.

몽설이 말했다.

“그래, 그럼. 우리 일 년간 여기서 쉬는 거야. 무공이나 수련하면서. 일단 그렇게 해.”

* * *

“성검문, 풍도곡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해 주세요.”

몽설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쪽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는 것으로…….”

“이상하지 않아요? 취화원도 성검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는데, 귀문이 왜 수집하지 않죠?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비밀리에 수집해야 해요.”

“그걸 어떻게……?”

팔 장로가 난감해했다.

“활검문 동정을 살펴주세요.”

“활검문요?”

“수룡방 동정도 살펴요. 상문객들이 또 나타나는지, 나타났으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눈여겨봐요.”

“아!”

팔 장로가 비로소 알았다는 듯 머리를 탁 쳤다.

호랑이가 다가오는지를 알기 위해서 꼭 형체를 볼 필요는 없다. 수풀이 흔들리는 모습만 봐도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로도 추측할 수 있다.

성검문, 풍도곡과 연관된 문파나 사람을 주시하면 저들의 동정을 살필 수 있다.

“성검문과 연관 있는 문파를 모두 주시하겠습니다.”

“풍도곡도요.”

“당연하죠.”

팔 장로가 활짝 웃었다.

* * *

귀문은 한가하지 않다.

“또?”

“여긴 무척 바쁘게 일하네요.”

팔 장로가 서신을 내밀었다.

귀문에는 하루에도 몇 건씩 살인 청부가 들어온다.

어떤 일이든 이유를 묻지 않고 돈만 된다면 무조건 청부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무척 일이 많다.

“음!”

몽설은 서신을 읽다가 와락 구겨버렸다.

재산을 노린 청부다.

하인이 주인 일가족을 죽여 달란다. 이미 재산을 가로챌 준비는 다 끝내놨단다.

취화원 같으면 손도 안 대는 저질 청부다.

소위 무림 양대살맥이라는 귀문이 이따위 청부들을 받아들였단 말인가.

“문주님, 청부금을 보세요. 재산 절반입니다. 귀문 이놈들, 완전 도둑이에요.”

팔 장로가 말했다.

몽설은 취화원 수하들에게 귀문에 맞는 호칭을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혹여 자신도 모르게 취화원 호칭이 불쑥 튀어나오면 매우 곤란해진다.

“시행 명령 내리세요.”

“네? 이걸 받아요?”

“우리가 받는 게 아니네요. 귀문이 받는 거지. 이런 거 안 받으면 오히려 이상해져요.”

“아무리 그래도…….”

팔 장로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 일은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성검문은 어떻게 됐어요?”

“성검문과 연관 있는 문파는 모조리 주시하고 있습니다. 오곡 이놈들, 정보를 보내라고 하면 바로바로 보내와요. 아걸이 오곡에 가서 단단히 겁을 준 것 같아요.”

아걸 때문이 아니다. 문주가 보내라고 죽통을 내려 보내니까 보내오는 것이다.

귀문 문주는 귀문을 공포로 지배했다.

그 점이 답답하고, 불안하다. 공포를 주던 존재가 얼굴도 비치지 않으니 더 불안하다.

‘마구영을 빨리 파악해야 해.’

귀문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 아걸에게 말했듯이 길어야 일 년이다. 취화원 살수들이 사생락을 칠팔 성만 연마해도 바로 무림에 뛰어든다.

딱 그 정도의 시간만 벌면 되는데.

“다음 청부입니다. 이것도 정신 사나워지는 청부예요.”

팔 장로가 서신을 내밀었다.

바람난 여자가 간부와 짝짜꿍이 되어서 남편을 살해해달라는 청부다.

‘……지저분해.’

몽설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이런 건 알아서 해주세요. 제가 귀문 문주도 아닌데 일일이 볼 필요가 없잖아요.”

* * *

혈검경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검 앞에 육신을 내놓는 용기다.

혈검경을 더 깊이 수련하면 같은 내용이라도 다른 뜻으로 해석되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자신을 죽이려는 검에 무방비 상태로 육신을 내놓아야 한다.

절대적인 만심(慢心)으로 유일한 검을 얻어낸다. 니환일검의 진의를 받아낸다.

무인에게 만심은 경계 대상이다. 게으른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은 절대적으로 버려야 한다.

한데 혈검경에서는 만심도 유용하게 사용한다. 제일 먼저 만심을 끌어내야 한다.

이런 무리는 일반 무학 상식에서 벗어난다.

자칫하면 정말 만심에 빠져서 거짓 니환일검과 어울리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긴다.

바싹 긴장하지 마라. 느슨해져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느슨해져야 한다.

이때, 니환일검이 선명한 붉은 색으로 일어난다.

니환일검이 움직이면 몸도 움직인다.

스읏! 슷!

검이 움직이는 대로 손과 발이 따라서 움직인다.

검초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필요한 몸짓을 검이 표현해 준다.

그대로 따라서 움직인다.

피부색이 짙은 자색으로 변했다. 보랏빛과 분홍빛이 섞인 색깔인데, 아름다운 색이기는 하지만 피부색이다 보니 마치 병자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몽설은 피부색이 자색으로 변한 것도 몰랐다.

혈검경이 육성을 넘어섰다.

팔성을 넘기면 피부는 검은색으로 변한다. 그러다가 구성에 이르면 다시 붉은색으로 돌아온다. 탁한 붉은 색이 아니라 아주 맑은 붉은 색이 된다.

“후우!”

몽설은 진기를 풀면서 눈을 떴다.

집무실은 검 자국이 가득하다.

중권에 기재된 초식들이 기둥을 할퀴고, 탁자를 가르고, 꽃병을 잘라냈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아직 멀었어.’

몽설은 고개를 내둘렀다.

혈검경을 펼치되, 베어야 하는 것과 베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의식을 놓고 무의식으로 펼치되, 사물은 뚜렷하게 구분해야 한다.

몽설은 아직 그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

혈검경 중권에 있는 초식만 펼치면 의지대로 펼칠 수 있다. 하지만 하권의 조정을 받으면 이런 식이 된다. 결국에는 넘어서야 할 장벽이었다.

‘모두 잘하고 있을까?’

문득, 몽설은 사자(師姉), 사매(師妹)가 궁금했다.

취화원은 동문끼리도 사자라거나 사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 살수일 뿐이다. 하지만 같은 화원에서 꽃을 가꾸다 보면 서로를 한 사람으로 알게 된다.

취화원 살수 아홉 명은 한솥밥을 먹은 자매다.

모두 죽고 아홉 명만 남았는데…… 그러니 더 소중하고 애틋하다.

‘사생락이 칠 성 이상은 되어야 해. 그래야 도망이라도 갈 수 있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성검문이나 풍도곡을 상대할 수 있는 살법이 아니다. 그들로부터 도주할 수 있는 은신술이다. 몸뚱이 하나만 안전하게 건사해달라는 거다.

몽설은 눈을 감았다.

진기를 휘돌려 상궁에 밀집시킨다. 니환일검을 일으킨다. 그리고 움직임을 지켜본다.

* * *

“휴우! 이거 치우기라고 해야지, 발 디딜 곳도 없어요.”

팔 장로가 잔소리했다.

집무실은 폐가나 다름없다. 부서지고 깨진 집기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널브러져 있다.

“또 청부예요?”

몽설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네. 웬만한 건 제가 처리하고 있는데…… 이건 보셔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팔 장로가 서신을 내밀었다.

몽설은 무심히 서신을 받아서 펼쳤다.

- 특청(特請). 무당(武當) 장로(長老) 청암(靑菴) 사(死).

서신에 적힌 내용은 다른 청부와 크게 달랐다.

다른 청부 건에는 ‘특청’이라는 말이 없다. 또 살해해 달라는 인물이 무림 거물도 아니다.

무당파 장로 청암도인을 죽이라는 청부는 그야말로 무림이 발칵 뒤집힐 대사건이다. 쉽게 받아들일 청부가 아니고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하는 사건이다.

그런 사건인데도 청부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왜 청암도인을 죽이려고 하는지, 청부자는 누구인지, 청부대금은 얼마인지 구체적인 내용이 모두 빠져있다.

“청부자는 누구예요?”

“그게…… 청부자가 없습니다.”

“없어요?”

“특이한 건, 이 청부는 수로를 통해서 들어온 게 아니에요. 제사곡을 통해서 접수되었어요.”

“인편으로?”

“네.”

‘문주다!’

몽설은 반짝 눈빛을 빛냈다.

일반 청부는 모두 수로를 통해서 접수된다. 인편으로 접수되는 청부는 없다.

그래서 서두에 ‘특청’이라고 기재한 것인가?

“사곡 곡주를 바꿔야겠네요.”

팔 장로는 몽설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네. 바로 인편을 쫓아가 보겠습니다. 이 줄 끝에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죠.”

“아뇨. 이 일은 정랑에게 맡겨야겠어요. 아무래도 일이 커질 것 같아요.”

“이 청부는 어떻게 할까요?”

“영문도 모르고 무당 장로를 죽일 수는 없죠. 일단은 보류하세요. 보아하니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사곡 곡주를 데려올 건데, 오늘 안에 입을 열게 해야 돼요.”

몽설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버린 신경을 풀었다.

니환일검의 시작은 만심에서 시작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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