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第十八章 청부 외 살인 (5)
사곡주가 침루액을 견뎌낼 줄은 전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곡주나, 다른 두 명 중 한 명이라도 살려두는 것인데.
아니, 살려놔도 소용없다.
그들도 침루액을 이겨낼 것이 분명하다.
변형된 일홀도!
부곡주와 다른 두 명이 사용한 검초는 분명히 도초였다. 변형된 일홀도다.
일홀도는 형식이 없다. 자유분방하다. 하지만 그들이 펼친 일홀도는 수련하기 편하도록 초식 형태를 띠었다.
감각을 깨우치기는 무척 어렵다. 평생을 수련해도 잘 안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초식 형태로 무공을 가르치면 쉽게 배운다. 초식을 수련하면서 감각도 예민해진다.
타고난 무인이 아니더라도 무공을 수련하면 어느 정도 뛰어난 싸움꾼이 된다.
부곡주와 두 무인은 후자로 길러졌다.
‘그때 그놈들이었어.’
아걸은 이런 무공을 본 적이 있다.
취화원 살수들을 거침없이 베던 자들이 꼭 이런 무공을 썼다.
그렇다면 귀문은…… 사형과 연관이 있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서 몽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사곡을 더 뒤져보고, 무엇인가 꼬투리라도 잡으면 그때 말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
아걸은 탄식했다.
조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곡 한구석에서 수로를 발견했다.
중요하거나, 비밀스럽거나, 위급할 때는 수로를 통해서 보고가 이루어지는 듯하다.
자신이 사곡을 들이칠 때, 그 사실도 이미 보고되었다.
사곡은 더 뒤질 필요가 없다.
누가 손을 댔든 꼬투리가 잡힐 것들은 남김없이 치워졌다.
이들이 손을 쓰지 못할 만큼 급하게 들이쳤지만, 그래도 죽통에 밀서 한 장 넣을 시간은 충분했다.
아걸은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보고가 이루어졌다면 당장 사형이 달려올 것이다. 아니, 아닐 수도 있다. 삼군이 죽을 때, 그 자리에 사형이 있었다. 하지만 나서지 않았다.
자신이 성검문을 상대로 싸우는 게 풍도곡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성검문이 들이친다.
‘동석……!’
우습게도 취화원 살수들의 안위는 동석에게 달렸다.
* * *
“물길?”
“그렇습니다. 육곡에 있는 물길 외에 사곡에도 하나가 더 있었는데, 또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까?”
“없어.”
동석이 잘라 말했다.
“사곡에 수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로로 빠져나간 죽통은 없었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아걸이 놀라서 말했다.
“킥킥! 육곡과 사곡의 물길은 내가 다 감시하고 있지. 오가는 죽통은 중간에서 빼돌릴 수 있어. 그 물길들, 일단은 이곳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거든.”
동석이 만든 지 얼마 안 되는 연못을 가리켰다.
“저기 저 구멍. 저게 사곡에서 나오는 물길이야. 일단 이리로 물길을 돌렸다가 다시 내보내는데, 오늘은 나간 게 전혀 없어. 킥킥! 그놈들, 내가 이런 작업을 한 줄도 몰라.”
“오늘 나간 게 없다면 전에는 나간 게 있습니까?”
“네 번 정도 흘러나갔지.”
“네 번이요?”
“모두 염라전에 보고되는 것 같아서 일일이 말하지는 않았는데, 베껴 놓은 것은 있어. 볼래?”
“보여주세요.”
아걸은 활짝 웃었다.
몽설은 동석이라는 보배를 얻었다.
동석은 아버지의 재능을 남김없이 물려받았다. 기관, 토목, 건축에 탁월한 지식을 가졌다.
몽설 곁에는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아걸은 동석이 가져온 종이들을 하나씩 들춰봤다.
밀서는 밀마(密碼)로 적혀 있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동석도 베껴 놓기만 했지, 풀이는 하지 못했다.
도대체 마구영이 누구이기에 이토록 완벽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만약, 만약 성검문에게 공격해 온다면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아걸은 그 점이 가장 염려스러웠다.
“허루나 이틀? 그 이상은 무리야. 그래서 생각한 게 있는데, 잘 되면 도주는 할 수 있을 거야. 공사 기간은 대략 반년.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니까.”
‘반년. 너무 오래 걸린다.’
구절곡은 반년이나 편히 있을 만큼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원래는 일 년 정도 무공수련을 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매일 가슴 졸이는 나날이 된다.
“기관을 설치하는 겁니까?”
“어딜! 기관은 대대적인 공사야. 인부도 많이 써야 하고, 돈도 엄청 들고. 여긴 겨우 함정 몇 개 더 설치하는 수준에서 그쳐야지. 계곡 자체가 험해서 그걸로 충분해.”
“고맙습니다.”
아걸은 일어섰다.
사곡에서 오늘 밀서가 나가지 않은 사실을 확인한 것만도 대단한 수확이다.
‘풍도곡을 다녀와야겠어.’
아걸은 결심을 굳혔다.
몽설에게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말하면 틀림없이 같이 움직이자고 할 여자다.
“엇!”
무심히 육곡을 향해 걸음을 걷던 그는 문득 한 생각이 들어서 우뚝 멈춰 섰다.
풍도곡을 왜 가려고 하나? 몽설이 염려스러워서다.
혼자 몸이라면 성검문이 공격해 오든 사형들이 달려들든 아무 상관하지 않는다.
사곡을 왜 그토록 열심히 뒤졌나? 몽설에게 해가 될 것이 있을까 해서다. 부곡주와 두 사내가 일홀문의 칼을 쓰자, 단박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동석에게는 왜 고맙다고까지 말했나?
아걸은 동석이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 동석은 엄연히 몽설에 포섭해 온 사람이다. 그는 기관진학의 달인이다. 또 그 재주를 몽설을 위해 쓰고 있다.
그게 왜 고맙나? 몽설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이 몽설에게 맞춰져 있다.
아걸은 계곡으로 걸어가서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흘러가는 계곡물을 쳐다봤다.
몽설이 어느덧 가슴에 들어와 버렸다.
사부가 남긴 딸 정도로 여겼는데, 잘 돌봐줘야 할 여동생쯤으로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꼬였다.
자신은 여자를 만나면 안 되는 운명이다.
원래 일홀도를 가진 사람은 거의 같은 생각을 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천하제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는 연승(連勝)하며 승승장구할 수 있지만, 반드시 임자를 만나게 된다.
이게 세상이다.
일홀문주 서른여섯 명 중 서른한 명이 제명에 죽지 못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어 보이는 일홀도의 주인들이 실수든 아니든 타인에게 목숨을 잃었다.
사부도 허도기에게 죽지 않았나.
서리형개도, 서리가헌도 혼인하지 않고 칼을 닦는다.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칼을 수련한다. 평생 칼만 수련하다가 칼에 맞아 죽는다.
이것이 일홀도 주인의 운명이다.
더욱이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철벽 앞에 서 있다.
실제로 서리형개에게는 죽기 직전까지 치몰렸다.
여인을 만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정혼을 했다고 하니 정말 혼인이라고 하게 될 줄 알고 마음에 품은 것인가?
“아,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아걸은 불쑥 탄식을 쏟아냈다.
몽설은 아름답다. 세상에는 많은 여인이 있지만 어떤 여인도 몽설을 넘어서지 못한다. 몽설은 현명하다. 원주가 된 후에는 총명함이 지나칠 정도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다가 취화원을 중원 제일 문파로 키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미친놈.”
아걸은 또 탄식했다.
할배가 몽설을 찾겠다고 할 때만 해도 찾아서 뭐하냐고 핀잔을 주었는데, 이게 뭔가!
아걸은 할배의 음성을 들었다.
- 그렇게 불퉁거리더니 꼴좋다, 이놈아. 어째? 이제야 이 할배가 고맙지?
“아걸, 이놈아!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아걸은 손을 들어서 자신의 뺨을 두어 번 때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미 가슴 속으로 들어와 버린 여인을 떨어낼 수는 없다.
‘가라고 하는구나. 가라고.’
아걸은 바위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 * *
“꼭 나가야 해?”
“알아볼 게 있어.”
“뭔지 말해줘. 나도 여기 정보망을 통해서 알아볼게. 서로 알아보면 좋잖아.”
몽설은 예쁘지 않다. 화려하게 아름답지는 않다. 수수하다. 굳이 말하면 착한 얼굴이다.
이 얼굴이 왜 이렇게 예쁜가?
자각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는데, 알고 보니 몽설이 바로 옆에 붙어있었다.
“아니, 알아보지 마. 성검문과 관련된 일이야. 내가 조심스럽게 알아보는 게 좋아.”
“싸우는 건 아니고?”
“소축십검은 이길 수 있어.”
“한 명이면 이길 수 있지. 세 명이면 장담하지 못할걸?”
몽설이 ‘내 말이 틀렸어?’하고 말하는 듯 방긋 웃었다.
“싸울 일 없어. 염탐만 할 거니까.”
아걸은 일부러 풍도곡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몽설은 자신이 사형에게 당하는 모습을 봤다. 그러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풍도곡 말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것이다.
성검문에는 가지 않는다. 구절곡을 벗어나는 즉시 풍도곡으로 향한다.
“다녀와. 그동안 나도 혈검경을 십분 수련해 놓을게. 지금 같아서는 도움도 안 되잖아.”
“날 도와주려고?”
“잘나나 못나나 내 정혼자인데 어쩌겠어? 내가 도와야지.”
“뭐? 하하하! 하하하하!”
아걸은 마음껏 웃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애써서 ‘여동생이 하는 말’로 돌려버렸겠지만, 지금은 정혼녀가 하는 말로 받아들인다.
어차피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어쩌면 오늘 나눈 대화가 이승에서 나누는 마지막 대화일 수도 있다.
일홀문도는 항시 떠날 준비를 한다. 칼을 뽑을 때는 이승에 남겨둔 것이 없어야 한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칼이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이건 기우인데, 혹여 성검문이나 풍도곡에서 공격해 오면, 싸우지 말고…….”
“걱정하지 마. 그 사람들하고 어떻게 싸워? 도망가기 바쁘지. 도망이나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목장께 들렀다가 오는 길이야. 지금 상태로도 이틀은 견딜 수 있을 거라니까, 싸우지 말고 도주해.”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런데 오늘 참 이상하다? 다른 때 같지 않아. 다정한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철이 좀 들었나? 자기 여자 아껴주는 법이라도 배운 거야?”
“실없는 소리.”
아걸은 일어섰다.
“여기 걱정은 말고 잘 다녀와. 싸움은 무조건 피하고.”
몽설이 걱정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 * *
아걸은 곡구를 향해 걸었다.
숨어서 지켜보는 눈이 많다. 모두 뒤통수를 쳐다본다. 그의 등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가슴에 귀면이 그려진 갈색 무복은 오직 호신육위만 입을 수 있다. 그리고 호신육위는 염라전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같은 귀문이면서도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호신육위가 버젓이 대낮에 걸어 나가는 일이 신기하기도 할 것이다.
‘그것참…… 어떻게 바꿔치기할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귀문 같은 문파를.’
생각할수록 대담한 계획이다.
취화원이 미지의 인물들에게 공격을 받자 바로 이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인데, 임기응변이 보통 아니다.
다른 때 같으면 질책을 해야 할 일도 지금은 마냥 좋게만 보인다.
지금은 그렇다. 몽설이 뭘 해도 현명하게, 뛰어나게, 예쁘게 보일 것이다.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을 해도 용감한 여인으로 보일 터이다.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아걸은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모든 인연은 구절곡에 놓고 간다.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몽설에 대한 기억도 떨궈낸다. 몽설과 있었던 모든 일을 묻는다.
칼, 칼, 칼!
오직 칼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