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93화 (93/600)

#93화. 第十九章 사도(死刀) (3)

“……나타났다!”

이군 초가평은 밀서를 와락 움켜쥐었다.

아걸을 찾지 못해서 고민이 꽤 깊었다.

무림에 삼군과 팔군의 죽음을 공표했는데, 흉수를 잡지 못해서 사인을 두루뭉술 말해야만 했다.

아걸을 잡을 수 있다면 흉수가 아걸이라고 단정을 지어서 공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추격조차 하지 못하니 언제 잡는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나.

흉수를 알면서도 잡지 않는다면 그것도 성검문의 수치다.

결국, 아걸을 암살자가 아닌 ‘암살 관여자’라는 말도 안 되는 죄명으로 지명수배했다.

서리가헌은 아걸이 일체잠행으로 잠적했기 때문에 추격 단서를 잡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전부 믿은 것은 아니지만, 아주 많이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을 한 사람이 서리가헌이다. 그가 한 말은 믿어도 된다. 그는 칼과 입으로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다. 칼은 언제나 정직하다. 베는 것이 가능하면 이긴다. 벨 수가 없다면 죽는다. 아주 간단하다. 여기에 어디 거짓이 있나.

이건 이군의 생각이 아니다. 서리가헌의 말이다.

칼이 정직하다면 굳이 입으로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 벨 수 있는 자는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다.

일체잠행이라는 수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도 세상에서 완벽하게 증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흔적이라도 남길 것이라고 봤다.

허나 아걸은 아무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다시 나타났다. 진령산맥에서.

“아걸이 진령에 나타났다.”

“우리에게 내린 명령, 아직 유효합니까?”

구군 호금연(湖金蓮)이 말했다.

“유효하니까 불렀지.”

“가죠.”

호금연이 벌떡 일어섰다.

“기다려. 사제와 십제도 데려간다.”

“우리 둘이면 되지 않나요?”

“둘이면 평수(平手), 셋이면 이긴다. 넷이면 어떤 짓도 할 수 있지. 난 그놈을 서리가헌 수준에 놓고 말하는 거야.”

“그놈이 그 정도로 강합니까?”

“대산방이 막고 있는데, 역부족일 것 같다. 인근 여섯 문파에 협조문을 보냈다. 지금쯤 받아봤겠지.”

“음……!”

호금연이 침음했다.

대산방 문도는 거의 오백여 명에 이른다.

인근 여섯 개 문파에 협조문을 보냈다면 대략 이백 명 정도가 추가된다.

근 일백 명이 놈을 에워싼다.

칠백 대 일.

놈이 천신이라고 해도 이길 수 없다.

대산방이나 여섯 개 문파가 야비하게 싸우지 않고, 정공법으로 맞선다고 해도 힘들다.

그들을 모두 베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여 명 정도까지는 기세 좋게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후에는 진기가 뚝 떨어진다. 몸이 느려지고, 감각이 둔해진다. 결국, 상처를 입게 된다. 출혈이 생기면 기력은 빠르게 소진된다. 악화가 반복된다.

하지만 변수가 있다.

상처 입은 맹수는 끝까지 싸우지 않는다. 일단 몸을 빼낼 수 있으면 빼낸다. 어떤 맹수도 마찬가지다. 본능적으로 안전부터 추구하고 본다.

만약 서리가헌이 몸을 빼내고자 한다면 대산방이 막을 수 있을까?

막지 못한다. 상처를 심하게 입은 상태라고 해도 일홀도는 여전히 날카롭다. 악착같이 막아서려고 한다면 희생만 늘어난다. 결국은 막지도 못하면서.

대산방과 여타 문파는 놈을 잡고 있어야 한다.

“사사형과 십제는 어디 갔는데 이렇게 안 옵니까?”

“심부름시켰다.”

초가평이 짧게 말했다.

곧, 사군 진개(塵芥) 이뢰(李牢)가 마차를 가져왔다.

“내가 직접 살펴보고 가장 튼튼한 것으로 가져왔어.”

마차는 굉장히 컸다. 보통은 사두마차를 사용하는데, 팔두가 아니면 끌지 못할 것 같다.

“너무 큰 것 아닙니까?”

호금연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안을 보고 말해.”

그 말에 호금연이 마차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마차 안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호사스러웠다.

의자에 깔린 것은 곰 가죽이다. 바닥에도 양털 가죽이 푹신하게 깔렸다.

바닥, 의자, 어디에 드러누워도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흠! 좋네요.”

어지간해서는 감탄을 하지 않는 호금연이지만 지금만큼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군 이뢰는 이런 일을 무척 잘한다.

누가 일을 저질렀든 깨끗이, 뒤탈이 없도록 말끔하게 정리한다. 오죽하면 진개(쓰레기)라고 불리겠는가. 사람이 진개라는 말이 아니라 진개 처리를 잘한다는 뜻이다.

잠시 후, 십군 이도창이 왔다.

“풍도곡에 전서를 보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해놓았습니다.”

그가 이군 초가평에게 보고했다.

“문주님 이름으로?”

“네. 그놈들이 문주님 이름 아니면 듣기나 하나요.”

“그래.”

초가평이 말했다.

아걸은 진령 부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초가평은 이 사건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걸은 감쪽같이 숨었다. 일체잠행인가 뭔가 하는 수법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놈이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났다.

어떤 큰일을 벌인 것도 아니다. 겨우 객잔에 투숙하다가 점원에게 발각되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 우연이 아니다. 풍도곡에 있는 서리가헌이나 서리형개에게 전하는 전언(傳言)이다.

우리 만나자!

초가평은 그렇게 판단했다.

아걸은 사형들이 풍도곡에 있다는 것은 알지만, 풍도곡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풍도곡을 샅샅이 뒤지려면 젊은 시절을 다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극단적인 방법을 쓴 것이다.

일단은 풍도곡을 묶어둘 필요가 있다.

그들이 나서면 아걸은 죽는다. 살 방법이 없다. 성검문이 손 쓸 기회도 잡지 못한다. 놈을 산 채로 잡아 와야 하는데, 시신밖에 보지 못한다.

풍도곡은 움직이지 마라!

문주의 이름으로 전서를 보냈으니, 오늘 저녁 이후부터는 움직이지 못한다.

“가자!”

초가평이 먼저 마차에 올랐다.

“끼럇! 끼럇!”

마부가 연신 채찍을 휘둘렀다.

팔두마차는 관도를 거침없이 질주했다.

관도 통제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사전에 연락받은 문파들이 관도를 장악하고 길을 열었다.

팔두마차는 아무도 없는 길을 냅다 치달리면 된다.

“놈이 정말 일홀도를 얻었을까?”

구군 호금연이 말했다.

“조용. 운기해라.”

초가평이 즉시 대화를 차단했다.

아걸에게 빨리 가려면 마차보다는 말을 타는 게 훨씬 빠르다. 하지만 말을 타면 체력이 축난다. 이동하면서 체력을 쓰는 것처럼 미련한 짓도 없다.

마차를 타고 최대한 힘을 아끼면서 이동한다.

마차 안에서 운기조식을 취한다. 잠도 푹 잤고, 식사도 좋은 것으로 먹는다.

말과 마부는 한 시진마다 교체한다.

마차는 하루 십이시진 쉬지 않고 내달리겠지만, 마차에 탄 사람은 전혀 피곤하지 않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 뻐근해서 기지개를 켜야 할 것이다.

반면에 아걸은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못한 채 칼을 휘둘러야만 한다.

이군은 할 수 있는 바를 모두 하고 있다.

구군 호금연도 이군의 생각을 알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차분히 운기를 시작했다.

“교대하겠습니다.”

새로운 마부가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말하는 여유조차 아낀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걸을 잡아 와야 한다.

“여기.”

마부가 마차 안으로 서신을 들이밀었다.

진령에서 끊임없이 소식을 보내오고 있다.

대산방은 무척 힘든 싸움을 하는 중이다. 아걸을 하루 반 동안 잡아놨지만, 대가는 아주 혹독했다. 대산방 문도 중 절반이 칼에 맞았다.

부상자는 없었다.

아걸의 칼에 맞으면 즉사다. 살지 못할 곳만 골라서 후려친다는 느낌마저 든다.

아걸은 도주할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칼을 쓰고 있었다.

“빨리!”

초가평은 진령에서 온 서신을 읽은 후,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놈이 버티고 있을 때 잡아야 한다. 만약 놈이 한계까지 왔다고 느낀다면 몸을 빼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느낌이지만…… 그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초가평은 마음이 급해져서 소리를 지른 것이다.

* * *

“저놈이니?”

“네.”

“칼이 쓸 만하네.”

“그사이에 또 발전했네요. 내 칼에 맞았을 때보다 훨씬 빨라졌어요. 무섭게 크고 있네요.”

서리가헌과 서리형개가 나란히 서서 아걸을 지켜봤다.

“칼은 날카로운데 두서가 없잖니.”

서리가헌이 고개를 내흔들었다.

“어라? 호흡도 끊기네? 저놈 저거…… 내가 사형이라면 한 수 가르쳐줄 텐데, 안됐구만. 저것보단 훨씬 빨리 쓸 수 있을 텐데. 안 그러니?”

“그렇습니다.”

“너 요즘 헛짓거리하니?”

“……네?”

“하지 마라우. 조용히,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야. 알았니?”

“네.”

“술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게 아주 좋군. 술 내오라우. 오랜만에 한잔 빨자.”

서리가헌이 풀밭에 앉았다.

서리형개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가져온 술 단지를 내밀었다.

서리가헌이 뚜껑을 확 열고 술 단지에 얼굴을 들이박으며 냄새를 맡았다.

“카아! 좋군.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취기가 올라. 너 혹시 여기 독 풀었니?”

“사형.”

“농담이다. 농담. 농담도 못 하니?”

서리가헌이 술 단지를 들고 입에 틀어넣었다.

콸콸콸콸!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들이붓는다. 물이 흘러가듯이 목구멍 속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서리가헌은 술 단지를 반쯤 비운 후, 입에서 뗐다.

그는 아걸을 쳐다봤다.

아걸은 들개 떼를 몰아붙이는 맹수다. 지치고, 피도 흘리고 있지만, 여전히 사납다.

“저거 봤니?”

“네? 뭐 말입니까?”

“눈깔 크게 뜨고 잘 보라우.”

서리형개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아걸을 쳐다봤다.

“후후! 후후! 재미있네, 저놈.”

서리형개가 웃었다.

“봤니?”

“……재미있군요.”

“저놈, 진짜 이름 모르니?”

“모릅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성은 서리 씨가 맞다. 서리 뭐시기가 맞아. 후후! 그 늙은이, 기어이 제자 한 명 받았네.”

서리형개는 대꾸하지 않고 아걸의 칼을 봤다.

아걸은 여전히 조잡하다. 여러 칼을 섞어서 사용하는 관계로 호흡도 끊긴다. 두서도 없다. 강함과 빠름과 변화가 중구난방으로 섞여서 터진다.

하지만 한 가지, 떨림이 일어난다.

어떤 칼이든 떨림이 섞여 있다. 그리고 그 떨림은 순간적인 빠름 속에서만 일어난다.

두 눈 부릅뜨고 쳐다봐도 찾지 못할 변화다.

서리형개는 이런 칼을 본 적이 없다. 무림사에 이런 칼이 있었다는 글귀도 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걸이 깨달은 칼이다.

놈이 일홀도를 가졌다!

동박은 이십여 년을 수련했어도 갖지 못한 자신만의 칼을 아걸이 가졌다.

“후후! 재미있는 칼이네.”

서리형개가 입술을 비틀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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