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96화 (96/600)

#96화. 第二十章 서리(徐離) (1)

소축십검은 포식자다.

배고픈 포식자를 떼어버리고 도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가 비등한 상태였어도 도주할 수 없는데,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는 더더욱 도주할 수 없다.

아걸은 도주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도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콱 박아놓았다. 너무 힘들면 자신도 모르게 ‘도주하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게 되는데, 그런 마음마저 깡그리 털어냈다.

숲으로 치달린 것도 도주하려는 게 아니다. 합공에서 빠져나와 숨을 돌리려는 생각이었다.

쒝! 쒝!

삼점동파가 날아왔다.

이제는 성검문 검초를 보면 어떤 검초인지 알 수 있다.

할배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도 있고, 직접 몸으로 겪은 것도 있다.

검은 한 자루인데 노리는 부위가 어딘지 모르겠다. 세 곳 중 한 곳인 것 같은데.

아걸은 반철도를 세워서 초가평을 겨눴다.

칼과 초가평을 일직선으로 잇는다. 초가평이 이환보를 밟으며 어지럽게 움직이지만, 형체를 놓치지 않는다. 일직선을 끝까지 유지하며 지켜본다.

팟!

아걸이 화살처럼 퉁겨 나갔다.

탄궁도다. 찌른다, 벤다는 생각은 없다. 생각 자체가 죽었다. 칼을 목표물에 갖다 붙인다. 쭉 이어진 일직선을 가장 빠르게 움직여서 칼을 붙인다.

까앙! 퍼억!

초가평이 반철도, 탄궁도를 받아냈다. 동시에 검을 휘둘러서 옆구리를 긋고 지나갔다.

“크윽!”

아걸은 비명을 흘렸다.

초가평은 검을 묘하게 휘둘렀다. 검이 살에 닿는 순간, 반월 형태를 그리며 위로 솟구쳤다.

검이 아랫배로 들어왔는데, 등 뒤 어깨뼈 밑까지 쭉 그어졌다.

‘역시!’

아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것이 소축십검과는 항상 몸이 좋지 않을 때 싸운다. 그래서 수련한 무공조차도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

그러니 늘 이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일홀도가 능숙하게 펼쳐지지 않는다. 평소에도 가끔 호흡이 막힌다고 생각했는데, 실전에서는 그런 현상이 명확하게 일어난다.

대산방과 싸울 때는 전혀 몰랐다.

소축십검과 싸우자, 단박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주눅 들린 사람처럼 칼이 제대로 그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나빠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소축십검에게는 일홀도가 잘 통하지 않는다. 통해도 매우 힘들게 통한다.

휘릭! 슷!

반철도를 허공에 크게 휘둘렀다.

칼과 몸의 감각을 다시 일깨운다. 칼이 몸에 붙어 있다는 일체감을 느낀다.

타타타탁!

초가평이 달려온다. 검은 이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검에서 환한 빛이 번져 나온다.

‘우중광류(雨中光流)!’

폭우 사이를 뚫는 빛줄기다. 빗방울이 닿을 틈을 주지 않고 찔러내는 쾌검이다.

할배는 조명천검 중에서도 검에서 빛이 뿜어지는 우중광류는 특히 조심하라고 했다. 빛을 보는 순간 눈이 멀고, 눈을 감았다 싶으면 심장이 화끈거린다고.

초가평은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살려서 데려가려는 게 아니라 이 자리에서 죽일 생각이다.

아걸은 일홀도를 펼치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얼른 수신도를 떨쳐냈겠지만, 지금은 멍하니 빛줄기만 쳐다봤다.

네 명에게 합공을 받을 때와 같은 모습이다.

쒝!

검 끝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린다. 이마 정중앙을 물겠다고 확 달려든다.

꿈틀!

반철도가 미미한 떨림을 일으켰다.

순간, 아걸의 신형이 촌각쯤 밀려 나갔다. 아주 조금,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움직였다.

몸도 움직이고, 칼도 움직였다.

페엑!

우중광류가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아걸은 즉시 반철도를 떨쳐냈다. 하지만 초가평은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훌쩍 물러나서 피했다.

“사술(邪術)!”

초가평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때, 진개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같이 신형을 날렸지만, 초가평이 훨씬 일찍 도착했다.

진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두 초식이나 교환한 후였다.

두 사람의 공방은 그만큼 빨랐다.

“사술이야!”

“봤어요.”

진개가 알고 있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우중광류는 빗나갈 수 없었다. 빗나갈 틈이 전혀 없었다. 정확하게 이마에 꽂혔다.

그런데 기름 더미에서 넘어지듯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검이 닿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분명히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미끄러졌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이도창이 무너질 때도 이런 초식이었다.

분명히 다리를 잘랐다고 생각했는데, 검이 미끄러지면서 허벅지를 찔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경험을 했다.

그때 아걸이 반격을 취했다.

하필이면 이도창이 가장 깊숙이 들어갔고, 반철도가 움직이는 길목에 섰다.

이도창이 아니라 다른 사람 누구라도 죽을 수 있었다.

“일홀도라고 말하지 마라. 뭐냐?”

진개가 물었다.

“일홀도.”

아걸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일홀도라고 말하지 말랬지!”

“하하! 하하하하!”

아걸은 느닷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웃었다.

이 순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일홀도? 특별한 칼이 아니다.

자신만의 칼을 찾아라. 그러면 서리 성씨를 주겠다? 웃기는 말장난이다. 자신만의 칼을 찾았다는 것은 칼을 쓰는 데 능숙해졌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가장 자신 있는 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쓸 수 있는 칼이 일홀도다.

공부 허도기는 일홀검을 가졌다.

소축십검도 일홀검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들은 지금 흔들리고 있다. 지금까지 나타난 적이 없는 칼을 보고 어떤 공격을 해야 할지 망설인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검법을 구사할 수 있다면 일홀검을 가진 것이다.

마지못해서, 아는 것이 조명천검밖에 없어서 조명천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조명천검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때 일홀검이 된다.

일홀도라고 별건가? 칼을 쓰면 일홀도고, 검을 쓰면 일홀검이다.

전대 문주의 무공 서른여섯 개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한다고 해서 일홀도를 얻은 게 아니었다.

그분들은 자신의 무공을 자신 있게 펼쳤다.

자신은 서른여섯 가지 일홀도를 알고 있었지만, 어느 한 가지도 자신 있게 펼치지 못했다.

그래서 호흡이 막혔다. 칼이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사람을 계속 죽이다 보면 일홀도를 얻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

전쟁터에서는 이기고 진다는 개념이 없다. 자신이 어떤 검초를 알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무작정 싸운다. 적이 오면 그냥 부딪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칼,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칼을 얻으면 그게 일홀도인 것이다.

대산방과 싸울 때, 그랬다.

당시는 전대 문주의 일홀도를 사용했지만, 자신의 무공처럼 자신 있게 펼쳤다.

그 당시만은 자신이 펼친 모든 무공이 일홀도였다.

일홀도를 알았다.

일홀도가 무엇인지 안 것과 일홀도를 구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일홀도를 얻는 일은 앞으로도 꾸준히 해나가야 할 숙제다. 어쩌면 평생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았다.

이걸 진작 알았다면 대산방과 싸우지 않았을 텐데. 모습을 드러내어 세상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더라도 사람을 덜 죽이는 방향으로 유도했을 텐데.

아니,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죽음의 칼을 들었다.

이 칼은 한 번 들면 영원히 떨치지 않는다.

아걸 앞에 나서는 모든 사람이 아걸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 살기 위해서 상대를 죽여야 하고, 죽이면 죽일수록 악명은 높아진다.

아걸은 칼을 들었다.

“고맙다.”

느닷없이 불쑥 말했다.

“이 자식이!”

진개가 눈살을 확 찡그렸다.

아걸의 말이 꼭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니, 진짜 고마워.”

스읏!

아걸은 반철도를 들어 올렸다.

원래 무인 간에는 문답무용(問答無用), 말 대신 병기로 말해야 한다. 특히, 적으로 마주 섰으면 이기고 나서 무슨 말이던 해야 한다. 지면 모든 말이 허언이 된다.

쒝!

이번에는 아걸이 먼저 공격해 들어갔다.

칼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쳤다.

손목의 움직임을 극대화해서 만변(萬變)을 일으키는 칼, 만완도다.

초가평과 진개는 즉각 반격했다.

그런데 검법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다. 단지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음흉하다.

‘암리(暗理)!’

검초 속에 숨은 의도가 있다.

조명천검의 진수, 조명십해가 펼쳐진다.

촤라라라락!

초가평의 검이 부챗살처럼 확 펼쳐졌다. 순식간에 검이 스무 자루로 늘어갔다. 검속이 너무 빨라서 잔상이 지워지지 않고 검이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진개의 검은 숨었다.

그는 아예 검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초가평을 따라오기만 하는 것 같다. 아니다. 그도 검초를 펼쳤다. 직사광류, 한 줄기 검선이 쭉 그어진다.

아걸은 반철도에 힘을 모았다.

천근의 압력으로 두 검을 쪼개간다. 하나는 빠름이고, 하나는 변화다. 그러면 힘으로 짓누른다.

천력도가 천근 바위의 힘으로 내리쳐졌다. 그때,

쩌쩌쩌쩌쩍!

등 뒤에서 그물 펼쳐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호금연, 그는 공격 시기를 매우 잘 잡았다.

초가평이 연환검(連環劍)을 펼쳤다. 진개가 직사광류를 전개했다. 그들 검에 아걸은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안 되기 때문에 즉각 대응했다.

그 순간, 호금연이 다가왔다.

호금연은 암수를 펼칠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확실하다. 합공은 해도 암수는 사용하지 않는다.

성검문 보법 중에는 유사보(油砂步)가 있다.

모래 위에서 보법을 수련하는데, 능숙해지면 마치 기름 위를 흘러가듯이 걸을 수 있다.

유사보를 펼치면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는다. 검기를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자신이 구사하는 퇴빙을 이들도 구사한다.

퇴빙으로 검초를 펼쳤다면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정상적인 공격이지만 암습이나 다름없다.

퍽! 쩌쩌쩌쩌쩍!

등에서 검초가 작열했다.

처음 일격은 화끈했고, 이어지는 흐름은 등을 갈기갈기 찢어대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크으윽!”

아걸은 신음을 흘리며 물러섰다. 아니, 물러선다고 생각한 순간 숲을 향해 치달렸다.

이 자리에 계속 머물면 죽는다.

이들에게 의리를 지킬 일은 없다. 정정당당한 싸움도 아니다. 죽고 죽이는 결전이다. 어떤 수단을 마련해서라도 상대방만 죽이는 되는 싸움이다.

지친 몸에 일격까지 당했으니 더 싸울 수 없다.

쒸이이이익!

아걸은 숲만 보고 치달렸다. 숲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숨을 곳은 없다. 이들은 곧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곳에서 세 명에게 포위되어 싸우는 것보다는 낫다.

쩌쩌쩌쩌쩍!

등 뒤에서 검풍이 몰아쳤다.

예상은 했지만 검기가 훨씬 강하다. 이대로 질주하면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죽는다.

아걸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산비탈에 몸을 던졌다.

데구르르르!

그는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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