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第二十章 서리(徐離) (2)
“엇! 안 돼!”
호금연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진개는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려서 있는 힘껏 신법을 펼쳤다.
쒜에에엑!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거칠게 일어났다.
아걸을 쫓아간다. 공격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막겠다는 심산이다.
초가평은 다른 선택을 했다.
‘죽여야 해!’
그는 굴러 떨어지는 아걸을 향해 검을 던졌다.
쒜에에엑!
장검이 암기처럼 쏘아졌다.
초가평 같은 무인에게 산비탈을 굴러 떨어지는 물체를 맞추는 정도는 장난에 불과했다.
그런데 맞히지 못했다.
쉿! 텅!
아걸은 그 와중에도 반철도를 휘둘러서 날아오는 장검을 쳐냈다.
진개도 아걸을 잡지 못했다. 성검문 신법 중에서 오직 질주에만 목적을 둔 풍치전주(風馳電走)를 펼쳤는데도 불구하고 아걸을 개울 앞에서 잡지 못했다.
풍덩!
아걸이 개울에 빠졌다.
진개는 개울 앞에서 멍하니 아걸을 쳐다봤다.
개울은 깊지 않다. 겨우 정강이 높이밖에 차지 않는다. 폭도 넓지 않다. 서너 걸음만 옮기면 반대편으로 걸어갈 수 있다. 얕고 좁은 개울이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아걸이 쓰러져 있다.
진개는 손을 꿈틀거렸다.
검을 쓰고 싶다. 한 번만 검을 쓰면 놈을 죽인다. 아니, 쓰러진 놈을 땅으로 끌어내고 싶다.
슷!
진개가 손을 뻗으려고 했다.
“그만!”
초가평이 만류했다.
진개는 손을 움찔거렸다. ‘그만’이라는 말을 듣고도 좀처럼 손이 거둬지지 않는다.
그때, 개울 반대쪽에서 한 사람이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래도 이군이 눈썰미는 빠르네. 내가 있는 걸 알았니?”
진개는 비로소 손을 거뒀다.
풍도곡의 주인, 서리가헌이 나타났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서리형개도 숲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이놈, 내주시겠소?”
초가평이 정중하게 요청했다.
개울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풍도곡 땅이다.
일홀문은 개울을 넘지 못하지만, 개울 건너편에서는 지지고 볶고 뭐든 할 수 있다.
아걸도 풍도곡 손에 맡겨졌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에 누워있지만, 잡지 못한다. 일홀문 허락 없이 풍도곡에 들어가면 검을 섞어야 한다. 서리가헌이 그냥 보내주지 않는다.
초가평의 말에 서리가헌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너 같으면 그러겠니? 이놈, 원칙적으로 우리가 정리해야 할 놈 아니니?”
서리가헌은 초가평에게 거침없이 하대했다.
“이놈에게 이도창이 당했소.”
“내 땅에 들어온 놈 내가 처리하겠다는데, 이도창이 죽은 것까지 알아야 하니?”
“이도창이 죽은 것은 관심 없다고 해도, 혈검경과 관계있다는 것은 알아야겠는데.”
초가평도 거칠게 말했다.
“그래서 이 안에 죽치고 가만히 있었잖니. 그러면 밖에서 처리했어야지. 이깟 놈한테 굴비 엮이듯 줄줄이 엮여서 죽임을 당하니? 그러고도 너희가 무인이니?”
초가평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삼 대 일, 아무리 일홀도라고 해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다르게 생각해 볼까? 만약에 사부가 앞에 있다면 세 명이 합격할 수 있을까?
‘……단숨에 끝난다.’
사부에게는 감히 검을 들지 못한다.
사부는 조명천검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부의 검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조명십해다.
정말로 목숨을 걸고 세 명이 연수한다고 해도 단 일 합에 나가떨어진다.
서리가헌은 사부보다 겨우 한두 수 아래다.
현 무림에서 사부를 제외하고는 최강자라고 할 수 있다. 소림사, 무당파, 청성파, 화산파 등 전통을 자랑하는 문파가 많지만, 서리가헌을 상대할 무인은 없다.
“이놈, 죽일 건가?”
“죽여야지. 우리가 살리는 것 봤니?”
“그럼 죽여라. 죽이고 시신을 넘겨.”
“명령이니?”
“명령이다. 공부의.”
“하하하! 너, 공부 이름을 언제까지 팔 거니? 공부 핑계를 대지 말고 네 검으로 짓누를 생각은 없니?”
“시신을 반드시 넘겨라.”
“알았으니까 가봐라.”
서리가헌이 물러가라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지금 죽이지 않을 건가? 기왕 죽일 거면 우리 눈앞에서 죽이지?”
호금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놈을 죽이란 말이니? 칼도 못 드는 놈을? 우리가 이런 놈 죽이는 것 봤니? 최소한 칼이라도 들 수 있어야지. 이런 칼, 오랜만에 보는데 칼맛을 제대로 봐야 하지 않겠니?”
서리가헌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미친놈!’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서리가헌은 병든 자, 상처 입은 자를 건드리지 않는다. 고수가 상처를 입었으면 치료해 준 다음에 죽인다. 정상적으로 겨룸을 한 끝에 칼로 벤다.
그러다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만약, 겨룸 끝에 자신이 죽는다면 기쁘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홀도를 넘어선 무공에 당한 것이니 억울할 것이 없다고.
그럼 공부에게는 왜 도전하지 않는가? 공부의 검공은 이미 일홀도를 넘어섰지 않은가.
- 검을 너무 잘 알면 싸우지 못한다는 것도 모르니?
서리가헌은 핑계가 참 많다.
어쨌든 서리가헌은 언젠가는 공부께 칼을 들이댈 놈이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아걸을 당장 죽이지 않을 것도 예상했다.
초가평이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지. 열흘이 됐든, 일 년이 됐든.”
“그건 마음대로 하고. 넌 일어날 수 있잖니. 왜 아직도 물속에 처박혀 있니?”
서리가헌이 아걸에게 말했다
텅!
서리형개가 작은 항아리를 머리맡에 놨다.
“목숨이 질기군.”
“……조금만 기다려. 칼 받아줄 테니까.”
아걸은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말했다.
“우린 칼로 말한다. 너도 칼로 말해. 이거 써라.”
서리형개가 작은 항아리를 툭 쳤다.
“이틀 후, 사형이 칼을 쓸 거야. 이틀 동안 할 것 다 해라. 소식 전할 데 있으면 전해도 좋다. 비밀과 안전은 보장한다. 이번만 눈감아주지.”
“이틀?”
“그래. 후후!”
서리형개가 차게 웃으며 일어섰다.
짐작대로 작은 항아리 속에는 녹선마황이 들어있었다.
일홀문도만 찾을 수 있고, 기를 수 있는 지상 최고의 금창약이 항아리 가득 들어있다.
녹선마황 한 단지면 어떤 상처라도 이틀 안에 회복할 수 있다.
서리가헌이 이틀 후에 칼을 쓰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할배가 벌여놓은 일이 바로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반드시 넘어야 할 산 중 하나.
아걸은 녹선마황을 꺼내서 상처에 붙였다.
내일이면 서리가헌과 칼을 맞대야 한다.
마음이 차분하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한 것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지게 잠만 잤다. 대산방과 싸우면서 밀어놨던 잠을 모두 꺼내서 푹 잤다.
눈을 떠보니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녹선마황을 붙였지만, 상처는 여전히 쩍 벌어져 있어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우려까지 생긴다.
걱정할 것 없다. 녹산마황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내일이면 상처가 말끔히, 거짓말처럼 나을 것이다. 상쾌한 몸으로 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몸 상태는 보나 마나 좋은 것이고, 남은 것은 칼인가?
십군을 벨 때 일홀도 손맛을 봤다.
역대 문주의 일홀도가 아니다. 지금까지 사용한 일홀도는 초식일 뿐, 일홀도라고 할 수 없다. 역대 문주에게는 일홀도였지만, 자신에게는 일홀도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일홀도는 딱 하나뿐이다.
그 일홀도 손맛을 봤다. 삼군을 벨 때 약간 느꼈는데, 이번에는 벼락에 맞은 듯 강하게 일어났다.
이군과 사군을 상대할 때도 일홀도를 느꼈다.
‘일홀도가 생겼어.’
아걸은 눈을 감고 일홀도를 상기했다.
자신의 일홀도는 무엇인가? 떨림이다.
‘떨림이 일어나는 순간, 몸도 칼도 멈췄어. 순간적인 빠름이 생겼는데, 어떻게 생긴 거지?’
자신도 모르는 움직임이 생겼다.
서리가헌은 이런 움직임을 안다. 그래서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은 모른다. 무의식중에 툭 튀어나오면 몰라도 늘 사용할 수는 없다.
일홀도를 알게 된 초기 단계다.
사부는 이쯤에서 서리 성을 하사한다.
아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사부가 지어준 서리흔이라는 이름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아니, 아직은 아냐. 아직은 건방져.’
아걸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마음이 굉장히 편안하다. 내일이면 지상 최강 무인 중 한 명과 칼을 섞어야 하는데,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담담하다.
건방진 생각일지는 모르겠는데, 지지 않을 자신도 있다.
아걸은 녹선마황을 꺼내서 상처에 붙였다.
대산방 무인들에게서는 심한 상처를 입지 않았다. 독침에 할퀸 정도가 심한 것이고, 도검에 긁힌 자국은 별로 없다. 기력 탈진이 생각 밖으로 심해서 고생했고.
소축십검과 싸우면서는 큰 상처를 입었다. 특히 초가평이 날린 일 검은 아주 심했다.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갈비뼈가 모두 잘려나갈 뻔했네. 검이 제대로 들어왔어. 손목을 틀어 올리는 변화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고.’
계속해서 상처에 녹선마황을 붙였다.
연녹색 거머리가 붉은 상처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제 잠이나 자자.’
아걸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자신의 일홀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금해 한다. 하지만 일홀도가 무엇인지 알았지 않나. 궁금하다고 해서 깨달아지지 않는다.
그러니…… 일홀도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대 문주의 일홀도를 사용하다 보니 어느덧 자신만의 일홀도가 나타났다.
앞으로도 역대 문주의 일홀도를 계속 사용하면 된다.
때가 되면 일홀도는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다.
실체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일홀도를 깨닫겠다고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일홀도를 계속 사용하다 보면 자신의 일홀도가 나타나는 횟수도 늘어난다. 그리고 언젠가는 역대 문주의 일홀도는 사라지고, 자신의 일홀도만 쓰게 된다.
이런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서리가헌과 서리형개도 이런 과정을 겪었다.
그들이 수련한 무공은 백검도다. 백검도를 사용하다 보니 자신만의 일홀도가 생겼다. 백검도를 능숙하게 사용할수록, 전혀 낯선 무공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렇게 탄생한 무공이 일탄십도요, 삼도일살이다.
그러니 사형들이 백검도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겠나. 일탄십도를 보지 말고, 일탄십도가 탄생하기까지 몇천 번, 몇만 번은 휘둘렀을 백검도를 봐야 한다.
“일어나라.”
서리형개가 아걸을 흔들어 깨웠다.
“으음!”
아걸은 일어나기 싫은 듯 기지개를 쭉 켰다.
아무 일도 없다.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편안한 일상이 펼쳐질 뿐이다.
“옷 한 벌 준비해 놨다. 일어나서 씻고, 갈아입어라.”
서리형개의 음성에서도 살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무뚝뚝한 사형이 사제에게 무심히 말하는 것 같았다.
아걸에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눈이 활짝 뜨인 기분이다.
일홀도를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세상은 완전히 달랐다.
서리형개의 담담함이 절대적인 자신감에서 생긴다는 거도 알게 되었다.
일홀도를 가진 자는 세상이 두렵지 않다.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태연할 수 있는 것이다. 일홀 무인은 그런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기 때문에 차분하고 냉담하다.
“벌써 이틀이 지났나? 그럼 일어나야지.”
아걸이 일어나 앉았다.
“사형에게 칼은 점심 후에 섞자고 전해줘요. 그래도 사형제간인데 밥 한 끼는 같이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