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第二十章 서리(徐離) (3)
처음 보는 사람과 낯선 식사를 했다.
세 사람이 밥을 먹는데, 말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 묵묵히 앞에 놓은 밥그릇만 비운다.
“사부가 널 언제 거뒀니?”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서리가헌이 물었다.
“살아계셨을 때.”
아걸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부 죽음, 봤니?”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야.”
“사부를 시해한 원수라서 이를 갈았겠구먼.”
“그렇지도 않아. 사부라고 해도 너무 어렸을 때 잠깐 만나서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아. 다만…….”
“다만?”
“어떤 식으로든 사문은 정리해야지.”
“……어린놈이 꼬박꼬박 반말하네?”
“말이 사형제지 피가 섞였나, 정이 섞였나? 원한만 얽혔으니 말투도 곱지 않지. 이해해.”
“큿큿! 재미있지 않니?”
서리가헌이 서리형개를 보며 말했다.
서리형개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입술을 비틀며 소리 없이 피식 웃었다.
“자! 대충 먹은 것 같은데, 일어설까?”
서리가헌이 손을 툭툭 털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아걸이 서리가헌을 쳐다봤다.
“사부에게는 칼을 들었으면서 공부에게는 왜 칼을 들지 않는지 궁금해.”
“얘가, 얘가……. 아픈 데를 쿡쿡 찌르네.”
“그때부터 거의 십오 년. 지금까지 칼을 들지 못했으면 앞으로도 영원히 찌그러져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소축십검을 짓누르는 정도로 만족한 건가?”
“넌…… 고양이가 늑대에게 덤비면 어떻게 되는 줄 아니?”
“고양이?”
“겨우 고양이밖에 안 되는 칼로 사부를 배신했냐, 뭐 그런 말을 하고 싶니? 아니면 ‘겨우 고양이였구나. 그럴 줄 알았다’하고 비웃고 싶니?”
“뭐 마음대로 생각해.”
“내 말이 그 말이야. 니 마음대로 생각해. 넌 네가 호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호랑이가 고양이한테 먹히면 창피하지 않겠니? 하하하!”
서리가헌이 웃으면서 일어서서 나갔다.
그는 거친 말에도 노하지 않았다. 비웃는 듯한 말을 들었어도 태연하다.
“하나만 말해주지.”
서리형개가 탁자에 저금을 놓으며 말했다.
“사형 칼을 보고 일탄십도라고 하는데, 딱 네게 해당한다. 네가 칼을 한 번 쓸 동안 사형은 열 번을 쓸 수 있어. 이겨봐라. 사형이 무릎 꿇는 모습을 딱 한 번 봤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가물가물해. 오랜만에 봤으면 좋겠군.”
서리형개도 일어섰다.
스읏!
자리에서 일어난 아걸은 반철도를 들어서 서리가헌을 겨눴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바로 당한다!
스읏!
서리가헌이 보폭을 넓게 펼쳤다.
마보(馬步)를 밟고, 칼을 가슴 앞에 수평에 세웠다. 칼끝은 아걸을 향한다.
‘저기서 어떻게?’
아걸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서리가헌의 모습은 수비식에 맞는다. 공격이 목적이라면 처음부터 마보를 밟지 말았어야 한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일탄십도처럼 빠른 도법을 펼치려면 어떻게든 보폭을 좁혀야 한다. 어떻게 하면 취하는 행동을 줄이고, 속도를 빠르게 할까를 염려하는데, 일부러 보폭을 넓히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스읏!
아걸은 잠시 머뭇거렸다.
탄궁도를 펼쳐야 하는데, 서리가헌의 모습이 너무 이상해서 칼을 쓰기가 찜찜했다. 그때,
슛!
느닷없이 눈앞에서 번갯불이 번쩍 튀었다.
‘위험!’
아걸은 즉시 뒤로 쭉 물러섰다. 한데,
찌이익!
옷 찢기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다가온 칼이 옷을 쭉 찢겼다. 가슴에서부터 허리까지 길게 찢어냈다.
“이건 예단한 결과.”
서리가헌이 칼을 빙글 돌리면서 웃었다.
아걸을 베지 못해서 옷만 찢은 게 아니다. 일부러 옷을 찢어서 경각심을 돋웠다.
‘예단!’
아걸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서리가헌의 말이 맞다. 그는 단지 마보만 보고 서리가헌이 쾌검을 펼치기 힘들다고 예단했다. 하지만 서리가헌은 마보 상태에서 번갯불 같은 쾌도를 펼쳤다.
칼에 사정을 담지 않았다면 즉사다.
서리가헌이 말했다.
“너무 싱거운 칼은 재미가 없어. 따분해서 그러는데, 좀 재미있게 놀아주겠니?”
“타앗!”
아걸은 즉시 땅을 박차고 쏘아나갔다.
탄궁도! 서리가헌의 가슴을 뚫는다.
서리가헌이 옆으로 한걸음 비켜섰다.
회선도! 몸을 빙글 돌리면서 칼을 쓸어낸다. 서리가헌을 바짝 따라붙는다.
서리가헌이 한발 물러섰다.
칼이 서리가헌의 허리춤을 스치며 지나간다. 즉시 손목을 비틀어서 위로 쳐올린다. 만완도!
서리가헌이 또 한걸음 물러섰다.
만완도로 칼의 방향을 바꾼다. 힘껏 내리친다. 천력도!
“재미없어.”
힘 빠지게 만드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동시에 능히 천근의 힘이 담긴 천력도가 기름을 후려친 듯 옆으로 미끄러졌다.
‘아!’
아걸이 탄식하기도 전, 천력도가 미끄러져 나간 사이를 비집고 칼이 쑥 들어섰다.
“훗!”
아걸은 깜짝 놀라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런데,
파파파팟! 파파팟!
칼이 눈앞에서 십변을 일으켰다. 일탄십도, 칼 열 개가 일시에 전신을 후벼 팠다.
쓰윽! 썩! 피윳!
살이 비였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일도를 맞고 힘이 쭉 빠졌다. 이도에 발이 굳었다. 삼도에 죽음을 예감했고, 사도에 넋이 나갔다.
서리가헌은 아걸이 피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일시에 십도가 휘몰아쳤다.
“훗!”
아걸은 피식 웃었다.
칼이 전신을 난타하고 있는데, 움직이지 못하겠다. 피하지도 못하겠다. 그저 멍청히 서 있는 것밖에 달리 할 것이 없다. 이미 발이 얼어붙었다.
아걸은 반철도를 툭 떨구면서 거칠게 무너졌다.
“사형답지 않군요.”
서리형개가 차게 웃었다.
서리가헌은 인상을 찡그린 채 쓰러진 아걸을 쳐다봤다.
마지막 순간, 칼을 거뒀다. 숨을 끊으려고 했는데, 목숨을 살려주는 선택을 했다.
“봤니?”
“그래서 살려준 겁니까?”
“…….”
서리가헌은 대답하지 않고 아걸만 주시했다.
십도가 터질 때, 아걸이 반격했다. 정확하게는 일탄십도가 천력도를 뚫고 들어갈 때, 반격이 터졌다.
반격은 빠르고 정확했다.
반철도가 움직인다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 내리치는 칼, 천력도만 보였다.
칼이 들어갈 때, 아걸이 꿈틀거렸다.
미미한 떨림? 일탄십도를 피할 수 없다는 두려움? 아니면 본능적인 위험 본능? 그런 떨림과 흡사한 떨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보법이 변했다.
천력도가 방향을 비틀어서 서리가헌의 손목을 쳤다.
일탄십도는 제일도가 심장을 목표로 쏘아졌는데, 살짝 빗나가서 가슴을 훑었다.
살을 찢지 못하고 옆으로 흘러간 것이다.
다행히 이도에 다리를 쳤다. 올려친 삼도는 아랫배에서 가슴까지 그었고, 사도에 머리를 빗겨 쳤다.
서리가헌의 변초는 무척 빨랐다. 아걸의 반격을 뛰어넘을 정도로 빨랐다. 그런데도 손목에 상처를 입었다. 반철도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살을 찢고 지나갔다.
서리가헌 몸에 병기를 꽂아 넣은 자가 딱 두 명 있었다.
공부 허도기와 사부.
이제 아걸이 세 번째가 되었다.
비록 앞선 두 사람처럼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을망정, 칼로 살을 찢고 피를 흘리게 했다.
아걸은 일탄십도조차 흘려보냈다.
더 많은 싸움을 하고, 더 치열한 악귀가 되면 일탄십도마저도 잡아먹을 귀신이다.
그래서 죽이지 않았다.
서리가헌이 칼을 거두며 말했다.
“데려가서 치료해.”
“이놈을 공부에게 보낼 생각이군요.”
“성검문과 티격태격하는 놈이 이놈 말고 또 있니? 그런데 왜 내가 이놈을 죽여서 남 좋은 꼴 만들어 주니. 이놈이 계속 난장을 부리도록 판을 키워줘야지.”
“그러죠.”
서리형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형의 뜻을 읽었다.
사형은 지금 공부 허도기를 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아걸을 부추겨서 성검문을 크게 흔들어 버리면, 공부도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면 아걸이 더 강해져야 한다.
지금으로는 불안하다. 그저께처럼 소축십검이 작심하고 달려들면 당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생각이고…… 제 생각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아걸을 성검문에 보내자는 것은 사형 생각이니까.
서리가헌이 말했다.
“그놈 소축십검에게 던져줘.”
“지금 이놈 무공으로는 소축십검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래도 던져줍니까?”
“왜 이래? 모르는 것처럼.”
“후후!”
서리형개는 웃었다.
아걸은 일홀도를 얻기 위해서 매우 거친 방법을 선택했다.
일홀문에서는 일홀사도(一忽死刀)라고 하는데, 달리 일홀사도(一忽邪刀)라고도 말한다.
정도가 아니고 사도다. 정상적인 수련이 아니고 사악한 수련이다. 일홀문에서조차 사도라고 표현한다.
이 방법으로 일홀도를 얻은 사람은 없다.
만약 이 방법이 통했다면, 동박처럼 일홀도를 얻지 못해서 절절매면 당장 해봤을 것이다.
일홀사도를 얻기 위해서는 전쟁터 같은 환경이 필요하다.
사람을 끝없이 죽여야 한다. 더불어서 수련자 역시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무림에서 그런 환경을 만들기가 쉽나.
모두가 이를 가는 사악한 마인이라고 해도 이십 명, 삼십 명을 죽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아걸은 후자를 선택했다.
대산방을 상대로 거칠게 싸웠다. 사백 명 넘게 죽였다.
싸움이 시작될 때만 해도 아걸이 일홀사도를 선택한 것은 몰랐다. 나중에 싸움을 지켜보다 보니 일홀도가 툭툭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알았다.
그래서 상대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소축십검과도 싸웠다.
일홀사도는 감각이 몸을 지배해야 한다.
초식을 수련해서 몸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뼛속에서 일어난 기운이 몸을 지배해야 한다. 그리고 시전자는 한발 늦게 몸이 하는 일을 알아채야 한다.
알아채서 초식으로 만들면 일홀도가 완성되는 것이고, 알아채지 못하면 사용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없는 이상한 무공이 되고 만다.
만약 일홀문도 열 명이 일홀사도에 도전한다면 열 명 모두 실패한다.
감각이 몸을 지배하는 과정을 초식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동박도 일홀사도를 생각했다. 하도 일홀도를 얻지 못하니까 다른 방법이라도 쓰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일홀사도는 포기했다.
감각을 초식으로 만든다는 것은 무리로만 가능하다. 실제로는 인간 이상의 능력을 요구한다.
아걸은 일홀사도를 선택한 이상 계속 싸워야 한다.
강한 자와 부딪칠수록 좋다. 죽음 직전까지 계속 몰려야 한다.
“그러죠. 상처가 낫는 대로 바로 던지겠습니다.”
“그리고 귀문 좀 이용하자.”
“귀문……?”
“왜? 모른다고 하게? 너 정말 나한테 이럴 거니? 귀문 문주 마구영.”
“…….”
서리형개는 미간을 확 찡그렸다.
사형이 정동에서 양성하는 무인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귀문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면 자신의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는 말이지 않나.
“날 감시했습니까?”
“하하하! 하하하하!”
서리가헌이 허리를 잡고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역시 웃는 얼굴로 서리형개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알고 공부도 알고. 소축십검을 속였다고 모두 속인 줄 아니? 쯧!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