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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99화 (99/600)

#99화. 第二十章 서리(徐離) (4)

아걸은 눈을 떴다.

‘죽지 않았어?’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일홀도는 용서가 없는 칼이다. 칼을 맞댄 자는 반드시 죽이는 흉도(凶刀)다.

아걸은 다시 눈을 감았다.

사형의 일탄십도를 떠올렸다. 무섭게 빠르고, 폭죽처럼 터져 나오던 도광을 생각했다.

그 칼은 막을 수 없다.

기회를 몇 번 더 준다고 해도 그 칼을 무너트릴 수 없을 것 같다.

일탄십도에 관한 생각은 여기까지.

아걸은 일탄십도를 지워버리고, 일탄십도 사이로 흘러 들어가던 반철도를 생각해냈다.

칼이 먼저 움직였나, 몸이 먼저 움직였나?

몸이 움직이면서 일탄십도 중 한칼을 빗겨냈다. 칼이 움직이면서 사형의 손목을 찢었다.

사형의 칼보다 자신의 일홀도가 더 중요하다.

일탄십도는 잊어도 좋지만, 자신의 칼만은 반드시 생각해내야 한다. 재현할 수 있어야 하고, 능숙하게 다를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한 평생 같이 갈 칼이다.

‘그 칼이 또 나왔어. 그럼 앞으로도 또 나올 수 있다는 말. 이미 내 몸에 붙기 시작했다는 건데…….’

아걸은 일홀도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원래 일홀도는 이런 식으로 생기지 않는다. 사형들은 기본 틀부터 잡았다. 정상적으로 일홀도 수련을 하면 기본 틀이 먼저 생성된다. 그리고 점점 발전시켰다.

자신은 일홀사검을 통해서 일홀도를 얻었다.

기본 틀이 생성되기 전에 감각부터 일으켰다. 감각이 일어나고, 몸이 따라간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자신이 펼친 칼조차 기억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진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자. 이미 내 칼이니까.’

아걸은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고 눈을 떴다.

삐걱!

문이 열리며 서리형개가 들어섰다.

그는 아걸이 눈을 뜨고 있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지금쯤 깨어날 줄 알았다는 듯 태연했다.

“상처는 치료했다.”

그가 옆에 앉으며 말했다.

“……죽이지 않은 이유는 뭐지?”

아걸은 서리형개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을음이 잔뜩 묻은 천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신은 동박의 거처에 누워있다.

동박이 사용하던 침상에서 치료한다. 그가 보던 천정을 쳐다보고 있다.

동박은 천장 대들에 ‘일홀도’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

침상에 누워서 보면 정면에 비친다. 잠을 자기 전에도 보고,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본다.

동박은 일홀도를 얻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서리형개가 말했다.

“우린 항상 이곳에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칼을 쓰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와. 너도 알다시피 일홀문은 칼을 들고 찾아오는 자를 피하지 않는다.”

“엉뚱한 말을 하는군. 날 죽이지 않은 이유를 물었는데 말이야.”

“네 생각과는 상관없이, 널 적으로 생각하는 쪽은 우리보다 성검문이다. 우리 쪽에서 죽은 사람은 동박인데, 일홀문도야 어디서든 죽을 수 있으니까 문제 삼을 것 없지. 하지만 성검문은 다르다. 지금도 네 시신을 달라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날 이용해서 성검문을 흔들겠다? 그렇게 공부가 두렵나?

“실력 없는 용기는 만용이다. 지금 딱 네 모습이 그렇지. 지금 상태로 공부에게 가면 개죽음이다. 패할 줄 알면서 여기 온 것이나 마찬가지야. 죽어서 뭘 어쩌겠다고.”

“죽이려고 왔지, 죽으려고 온 게 아니니까.”

“내게 할 말은 아니다. 너 자신에게 말해. 널 살려준 이유로는 대답이 됐나?”

“됐어. 아주 정확한 대답이야.”

아걸은 쓴웃음을 흘렸다.

풍도곡은 자신을 내놓아서 성검문을 흔들 생각이다.

그래도 여전히 성검문은 풍도곡을 이용하지 못한다. 혈검경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전에는 자신을 죽일 수 없다. 지금 풍도곡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놓아준다면, 성검문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심정으로 쫓을 것이다.

성검문, 풍도곡…… 양쪽 모두 자신을 적수로 여기지 않는다.

서리가헌과 서리형개에게는 패해봤으니 할 말이 없다. 공부 허도기는 더 강하다.

사실상 적수가 안 된다.

‘할배, 이런다고 했잖아!’

이 순간, 아걸은 일을 벌인 할배가 생각났다.

지금이 아니면 칼을 들지 못한다면서 일을 벌였지만, 결국 긴장감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일으키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 취급을 당하고 있지 않나.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실망하지는 않는다.

자신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일홀도를 성숙시킬 정도로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된다.

서리형개가 말했다.

“한 가지 말해주면. 옛날 일이지만 사형, 공부 허도기에게 일 초 만에 패했다.”

“당신은?”

“나 역시.”

서리형개는 숨기지 않았다.

“……일 초?”

“공격하자마자 당했으니까. 그것도 어린애 데리고 놀듯이 장난처럼 펼친 검에.”

“패한 사람치고는 담담하게 말하네?”

“판단과 결행은 네가 하는 거지. 나는 지금 허도기와 부딪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려는 것뿐이다. 이런 말을 한다고 겁을 먹지도 않겠지만.”

“조명십해가 정확히 뭐야?”

“일홀문도가 할 소리는 아니군. 조명십해를 상대할 방법은 네가 찾아. 공부를 어떻게 이길지도 네가 찾고. 모든 것은 자기가 알아서. 모르나?”

일홀문도는 사형제 간에도 무공에 대해서는 상의 혹은 논의하지 않는다.

사형제는 꺾어야 할 대상이지, 보듬어 안는 대상이 아니다.

도움을 청하고 머리를 숙이는 순간, 일홀문도의 자격이 사라진다. 계속해서 사형, 사제 소리는 듣겠지만 일홀문의 긍지는 지워졌다고 봐야 한다.

아니, 다른 말은 다 필요 없다.

일홀도가 무엇인지 경험해 보니 알겠다. 일홀도를 맛보면 결코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

자신은 서리가헌에게 패했다. 서리형개에게도 죽기 직전에 이를 만큼 칼을 맞았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다. 일홀도를 약간만 더 수련하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이러니 어떻게 머리를 숙이겠나.

공부 허도기는 풍도곡을 단신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극히 강한 고수다.

그런데도 전혀 두렵지 않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고, 일홀도를 더 수련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할배가 무모하게 일을 벌였을 때와 지금은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고수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넘을 수 없는 철벽이었는데, 지금은 같은 높이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바라본다.

서리형개는 허도기에게 일 초 만에 패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담담하다. 그 패배 때문에 어떤 상처도 받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다.

서리형개도 자신과 같은 눈으로 허도기를 본다.

일홀문은 일홀도를 얻으면 ‘서리’ 씨를 주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일홀도 맛을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된다. 예전의 나는 사라지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새로 태어난다. 그래서 새 성을 주는 것이다.

“아! 물어볼 게 있었는데 잊고 있었네. 귀문에서 일홀 무공을 봤는데, 말해줄 거 없어?”

순간, 서리형개가 아걸을 쏘아봤다.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봤다.

“귀문을 건드렸군.”

“반응을 보니 할 말이 있겠는데?”

“귀문을 정리해야겠어. 이놈 저놈 아는 놈이 너무 많아. 한동안 잘 썼는데.”

“귀문을 잘 썼다고? 무슨 뜻이야? 말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면 내가 파고들 것도 알지? 벌써 궁금증이 생겼거든.”

서리형개가 다시 아걸을 쳐다봤다.

잠시 후, 서리형개의 눈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무엇인가를 알아냈다는 듯.

“귀문에 몽설이 있군.”

“…….”

“후후후!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사곡주가 보고를 안 해 와서 탈이 생겼다 싶었는데, 역시! 후후! 좋아. 봐준다. 귀문을 이용해서 정보를 얻어.”

“귀문이?”

“귀문 문주는 마구영인데, 내가 정리했다. 귀찮아서 마구영이라는 이름을 계속 쓰고 있지. 이곳에 갇혀 있으면 때때로 중원을 직접 봐야 할 필요도 있더라고.”

“으음!”

아걸은 침음했다.

이제 막 서리가헌에게 패배를 당하고 깨어났는데, 또 서리형개와 싸워야 할 것 같다.

서리형개가 귀문을 움직인다면 몽설이 위험하다.

서리형개가 말했다.

“몽설, 오비야 맞지? 사부 딸. 긴장할 것 없다. 죽일 생각 없어. 사모가 취화원 남소였으니, 취화원에 숨긴 게 맞지. 후후! 사모도 그때 꽤 바빴군.”

서리형개가 일어섰다.

“귀문을 마음대로 써. 성검문을 상대하려면 눈과 귀가 꽤 필요할 거야. 나와 연관된 부분은 내가 정리하지. 그리고 오비야에게 전해. 내가 먼저 건드리지는 않겠지만, 부모 복수를 하고 싶거든 언제든 오라고. 어떤 방법으로 들어와도 다 받아준다고.”

“그 말, 전하지 않아도 돼.”

“…….”

“오비야, 이미 당신들 벼르고 있거든.”

“그런가? 하하하! 하하하하!”

서리형개가 크게 웃었다.

* * *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온다. 오가는 것은 자유다. 다만 이곳에 왔을 때는 반드시 목숨 걸고 칼을 들어야 한다. 가는 방법은 없다. 오직 지금 한 번만 나갈 수 있다.

아걸은 옷을 입기 전에 몸에 난 상처를 살펴봤다.

몸뚱이가 낙서판이 되었다.

온갖 병기가 휘젓고 지나갔다.

깊은 상흔도 있고, 가벼운 흔적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스읏! 슷!

서리가헌이 새겨준 상흔을 만졌다. 서리형개가 찢어놓은 상흔도 만졌다.

상흔을 만지자 두 사람의 칼이 생각났다.

두렵지는 않다. 자신도 사형처럼 일홀도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생각만 든다.

지금은 희망 사항이지만, 곧 현실이 될 것이다.

자신의 일홀도가 뛰어나다는 점은 서리가헌이 직접 증명해 주었다.

일탄십도를 뚫고 들어가서 손목에 상처를 냈으니 뛰어난 일홀도인 것이 맞다.

아걸은 손바닥으로 상흔을 탁탁 때린 후, 옷을 입었다.

풍도곡으로 들어설 때 입었던 옷은 소축십검이 걸레처럼 찢어놔서 버렸다.

서리형개가 준 옷도 딱 한 번 입고 쓰레기가 되었다.

이제 세 번째 옷을 입는다.

“넌 얼마나 입게 될지 모르겠다만…….”

풍도곡 밖에 소축십검이 기다리고 있다. 십군을 죽였기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까?

일홀도에 대해서 개안(開眼)은 했지만, 무공은 예전 그대로다.

풍도곡에 들어서기 전에도 문득문득 자신도 모르게 일홀도가 터져 나오곤 했었다.

일홀도가 형성되는 기본 틀을 알고 있다면 한적한 곳에 숨어서 도법을 수련했을 것이다. 진기가 어떻게 형성되고, 초식은 어떻게 되고, 칼은 어떻게 반응시켜야 좋은지 차분히 연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를 통해서 일홀도를 얻으면 그런 게 되지 않는다. 그러니 계속 싸우는 수밖에 없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도법 수련한다고 해서 일홀도가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일홀사도는 절체절명 상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만 슬쩍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보아하니 세 번째 옷도 오래 입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걱정 하나는 덜었다.

서리형개가 귀문 문주이고, 귀문을 손대지 않겠다고 했다. 몽설이 안전해졌다.

사곡 부곡주가 일홀무공을 펼칠 때 상당히 놀랐는데, 한숨 덜었다.

서리형개는 귀문 도움을 최대한 받으라고 했지만, 아예 연락조차 취하지 않을 생각이다.

몽설에게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아걸 생각에는 몽설이 혈검경을 적어도 구성 이상 성취한 다음에 무림을 밟아야 한다. 그래야 사형들에게 검을 들이댈 수 있다. 승부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이제 홀가분하다. 거칠 것이 없다.

아걸은 반철도를 들고 동박의 거처를 나섰다.

* * *

“백석골로 내려갔다. 위로는 올라오지 않을 테니, 아래쪽에서 기다리면 잡을 수 있을 거다.”

“고맙군. 빚 하나 졌다.”

초가평이 말했다.

“그놈을 왜 생포하려는지 모르겠는데, 내 생각에는 죽이는 게 나을 거야.”

“그 말, 참고하지.”

서리형개는 초가평에게 아걸이 내려간 방향을 말해주었다.

허언은 하지 않는다. 칼은 비정하지만, 입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가자!”

초가평이 먼저 신형을 띄웠다.

소축십검은 풍도곡 지리를 잘 안다.

만일의 경우, 풍도곡 살귀들과 싸워야 할 장소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눈여겨 봐뒀다.

백석골을 찾아가는 길은 매우 익숙하다.

‘살아나면 또 볼 거고, 죽으면 그만이고.’

서리형개는 멀어져 가는 세 사람을 무심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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