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第二十二章 정마(正魔) 구분(區分) (1)
팟!
아걸이 사라졌다.
“엇! 놈이 없다!”
누군가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방금까지 아걸은 암기 공세에 쩔쩔맸다.
빠른 신법과 도법으로 당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손발이 묶였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싹! 사라졌다.
“숨었다! 조심!”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정도는 모두 다 알고 있다. 사람이 연기처럼 증발할 리가 없으니 은신술을 펼쳤다. 위장포를 덮어 썼을 수도 있고, 빠른 포복으로 장소를 이탈했을 수도 있다.
빨리 놈을 찾아야 한다. 찾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반격당할 공산이 높아진다.
퍽!
살과 뼈가 베어지는 소리다.
‘당했다!’
무인들은 재빨리 주변을 훑어봤다. 바로 옆에 은신해 있는 자가 당했다면, 자신도 위험하다.
“이놈!”
누군가가 소리를 내지르면서 벌떡 일어섰다. 순간,
퍽!
그는 일어서자마자 둔탁한 소리를 흘리더니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벌써 당했다. 어떻게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절명했다.
무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숨죽인 채 경각심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 * *
저들 방식을 저들에게 돌려준다.
아걸은 숲에 흩어져 있는 강시를 수거했다.
두 뼘 길이의 강시는 연노로 발사하는 병기지만, 손으로 던질 수도 있다.
바삭!
‘왼쪽으로 십칠 보.’
아걸은 풀잎 스치는 소리로 거리를 판단했다.
왼쪽 십칠 보 떨어진 곳, 나무 뒤에 무인이 숨어있다. 감산도(砍山刀)를 사용하는 자인데, 칼을 등 뒤로 감춘 상태다. 햇빛 반사를 감추려는 거다.
슷! 슈웃! 팟!
강시를 던졌다. 무인의 관자놀이에 철시가 틀어박혔고, 곧장 피그르르 무너졌다.
오체진감은 세상이 일으키는 소리를 모두 듣는다.
소리를 귀로만 듣지 않는다. 땅 울림으로 듣는다. 공기가 흔들리는 소리로 듣는다. 감각을 총동원해서 아무 편견도 섞지 않고 오직 사실대로만 듣는다.
스으으읏!
그는 조용히 움직였다.
무인을 다 죽일 필요는 없다.
이들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왔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죽이려고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까지 이들을 몰살시킬 수는 없다. 정말로 그럴 생각이라면 결국은 중원 전 무인을 죽여야 할 것이다.
틈이 벌어졌으면 망설이지 말고 도주한다.
스스스 스슷!
그는 빠르게 포위망을 벗어났다.
* * *
‘황금 천 냥? 너무 센데? 내 목숨값이 이렇게 비쌌어?’
아걸은 피식 웃었다.
길가 공고판에서 방문을 봤다.
인상착의가 매우 살벌하다. 방문에 그려놓은 얼굴은 영락없이 살인귀다. 눈이 위로 쭉 찢어지고, 입술은 옆으로 비틀렸다.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얼굴 형태나 이목구비는 대충 비슷하게 그렸다.
“혈도비자, 맞지?”
“맞아. 빨리 알려.”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은 말인데, 또 들려왔다.
저들이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다. 알면서도 태연히 모습을 드러낸 채 방문을 읽었다.
위치를 일부러 드러냈다.
무인들을 다 죽일 필요도 없지만, 자신이 마냥 도주한다는 느낌도 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보니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잘 다니던데?
무인들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또 한 편으로는 공격하는 자들을 아주 강력하게 응징한다. 그래야 기습공격을 삼간다. 덤비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각인시켜야 피곤하지 않다.
이것은 그의 생각이 아니다. 옛날에 할배가 해주었던 말이다.
‘또 숨어야겠군.’
모습을 드러냈으니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숨는다. 물론 뒤쫓던 무인은 눈썰미가 무뎌서 놓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걸이 숨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저기가 좋겠어.’
길이 왼쪽으로 굽어 있다.
왼쪽은 산이고, 오른쪽은 논이다. 왼쪽으로 돌아서면 즉시 산자락을 탄다.
아걸은 빠르게 걸었다.
* * *
‘이놈!’
대산방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걸에게 대산방이 초토화되었다. 문도가 무려 사백십칠 명이나 죽었다.
성검문은 그런 점을 특별히 생각해서 타 문파에는 알려주지 않은 비밀 사항까지 연통해 주었다.
아걸이 다쳐서 숨은 사실은 만천하가 다 안다.
성검문은 특별한 사항, 아걸이 대략 반년 정도는 진기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타 문파에는 말해주지 않고 오직 대산방에만 연통해 주었다.
대산방 손으로 원수를 갚으라는 거다.
대산방주는 미끼를 덥석 물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른 척 무시하지도 않았다.
아걸이 나타난 순간부터 계속 지켜봤다.
무인들이 죽어 나갈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절 문도를 움직이지 않고 멀리서 보기만 했다.
“어떤가?”
대산방주가 아걸을 노려보며 말했다.
“킥킥킥! 제법 팔팔하게 날뛰네. 흠! 냄새가 좋아. 방주, 약속은 지키는 게 좋을 거야.”
대산방주 옆에 서 있던 자가 음침하게 말했다.
대산방은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아무리 귀중한 정보를 받았어도 힘이 없어서 싸우지 못한다. 그래서 특별히 조력자를 구해왔다.
절사곡(絶死谷) 악귀(惡鬼)들이다.
절사곡 악귀들은 유랑자(流浪者)들이다. 이리저리 떠돌면서 식량을 약탈해서 생활한다. 그러면서도 살인까지 밥 먹듯 저지른다.
이들은 진령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대산방이 진령 땅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단단히 경계한 탓이다.
그렇다. 어제까지 대산방과 절사곡 악귀는 적이었다. 서로 병기를 겨누는 사이였다.
대산방주가 절사곡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약속은 확실히 지킨다. 일 년에 두 번, 진령을 휘저어도 눈감아 주겠어. 약속은 지켜.”
“큭큭! 방주도 알겠지만, 저놈은 우리보다 몇 수 위야. 정면승부를 벌이면 당연히 깨 박살 날 거고. 큭큭! 하지만 싸움을 꼭 무공으로만 하라는 법은 없지.”
“언제까지 처리할 수 있겠나.”
“내일까지 목을 따다 주지. 그런데 저런 놈이 어디서 툭 튀어나온 거야? 무림에 저런 놈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성검문이 개입한 일치고 좋은 일이 있나? 자식들, 뭔가 비밀이 있겠지.”
대산방주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 *
‘응?’
아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무인들은 까치발로 걷듯이 매우 조심스럽게 쫓아왔다.
그런데 이 자들은 전력을 다해 거침없이 쫒아오고 있다.
아걸은 개울물로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진평 무림에 혈도비자의 칼을 두려워하지 않는 문파도 있었나?
궁금증이 치민다. 어떤 자들이기에 자신이 드러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쫓아오나.
고개를 돌려 발걸음 소리를 추격했다.
타타탁! 타타타탓!
신법을 펼치는 소리가 매우 둔탁하다. 발이 무거우니 몸도 둔하다. 절정 신법은 아니다.
그러자 의문이 또 일어났다.
신법만 가지고 무공을 논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자신보다는 약할 것 같다. 그런데도 이토록 급하게 쫓아올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서 기인하나?
“흠…….”
아걸은 언덕을 넘어 빠르게 치달려오는 사람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적어도 삼십여 명이 달려왔는데, 모두 언덕 너머에서 뚝 멈췄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 달려온다. 그것도 여자다. 멀리서 봤지만, 여자가 분명하다.
“……뭐야?”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타타탁! 타타타탁!
여자가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 신법도 모른다. 무공을 아예 모르는 평범한 아낙이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은 틀림없다. 두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아걸은 여인에게 다가섰다. 한데,
‘응?’
여인을 향해 다가서던 아걸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오체진감이 소리 대신 냄새를 맡았다. 아주 매캐한 냄새, 진한 후추 같은 냄새다.
‘화약?’
“멈춰!”
아걸이 소리 질렀다.
여인은 듣지 않았다. 아걸이 멈추라고 소리치자 오히려 더 급하게 달려왔다.
“이런!”
아걸은 여인과 부딪칠 수 없어서 뒤로 쭉 물러섰다. 순간,
꽈아아앙!
눈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자폭이다.
여인은 갈기갈기 찢겨서 날아갔다. 그녀가 쏟아낸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여인은 자살 임무에 거의 성공할 뻔했다. 아걸이 조금만 늦게 물러섰어도 폭발을 피하기 어려웠다. 화약이 워낙 강력해서 폭발 사정권이 컸다.
“이게 도대체……?”
아걸은 눈살을 잔뜩 찡그린 채 죽은 여인을 쳐다봤다. 폭발이 만들어 놓은 깊은 구덩이도 봤다.
이해가 안 된다. 무공도 모르는 여인이 자폭하다니.
그때, 이번에는 언덕 너머에서 농부가 나타났다. 그도 아낙처럼 아걸을 향해 달려왔다.
“제발! 제발! 제발!”
농부는 달려오면서 울부짖었다. 아걸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애원까지 했다.
‘제발’이라는 말은 뭔가? 제발 죽어달라는 말인가? 같이 자폭하자는 말인가? 그럼 농부도 아낙처럼 화약을 지니고 있나? 맞다. 심지 타는 냄새가 풍긴다.
“아!”
아걸이 뒤로 물러섰다.
절망을 느낀 농부가 달려오다 말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걸을 보며 애원했다.
“우리 아들이…… 아들들이. 제발! 제발!”
꽈앙! 꽈아아앙!
농부는 하던 말도 마치지 못하고 폭사했다.
농부는 먼저 아낙과 똑같은 화약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폭발력이 먼저와 같았다.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 움푹 파인 구덩이도 먼저 생긴 것과 비슷했다.
‘아들이라니…….’
아걸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아들을 인질로 잡고 농부와 아낙을 자폭으로 내몰았다는 말인가? 정도 문파가? 무인 한 명 잡겠다고 무공도 배우지 못한 일반인을 싸움터로 내몰아?
“이게…… 말이 되나?”
아걸은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피어났다. 소위 무인이라는 자들에 대해서 회의가 치밀었다.
아니다. 이건 다른 사정이 있을 것이다. 무슨 사정인지 알아봐야 하는데, 알아볼 여유가 있나? 여유가 없다고 해도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은 내버려 두면 안 되겠지?
온갖 생각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때, 언덕 너머에서 아낙이 모습을 보였다.
아낙은 휘청이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뒤를 몇 번 돌아보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온 힘을 다해서 달려왔다.
“아!”
아걸은 탄식했다.
자신이 물러서면 아낙은 또 폭사할 것이다. 그리고 보아하니 언덕 너머에는 또 다른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도대체 몇 명이나 죽여야 이 미친 짓거리가 끝날지 모르겠다.
‘용서하지…… 않는다!’
아걸의 눈에 화염이 이글거렸다.
그동안 숱한 사람과 싸웠지만 냉정함을 잃어본 적이 없다. 칼에 감정을 섞지 않았다.
언덕 너머에 있는 자들에게는 살의를 느낀다.
누군지, 무슨 일인지 아는 게 없지만,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기가 일어난다.
아걸은 반철도를 꾹 눌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