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第二十二章 정마(正魔) 구분(區分) (3)
많은 사람을 죽인 자와 한 사람을 죽여도 처참하게 죽인 자 중 누가 더 두려울까?
혈도비자는 전자였다.
아걸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살겁을 저질렀다.
공격해 오니 맞서 싸운다. 상대방이 죽이려고 덤비니, 이쪽도 최선을 다해 죽인다.
상대가 내 편을 많이 죽이니, 더 많은 사람을 투입한다. 그럴수록 상대방은 많이 죽인다.
양쪽 모두 잘못이 없다.
하지만 세상은 잘잘못을 구분한다.
싸움이 끝나면 약자와 강자가 구분된다. 선한 자와 악한 자도 나눠진다. 정도인과 사마외도가 명확하게 판가름 난다. 아무 잘못 없이 싸우기만 했어도.
그러면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데, 손 놓고 죽었어야 옳은가?
그게 옳다.
모든 것을 구분하는 시선은, 판가름하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대산방은 성검문 편에서 힘껏 싸운 선(善), 아걸은 선을 무참히 짓밟은 마(魔).
혈도비자라는 별호는 선악 구분을 말해준다.
아걸은 악이다. 나쁜 자, 살인자다. 교화나 감화가 전혀 안 되고, 오직 죽여서 소멸시켜야 하는 존재다. 어떻게 정도인을 그렇게 많이 죽일 수 있나?
이 말속에는 묘한 뜻이 숨겨져 있다.
저들은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아걸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저들은 무공이 어린아이 수준이라서 싸울 수 없는데, 아걸이 악착같이 따라붙어서 죽였다는 뜻이 스며 있다.
그러니 무조건 악인이 된다.
그런데 이제는 후자까지 더해졌다.
“아, 악마! 악마!”
“으으으……!”
입을 열자 자신도 모르게 악마라는 말이 토해졌다.
어떤 사람은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기만 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절사곡 악귀들에게 잡혀서 화약을 짊어지고 달려야 했던 마을 사람 이야기다.
그들 눈에도 아걸은 살인에 미친 악마처럼 보였다.
아걸은 전신에 피칠을 했다. 옷에 핏물이 배서 뚝뚝 떨어진다. 머리며, 얼굴이며 온통 피투성이다.
폭발로 일어난 흙먼지는 아걸에게도 달라붙었다.
아걸은 땅속에서 막 기어 나온 악마 모습이다. 거기에 두 눈동자만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미친개의 눈빛처럼 살기로 번들거려서 쳐다볼 수가 없다.
푸욱!
아걸이 칼을 내지른다.
땅에 쓰러져서 저항할 수 없는 사람마저도 칼로 찌른다.
칼에 찔린 사람이 품에서 독 봉지를 꺼내 살포하려고 했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칼로 찔러서 죽이는 모습, 죽는 자를 차디찬 눈으로 지켜보는 모습만 보인다.
스읏!
칼을 뽑자, 반 토막 칼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혈도비자가 주위를 돌아봤다.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본다.
마을 사람들은 혹여 그 눈길과 마주칠까 봐 어깨를 움츠리고 바들바들 떨었다.
혈도비자, 악마가 걸어간다.
수많은 시신을 남겨놓고 휘적휘적 사라진다.
* * *
“말도 마. 내 사람을 산채로 찢어 죽이는 모습은 처음 봤다니까. 목덜미를 물어뜯고는 히죽히죽 웃더라고.”
“미쳐서 그런 거 아니야?”
“미친놈이면 적당히 죽이다가 그쳐야지. 이건 아예 뿌리를 뽑더라고. 말 봤지? 말. 말 다리 싹둑 잘린 거 봤지? 사람이고 짐승이고 가리지 않더라니까.”
“어휴! 그런 꼴을 봤으니 잠도 못 자겠구먼.”
“잠이 뭐야. 눈만 감으면 그 생각이 나서 벌떡벌떡 일어난다니까. 지금이라도 혈도비자가 와서 내 목을 잘라버릴 것 같아. 벌써 며칠째 잠을 설쳤는지 몰라.”
혈도비자가 잔인하게 무인들을 학살한 이야기는 반 시진도 되지 않아서 진평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 * *
“절사곡은 수단이 잔혹하기로 소문난 자들인데, 무사하진 못할 거야. 많이 다쳤죠?”
몽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것으로 압니다.”
팔 장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폭발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독에도 중독된 것으로 아는데, 해독약은 있을지…….”
“없어요.”
몽설이 바로 말했다.
아걸은 해독약이나 구급약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오죽하면 녹선마황도 버렸을까. 그걸 사용할 정도면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럼 빨리 찾아야 합니다. 늦으면 탈이 생길 수도 있어요.”
팔 장로가 급히 말했다.
팔 장로는 아걸을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쫓을 수가 없었다.
아걸이 풍도곡에 들어간 이후부터일 것이다.
그 후부터는 그녀도 주변에서 떠도는 소문만 주워서 알려왔다.
아걸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지만, 딱 한 걸음이 늦어서 찾지 못하곤 했다.
대신 아걸이 만들어낸 살육현장은 봤다.
아걸이 누구를 죽였는지, 어떻게 싸웠는지 확실하게 파악했다.
소문은 많이 잘못되었다.
세상은 아걸이 절사곡 악귀들과 싸웠다는 점을 잊었다. 아걸이 상대도 안 되는 무인을 도륙했다고 말한다. 절사곡 악귀들이 마을 사람을 인질로 삼고 화약을 폭발시킨 만행도 쏙 들어갔다. 그런 점은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소문을 조작했다. 의도적인 소문이다.
“분위기는 좀 어때요? 들끓고 있어요?”
“아뇨. 차분한 편이에요. 흥! 여우같은 것들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거죠.”
팔 장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진평 무림이 발칵 뒤집혔어야 한다. 너도, 나도 의분을 못 이겨서 들고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진평 무림은 차분하다.
죽은 사람이 절사곡 악귀라는 것을 안다.
악귀들이 어떤 방법으로 공격하는지 알고 있다. 아걸처럼 싸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안다.
그런데도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아걸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 성검문이 내건 조건은 일약 신분 상승을 할 좋은 기회다.
“분위기가 차분하다면 계속 공격하겠네요?”
“주랑(主郞)께서 상처를 입었으니 더 공격하겠죠.”
“네?”
몽설이 잘못 들은 듯 되물었다.
“아무리 맹수라도 상처를 입었으면…….”
“아니, 그전에요.”
“……?”
“아걸을 뭐라고 불렀어요?”
“아! 주랑요? 문주님 낭군이시니 주랑이라고 불러야죠. 모두 그렇게 부르라고 지시해 놨습니다.”
“주랑요?”
“뭐 정혼 예물까지 오간 마당에…….”
“아아아! 됐어요.”
몽설이 황급히 말문을 막았다.
팔 장로가 짓궂은 눈빛으로 몽설을 쳐다봤다.
문주이기 이전에 제자다. 다른 취화원 살수처럼 어렸을 적부터 키워왔다.
장로들에게 살수는 딸이나 진배없다.
팔 장로는 진심으로 몽설이 대견했다.
문주로서 무공은 물론이고 기품까지 갖춰가는 것 같다. 살수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총명함까지 보인다. 전체적인 형세 판단을 매우 잘한다.
“아걸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어요?”
“남곡(南曲)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남곡…….”
몽설이 중얼거렸다.
* * *
“금창약을 부탁합니다.”
“네, 네.”
의원이 급히 금창약을 제조했다.
시골 허름한 약방에 좋은 약재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치료는 해야 하니까.
“씻고 싶은데 우물 있습니까?”
“네, 네. 우물은 저기…….”
의원이 우물을 가리켰다.
“옷도 한 벌 부탁합니다. 어차피 곧 찢길 테니 당장 입을 허름한 옷이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의원이 순순히 대답했다.
아걸은 우물가에 가서 옷을 벗었다.
옷에 핏물이 배고, 베인 핏물이 찐득하게 굳었다. 살과 상처에 눌어붙었다.
옷을 벗는다는 게 상처를 헤집고 있다.
아걸은 옷을 벗고 우물을 길어서 머리부터 확 끼얹었다.
차디찬 물이 지난 노고를 씻어준다. 흙먼지는 물론이고 핏물까지 싹 씻어내 준다.
반철도에 묻은 피도 닦았다.
할배는 반철도에 방패막이를 달지 않았다. 칼끼리 부딪친 후에 칼날이 미끄러져 내려오면 막아줄 막이가 없다. 그래서 급히 비틀어야 한다.
쇳덩이 하나 더 붙이지, 그게 귀찮아서.
당시에는 투덜댔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맙다. 방패막이를 달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방패막이에 핏물이 눌어붙으면 닦아내기가 귀찮다.
시간 여유가 많다면 차분히 씻으면 되겠지만, 만사가 귀찮을 때는 물로 한 번 확 짜끄리고 만다. 그래도 피떡이 지워지지 않으면 몇 번 문질러주고.
그 이상 칼에 공을 들이는 건 귀찮다.
의원이 금창약을 만들어서 우물로 왔다.
“발라 드리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아걸은 등을 내줬다.
폭발에 당한 상처가 꽤 깊다. 영문도 모르고 당해서 미처 몸을 피할 틈이 없었다.
오체진감을 일으킨 상태였다면 이 정도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행히도 오체진감을 풀었다. 심지를 자른 순간, ‘이제 됐다!’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스읏! 슷!
의원이 정성스럽게 금창약을 발랐다.
“제가 무섭지 않습니까?”
아걸이 차분하게 물었다.
원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금창약을 바르는 손길이 너무 차분하다. 흔들림이 전혀 없다. 시골 의원치고는 너무 침착하지 않나.
“무섭기는요. 고맙습니다.”
의원이 더욱 정성스럽게 금창약을 발랐다.
“고마…… 워요?”
아걸은 의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되물었다.
의원이 말했다.
“진평 사람치고 진고개에게 죽은 놈들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알죠. 악귀 놈들 아닙니까. 진고개에서 한 짓만 봐도 알죠.”
“…….”
“때려죽일 놈들이긴 해도 진평 땅은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눈치 안 보고 들어왔어요. 진평 무인들이 눈감아주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 아닙니까. 이놈이고 저놈이고…….”
의원이 투덜거리면서 약을 발랐다.
아걸은 피식 웃었다.
이 세상에는 피에 굶주린 개망나니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구나.
아걸은 의원이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우습게도 의원들이 입는 의복(醫服)이다. 겉옷이 치마처럼 길고, 좁다. 허리띠는 한 뼘이나 된다. 허리띠에 침 같은 것을 꽂아놓는 천이 덧대어져 있다.
아걸은 의복을 입고 장옷 아랫부분을 북 찢었다.
활동하기 편해야 한다.
약값과 옷값으로 전낭을 꺼내 우물가에 놓았다.
돈은 필요 없다. 전낭에 얼마나 들어있는지 모르겠는데, 모두 놓아두고 간다.
“저…….”
의원이 벌벌 떨면서 아걸을 쳐다봤다.
“밥 있으면 한 끼 주시겠습니까?”
“밥이요? 그럼요. 어서 안으로…….”
“아뇨. 안으로 들어가면 의원께서 곤란해집니다. 의원님은 어디까지나 제게 협박을 받은 것으로 하시고. 찬밥이라도 있으면 주세요. 밥 먹을 시간도 없을 것 같군요.”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의원이 총총걸음으로 들어갔다.
밖에는 이미 무인들이 늘어서 있다. 아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가? 아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 누군가가 나타나면 당장 안으로 들이칠 것이다.
“여기.”
의원이 작은 소반에 밥과 나물 반찬을 가져왔다.
아걸은 선 채로 밥을 먹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배를 채울지 모른다. 아마도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 같다. 상대가 안 되는 자들을 끊임없이 베어야 한다는 건 고역이다.
“저 밖에…….”
의원이 바깥 상황을 말하려고 했다.
“듣습니다.”
“네?”
“의원님께서 하는 말, 듣고 있어요. 그러니 인제 그만 들어가세요. 고맙습니다.”
아걸은 의원에게 눈으로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