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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114화 (114/600)

#114화. 第二十三章 연심(戀心) (4)

싸움을 벌이면 초식은 모두 잊힌다.

초식을 구사했다가 중간에 막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어떤 초식을 구사할지 모르게 된다.

물론 초심자들 이야기다.

취화원 살수 정도 되면 초식이 몸에 붙어있다.

본능적으로 검초를 전개하지만, 모두가 평소에 수련했던 초식들이다. 아무 정신도 없이 뻗어내는 초식조차 수련을 통해서 반복 연마된 검초다.

무공이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생각 없이도 초식이 사용된다.

동굴 속에서 취화원 살수들은 암영검을 사용한다. 암영보를 밟아서 움직이고, 은신술을 사용해서 숨는다. 지식(止息)을 사용하고, 오감을 활짝 열어놓는다.

암영검이 극한으로 전개된다.

살수검은 상황이 힘들수록 더 예민해진다.

잠을 자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고,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황은 그야말로 지랄 같다. 그냥 쓰러져서 잠들고 싶다.

이 마음…… ‘이제 됐어’ 하는 마음이 들면 죽는다.

어떤 상황에 부딪혀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살려고 발버둥 쳐야 한다.

살수들은 그렇게 배운다.

쒯! 타타타탁!

공격이 후다닥 지속하였다가 멈춘다. 움직임이 끝나고 나면 지옥 같은 정적이 이어진다.

* * *

십이살환도는 절정 무인도 막지 못한다.

일홀문 구대문주는 이 무공으로 강호 제일인이 되었다. 강호를 종횡하면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모조리 이겼다. 환도를 지상 최강의 칼로 만들었다.

아걸은 십이살환도를 비슷하게 흉내 낸다.

팔 장로는 감당하지 못한다.

쒯!

팔 장로 앞에서 도광이 춤을 추었다.

팔 장로는 코앞에서 칼바람이 일어나자 즉시 암영보를 밟았다. 옆으로 훌쩍 건너뛰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칼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퍼억!

칼이 팔 장로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순간,

팟!

팔 장로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오히려 왼쪽에서 까만 검광이 번뜩였다.

팟! 파앗!

공격하고, 피한다. 피하고 공격한다. 다시 사라지고 뒤로 돌아서 공격한다.

아걸과 팔 장로는 순식간에 오 합을 주고받았다.

쎄에에엑! 쒜에엑!

사방에서 검이 들이닥쳤다.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다른 검들이 달려든 것이다. 물론 자신은 드러내지 않은 채.

팟! 팟!

아걸도 사라지고, 팔 장로도 사라졌다. 두 사람을 쳐오던 공격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사생락!’

아걸은 십이살환도를 전력으로 펼치지 않았다. 실제보다 두 배 정도 느리게 펼쳤다. 두 배라고는 하지만 환법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았다.

팔 장로는 칼에 베이기 직전에 사생락을 펼쳤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무공이 터져 나왔다. 안전한 거리에서 피한 것이 아니다. 칼이 닿는 순간에 피했다. 그때까지, 칼이 다가올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렸다.

사생락이다.

팔 장로의 옆구리가 칼에 맞은 것처럼 휘어졌다.

칼을 쓴 사람은 오직 칼과 상대만 본다. 그래서 상대방의 옆구리가 휘어진 것처럼 보인다.

팔 장로는 반대 경우다. 자신의 육신과 상대방을 칼을 본다. 그러니…… 아마도 암영보를 펼칠 때 칼에 맞은 것 같은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칼 든 사람은 칼로 벤 것처럼, 팔 장로는 칼에 맞은 것처럼.

사생락은 그 순간에 일어난다.

‘맛을 봤군.’

아걸은 피식 웃었다.

사생락을 맛봤으니 이제부터는 계속 사생락을 펼칠 것이다. 본격적으로 몸에 붙일 것이다. 위험이 격해질수록 사생락도 활기차게 일어난다.

쒝!

팔 장로가 공격해 왔다.

역시 맛을 봤다. 동굴에 와서 사흘째, 팔 장로가 처음으로 아걸을 선제공격한다.

* * *

후루룩!

물 마시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팔 장로는 이제 숨지 않았다. 마음대로 공격해 보라는 듯 기척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쒜에에엑!

누군가가 팔 장로를 공격했다.

결과는 뻔했다.

취화원 살수들은 이미 팔 장로의 적수가 아니다. 예전에도 적수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격차가 더 벌어졌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공격했던 자가 오히려 나가떨어졌다.

이제 동굴에서 절대 강자가 두 명으로 늘었다.

팔 장로도 아걸이 했던 것처럼 취화원 살수들을 거침없이 두들겨 팼다.

인간은 물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개인의 체력과 상황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략 이틀이다. 보통은 삼 일이라고 한다. 탄광이 무너져서 물과 음식이 전혀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름 동안 견딘 사례도 있다.

정확히 얼마 동안 버틸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삼삼법(三三法).

살수들은 생존 수련을 받으면서 듣는 말이다.

일반인의 경우, 물을 먹지 않고 삼 일을 버틸 수 있다. 음식을 먹지 않고는 삼 개월까지 버틴다. 삼삼법의 삼삼이 바로 삼 일과 삼 개월을 가리킨다.

물론 숨이 떨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 전에 충격이 오거나 탈진, 정신착란 등등이 찾아오기 때문에 사실은 더 일찍 절명한다.

살수는 이보다 더 버틸 수 있다.

동굴 수련 오 일째!

살수들은 꽤 잘 버티고 있다.

바위에서 물기를 핥아먹고, 개미, 지네 등등을 생으로 씹어 먹으면서 버틴다.

하지만 살수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체력은 바닥난 지 오래고, 정신이 혼몽해진다. 차라리 포기하고 누워버리자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럴수록 더 강하게 몰아친다.

낙오자는 같이 가지 못한다. 오직 검을 얻은 자만이 먼 길을 같이 갈 수 있다.

쒜에에엑! 따악! 퍼어억!

아걸의 강철 검이 취화원 살수를 두들겼다.

연약한 몸이 동굴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온전히 맞고 있지만은 않았다. 일차 공격은 맞았지만, 이차 공격은 맞지 않겠다는 듯 즉시 암영보를 펼쳐서 사라졌다.

화악!

방금 맞은 살수가 보이지 않았다.

‘암영검을 벗어났어.’

아걸은 만족했다.

후루룩! 후룩!

동굴 수련 칠 일째 되는 날, 물을 시원하게 마시는 사람이 또 나왔다.

이번에 물을 마신 사람은 취화원 살수다. 이게 중요하다. 취화원 살수가 사생락 맛을 봤다.

이제 교두가 넷, 배우는 사람이 여덟이다.

쒜에에엑! 쒜에엑!

팔 장로가 물 마시는 자를 쳤다.

물 마시던 살수는 공격이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물을 마셨다. 시원하게 동굴 속으로 흘러가는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한순간, 요란한 격타음이 터졌다.

퍼억! 퍽!

양쪽에 서로 맞았다.

물 마시던 살수는 사생락을 온전히 펼치지 못했다. 기어이 검을 맞았다. 하지만 그녀도 팔 장로를 쳤다. 진검이었다면 두 명 다 살기 힘들었다.

파아아앗!

두 사람은 일격씩을 당한 후, 즉시 모습을 감췄다.

* * *

터엉!

입구를 닫아놓은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햇살이 어두운 동굴 안으로 확! 밀려들었다.

스읏! 저벅! 저벅!

동굴 안에서 아걸이 걸어 나왔다.

다른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여전히 안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쉬잇!

몽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떻게 됐어?”

몽설이 다짜고짜 물었다.

“어멋!”

아걸이 대답하기도 전에 몽설은 너무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걸 모습이 너무 흉측하다.

예상은 했지만 뼈만 남았다. 피부 탄력도 사라지고, 부스럼 같은 것도 생겼다.

“할 만큼 했어.”

아걸이 웃었다. 한데 웃는 표정이 아니다. 해골이 입술을 비트는 모습이다.

“어,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줘?”

몽설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걸이 동굴 수련에 대해서 말했을 때도 이 정도까지 사람이 피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굴에 물이 있으니 먹을거리만 잘 찾으면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동굴이 열리지 않아서 많이 당황했다.

열흘이 넘고, 스무날이 넘어서자 마음이 개미굴처럼 번잡해졌다.

왜 이렇게 안 나오지? 무슨 일이 생겼나? 이 정도까지 오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냐? 누가 죽기라도? 아냐, 탈이 났으면 당장 나왔을 텐데. 탈이 났어도 버티는 건가?

닫힌 바위를 밀쳐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열댓 번씩 일어났다.

그래도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팔 장로를 아낀다. 취화원 살수들을 아낀다. 그들마저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다. 이곳에서 무림에 나설 자격을 얻거나, 아니면 주저앉아야 한다.

스무이레 만에 동굴이 열렸다.

거의 한 달 가까이 물과 개미, 곤충, 박쥐 등을 잡아먹으며 버텼다.

몽설은 멀쩡하던 사람이 스무이레 동안 섭생을 등한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두 눈으로 보고 있다.

“미안, 미안, 미안해.”

입을 틀어막은 손이 덜덜 떨렸다.

이렇게까지 해준 아걸이 고마워서, 아걸이 불쌍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두 사생락 맛은 봤어. 맛만 보면 다음은 금방이니까. 혼자서도 수련할 수 있고. 그러나저러나 모두 탈진해서 움직이지를 못해. 먹을 것 좀 챙겨다 줘.”

“오빠는?”

“난 아직 괜찮아. 사실, 난 이런 동굴 수련 꽤 매우 해봤어. 내 걱정은 말고, 들어가 봐. 앞으로 사나흘 정도는 동굴에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몽설이 고개를 확 달려와서 아걸에게 안겼다.

“후우!”

아걸은 긴 숨만 토해냈다.

마음 같아서는 두 손을 올려서 몽설을 안아주고 싶다. 하지만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이 자리에 쓰러져서 며칠 동안 계속 잠만 자고 싶었다.

* * *

아걸은 하루 동안 죽었다가 깨어났다.

누가 다가와서 암살을 시도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만큼 모든 경계심을 확 풀어놓고 잠만 잤다.

“아함!”

기지개를 길게 켜며 일어섰다.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너무 잠을 많이 자서인지 머리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곧 일홀도를 떠올렸다.

동굴 수련은 취화원 살수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을 위해서 동굴 수련을 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몽설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동굴에서 취화원 살수들을 괴롭히는 역할을 했지만, 사실은 매 순간 일홀도를 사용했다.

일홀도를 신법에 응용했다.

강철 검에는 사용하지 못했다. 강철 검으로 일홀도를 펼치면 살검이 된다. 이젠 즉살도가 된 일홀도를 강철 검으로 펼칠 수는 없었다. 몇 번 펼쳐볼까 했으나, 결국 동굴을 나설 때까지 사용하지 못했다.

주변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공에 대응할 수 있는데, 그 점도 이뤄내지 못했다.

동굴에서 수십 번, 수백 번에 걸쳐서 고쳐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고치지 못했다.

합공을 당했을 때는 일홀도를 사용하지 못한다. 자칫하면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 한 명이라도 죽이고 죽겠다는 심정이라면 일홀도만큼 뛰어난 것도 없고.

대신 일홀도에 대한 개념은 확실히 잡았다.

일홀도를 일으키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경맥 노선도 확인했다. 운공법을 찾아낸 것이다.

오체진감을 일으키면서 운공을 하면 몰안으로 접어든다. 즉시 일홀도가 터진다. 망아(忘我)의 상태에서 칼과 나와 적만 뚜렷하게 보인다.

‘합공 때는 지금처럼 싸울 수밖에 없겠네.’

자신의 일홀도를 만들어 놓고도 삼십육 문주의 일홀도를 계속 수련해야 한다.

스읏!

손을 들어 올렸다.

잠에서 깼으니 수련을 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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