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115화 (115/600)

#115화. 第二十三章 연심(戀心) (5)

“언니, 지금 기분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몽설은 취화원 살수 취운(翠雲)에게 말했다.

살수가 아홉 명인데, 그중 여섯 명이 언니다. 몽설보다 아래는 셋밖에 없다.

“언니라는 말씀 가당치 않습니다.”

취화원 살수 취운이 정색하며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그냥 언니라고 불렀으니까…….”

“안 됩니다. 위아래는 분명해야 합니다. 이름으로 지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꼭 그래야 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동료가 삼백팔십입니다. 그 원혼들, 달래주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

“생각이 없으시다면 저희를 놓아주십시오.”

취운이 단호하게 말했다.

몽설은 팔 장로와 아홉 살수를 쳐다봤다.

아걸에게는 아걸의 싸움이 있다. 자신에게도 자신의 싸움이 있다. 이들에게도 이들의 싸움이 있다. 모두 각자 다른 싸움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아걸의 싸움은 그녀의 싸움이기도 하다. 또 취화원 살수들의 싸움도 그녀의 싸움이다.

취화원 살수들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 악물고 동굴 수련을 버텨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

몽설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몽설은 취화원이 가진 능력으로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붉은 꽃, 적화(赤花)가 말했다.

적화는 몽설의 말뜻을 잘못 알아들었다. 몽설은 취화원이 지닌 힘을 정확하게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 그 힘에 맞춰서 싸울 수 있으니까.

그런가? 모두가 원하는 것이 진정한 원주인가? 그렇다면 그런 원주가 되어준다. 철저하게 취화원 원주가 되어서 죽어간 장로, 동료들의 복수를 해줘야 한다.

몽설이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월영(月影), 소호(疏湖), 청란(淸鑾), 규화(葵花). 각각 일, 이, 삼, 사곡을 공격해. 사곡은 곡주와 부곡주가 죽었으니 좀 수월할 테지만, 문도를 장악하는 것도 만만치 않아.”

“넷!”

아홉 살수 중 네 명이 대답했다.

몽설은 우선 귀문을 정리할 생각이다. 지금은 남의 집 안방에 들어와서 숨어있는 격인데, 완전히 바깥 세계까지 정리하려고 한다. 귀문 구절곡을 통째로 삼키고자 한다.

“필요하면 곡주와 부곡주를 죽여. 아마 쉽게 말을 듣지 않을 거야. 필요하면 곡 전체를 전멸시켜도 돼. 훈수는 여기까지. 곡을 어떻게 장악할지는 스스로 알아서 해.”

“넷!”

네 명이 일제히 대답했다.

“취운. 오곡.”

“넷!”

취운이 즉시 포권하며 대답했다.

일곡에서부터 사곡까지는 공의들을 관리한다. 현재 중원에서 벌이고 있는 일들을 모두 접수해야 한다.

오곡은 정보 수집이 주 임무다.

곡이 맡은 일의 특성상 곡주와 부곡주가 알고 있는 정보는 대단히 중요하다.

취운은 그런 것까지 모두 흡수해야 한다.

“화요(火曜), 육곡. 적화, 칠곡. 소명(昭明), 팔곡, 사사(娑砂), 구곡. 시한은 이틀. 이틀 후에는 곡주(谷主)가 되어서 각 곡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할 수 있도록 해.”

“넷!”

취화원 살수 아홉 명에게 구곡을 맡겼다.

각기 곡 하나씩을 맡아서 정리해야 한다. 쉬운 곳도 있고, 어려운 곳도 있을 것이다.

칠곡에는 혈치검사라고 이지를 잃은 무인들이 있다.

생각만 해도 피 튀기는 싸움이 예상된다.

각 곡의 곡주와 부곡주의 무공도 만만치 않다.

취화원의 장로와 비견할 수 있는 무공들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예전 같으면 건드려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들은 이제 겨우 사생락 맛을 본 정도인데, 저들과 싸울 수 있을까? 곡을 장악할 수 있을까? 문도들까지 휘어잡기는 곤란할 것 같고, 예상하기로는 전원 몰살을 택할 것 같은데.

그래도 좋다. 귀문이 문을 닫는 한이 있어도 취화원의 힘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몽설이 말했다.

“자신 없으면 지금 말해. 괜히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우린, 살아남아야 하니까. 살아남으면 사생락을 깨우칠 수 있어. 죽으면 복수고 뭐고 없어.”

모두 침묵했다.

누군가가 자신 있다고 말하면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됐어. 도움은 없어. 힘들다 싶으면 빠져나와. 절대 죽지 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제야 아홉 명의 살수가 일제히 포권했다.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 귀문 곡주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데도 싸우고자 한다. 냉정하게 판단한 끝에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좋아. 가!”

몽설은 아홉 살수를 구절곡으로 내보냈다.

“제가 뒤를 봐줄까요?”

팔 장로가 말했다.

몽설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맡겨보죠. 어떻게 하나.”

한 번 뒤를 봐주기 시작하면 항상 봐줘야 한다.

어떤 일을 시켜도 불안해지고, 수행하기 힘들다고 생각되는 일은 아예 시키지 못한다.

본인에게 맡길 줄 알아야 한다.

“지금부터 모레까지 염라전을 닫아요. 이틀 후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 보죠.”

몽설은 정말로 염라전을 닫아버렸다.

* * *

몽설은 아홉 명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다.

같은 명령? 아니다. 크게 나누면 명령이 두 개다.

각각 맡은 곡을 점거하는 일은 같지만, 명령을 수행하는 방법은 전혀 달라야 한다.

몽설은 필요하면 전원 몰살해도 좋다고 했다.

그 방법은 육칠팔구, 네 곡에만 사용할 수 있다.

육칠팔구, 네 곡은 사람이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오직 노동력만 제공한다. 그러니 굴복하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내쫓거나 베어도 무방하다.

화요가 맡은 육곡은 청부를 관장한다.

취화원도 귀문 청부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육곡에 ‘청부 시행 중’인 사건은 없다. 진행 중인 사건이 없는 것이다. 청부 시행은 일이삼사 곡이 맡아서 진행하고 있으니, 의뢰된 사건만 넘겨주면 육곡 소임은 끝난다.

육곡은 ‘청부 완료’와 ‘청부 의뢰’만 존재한다.

육곡에 있는 자를 모두 죽이면 청부 의뢰 사건이 날아간다. 어떤 사건이 들어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사건들이 없어도 다른 사건이 계속 들어온다.

육곡을 정리하고 이후에 들어오는 사건을 차분히 살피면 된다.

적화는 재물을 관리하는 칠곡을 맡았다.

육곡보다 더 쉽다. 전문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 무인은 모두 죽이고, 일꾼만 거두면 된다. 일꾼도 귀문에 충성하겠다면 전멸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책이다.

깨끗이 청소하고 새로 시작하면 된다.

재화를 관리하는데 알아야 할 게 많지 않다. 대부분은 장부로 관리되니, 장부만 찾으면 된다.

팔곡과 구곡은 칠곡보다도 더 쉽다. 소명과 사사는 운 좋게도 거저먹었다.

두 곳은 장부조차도 찾을 필요가 없다.

두 곡은 구절곡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먹을거리, 입을 거리, 마실 거리만 제공하면 된다.

오곡 후반 쪽은 점거하기가 매우 수월하다.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매우 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반면에 일곡부터 오곡까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단,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 경계서는 무인부터 곡주에 이르기까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일이삼사 곡은 살아있는 생물이나 다름없다.

일과 사람, 모두가 살아서 꿈틀거린다. 중원 무림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일과 엮여 있다. 현재 청부가 진행 중이어서 어느 한 곳만 선이 끊겨도 치명적이다.

이들을 말살시키면 귀문은 창립 초창기로 돌아간다.

사곡과 연관된 모든 인맥이 끊긴다. 귀문이 벌인 모든 일이 중단되고, 많은 사람이 죽는다.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고, 배신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지원을 받지 못해서 죽는 사람이 가장 많다.

일개미들, 공의를 죽이는 일은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 생각해야 한다.

* * *

월영은 동기 중 은신술이 단연 뛰어나다.

취화원 살수는 입문 초기에는 세간에서 불리던 이름, 혹은 문주나 장로가 지어준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다가 첫 살행을 하면 검명(劍名)이 주어진다.

월영은 수련 초기부터 첫 살행을 할 때까지 은신술에서 매우 큰 강점을 보였다.

그래서 ‘달그림자’라는 검명을 부여받았다.

스으으읏!

그녀는 개울을 따라서 일곡으로 스며들었다.

경계서는 무인들이 보인다.

긴장하고 있지는 않다. 긴장할 이유가 없다.

매일 경계를 서지만 침입하는 사람도 없고, 일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하는 일 없이 꾸벅꾸벅 졸다가 교대 시간이 되면 자러 들어가는 일이 반복된다.

누가 존재 여부조차 알려지지 않은 귀문을 공격하러 온다? 생각할 수도 없다.

스읏!

월영은 귀신처럼 미끄러져서 그들 앞에 섰다.

“엇!”

경계 무인들이 비로소 낯선 자를 발견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혹시 일곡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잘못 보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난데없이 사람이라니?

슈웃! 퍽!

월영은 손을 뻗어냈다.

경계 무인 두 명은 주절주절 잡담을 늘어놓고 있다가 풀썩 꼬꾸라졌다.

월영은 무인을 죽이지 않았다. 마혈만 제압했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 무인들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일곡주 거처는 이미 알고 있다.

취화원 살수들은 염라전에만 틀어박혀 살았지만, 귀문에 무관심할 수 없지 않나.

“음!”

월영은 단숨에 뛰쳐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일곡주를 죽이는 명령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들어가겠다. 하지만 명령은 그게 아니다. 일곡을 접수해서 일곡주가 되어 돌아오라는 것이다.

일곡을 온전히 수중에 넣어야 한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문득, 소호, 청란, 규화가 생각났다. 그녀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들 중 누구도 마음 놓고 사생락을 펼치지 못한다.

곡주를 손에 넣어야 한다. 어떻게 하든 수하로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일단 고민해 보지만 방법이 없다. 그러면 결국 죽여야 한다.

‘아무리 늦어도 날이 밝기 전에 처리해야 해.’

마혈이 제압된 자들까지 깨어나면 어쩔 수 없이 대살육을 벌여야 한다.

일곡을 완전히 망가트려야 한다.

“음!”

월영은 고민을 거듭했다.

* * *

스으읏!

일곡주의 거처로 잠입해 들어갔다.

일곡주는 산속에 아방궁을 꾸며놓았다. 산을 평평하게 닦고 전각을 네 채나 지었다. 뒷산 쪽으로는 화려한 정원도 있다. 계곡물을 끌어들여서 연못도 만들어 놨다.

쒜에에엑!

월영은 거침없이 전각 안으로 뛰어들었다.

“누구냐!”

경계 서던 무인이 거칠게 물어왔다.

월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이미 살검이 터졌으니까.

“으악!”

소리를 질렀던 무인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아아악!”

전각에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월영은 일부러 살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사생락을 펼치되, 은밀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신형을 환히 드러내고 공격했다.

‘어쩔 수 없어!’

월영은 몰살을 선택했다.

지금까지 명령받은 것을 수행만 했지, 계략을 구사한 적은 없다. 그러니 생각을 거듭한다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일곡을 몰살시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웬 놈이냐!”

일곡주가 급히 뛰쳐나왔다.

‘대환도(大環刀)!’

월영은 일곡주의 병기를 알아봤다. 순간,

스읏!

월영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혈검을 내둘렀는데, 유령처럼 싹 사라졌다. 그런데,

“크윽!”

일곡주가 갑자기 비틀거리면서 걸었다.

곡주의 등에는 장검이 꽂혀 있었다.

장검 한 자루가 등을 파고 들어가서 가슴 앞까지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두 가지 실수. 사생락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강자를 알아보지 못한 방심.”

월영은 쓰러진 일곡주의 등에서 검을 뽑아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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