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第二十四章 명부판관(冥府判官) (2)
약속한 이틀 후, 염라전이 열렸다.
제일 먼저 사곡을 맡은 규화가 나타났다.
그녀는 가장 편한 일을 맡았다. 사곡 곡주와 부곡주는 이미 제거된 상태다.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사곡에 들어가서 문도를 휘어잡으면 된다.
그런데 그녀는 온몸이 피투성이다.
해바라기 꽃, 규화!
언제나 생글생글 웃어서 규화라고 부른다.
항상 밝고 활기차다.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염라전으로 들어서는 표정이 매우 침울하다.
규화가 웃지 않았다.
팔곡과 구곡을 맡은 소명과 사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섰다.
두 여인은 생기에 차 있다. 의복에 피도 묻어 있지 않다. 순조롭게 일이 풀린 듯하다.
밝을 소, 밝을 명. 소명.
춤추는 모래, 사사.
취화원 살수들은 밝다, 맑다, 청초하다는 뜻을 가진 검명을 많이 사용한다.
살수가 지닌 어두움을 떨쳐버리려는 의도다.
중원에 나가면 어둠에 길들어야 한다. 음도(陰道)를 걸어야 하고, 음도에서 죽어야 한다. 죽으면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시신도 거두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죽음이다.
그래서 애써서 밝다, 맑다는 의미를 검명에 심어놓는다.
두 여인은 그리 밝지는 않다. 평범하다. 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아낙과 다르지 않다.
두 여인이 조용히 염라전으로 스며들었다.
염라전을 개방한 지 두 시진이 지났을 때, 붉은 꽃 적화가 불처럼 빛나는 화요와 함께 들어섰다.
그리고 조용하다.
사곡이 제일 먼저 입전했고, 육칠팔구 곡이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일이삼 곡, 그리고 오곡이 남았다.
전반부에 있는 곡들은 예상하기로는 가장 빠르거나 가장 늦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몰살시켰다면 가장 빨리 입전할 것이고, 포섭 회유를 한다면 가장 늦게 나타날 것이다.
포섭, 회유가 통했나?
정오가 지날 무렵, 세 사람이 염라전에 나타났다.
달그림자 월영, 탁 트인 호수 소호, 맑은 방울 청란.
세 여인은 그야말로 혈인이다. 온몸에 피가 안 묻은 곳이 없다. 청란은 아직도 검을 들고 있다. 핏물이 눌어붙어서 검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무지막지한 살육전이 예상된다.
어떻게 된 일인가? 전멸을 시도했나? 그러면 상대도 안 되는 자들을 죽이면서 왜 이렇게 늦었나?
최악의 경우다.
달아나는 자들까지 처리하느라고 늦었다. 그래서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흠씬 젖어있다. 도주하는 자들을 잡느라고 산을 몇십 번은 오르락내리락한 것 같다.
가장 마지막으로 오곡을 맡았던 비췻빛 구름, 취운이 모습을 보였다.
아홉 명 모두 임무 완수, 염라전으로 들어섰다.
* * *
“전멸…… 시켰습니다. 죄송합니다.”
월영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호도 고개를 숙였다.
청란, 규화도 같은 말을 했다.
이제 구절곡에 살아있는 공의는 없다. 귀문이 벌였던 모든 일이 끊어졌다.
월영, 소호, 청란, 규화 모두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내 사람으로 만들어서 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골수까지 귀문 사람이라는 판단이다.
“소각했습니다.”
취운이 취화원 언어로 말했다.
화원을 가꾸다 보면 벌레 먹은 나무가 나온다. 그럴 경우, 뿌리째 뽑아서 불에 태운다.
취화원 살수가 ‘소각’이라는 말을 사용할 기회는 많지 않다. 조직이나 문파를 완전히 멸살시킬 때만 쓰는 말이기 때문에 장로 중에서도 ‘소각’을 해본 사람이 드물다.
취운이 소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제오곡에 어떤 피바람이 불었는지 익히 짐작된다.
“저도.”
옆에 서 있던 화요가 말했다.
제육곡 정상에는 염라전이 있다. 경계도 삼엄하다.
산이 굉장히 높거나 큰 것도 아니라서 육곡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면 염라전에도 들린다.
지난 이틀 동안 비명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생존자는 없다. 전멸이다.
상황은 칠곡부터 호전되었다.
“혈치검사는 모두 살렸어요. 백치 상태이기 때문에 다행이에요.”
“혈치검사를 부리는 방법은?”
팔 장로가 물었다.
“찾았어요.”
적화가 숨 한 모금 돌린 후에 말했다.
‘고문!’
모두 즉시 짐작했다.
혈치검사는 주인의 명령만 쫓는다. 그리고 주인은 제육곡 무인 속에 섞여 있다.
그들을 골라내서 잔인하게 고문했다.
혈치검사를 어떻게 하면 부릴 수 있는지 말했다면, 아주 혹독한 고문을 한 것이다.
팔곡과 구곡은 상황이 더 좋다.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귀문을 거의 모른다. 일반 사람들이다. 곡으로 들어오는 출입구도 다르다. 뒤쪽 입구를 통해서 물건을 조달하고는 돌아간다.
사람들은 구절곡을 어떤 문파의 비밀 수련 장소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몽설은 차분하게 모든 말을 다 들었다.
귀문이 완전히 날아갔다.
청부를 하는 공의는 전멸해 버렸고, 정보도 문서 몇 조각만 남았다. 중원과 연결된 통로를 모두 끊겼다. 하다못해 전서구를 부리는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다.
제칠곡이 차지한 재화도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진짜 보물은 중원에 퍼져 있다. 집, 땅, 점포, 배 등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재물이 있다.
그런 것을 모두 잃었다.
아홉 명의 살수는 명령을 수행했다. 곡을 점거했다. 다만 수하가 없는 일인 곡주가 되어서 돌아왔다.
답답하다. 이럴 바에는 귀문을 점거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산에 가서 둥지를 트는 게 더 빨랐을 것이다. 사람을 죽일 필요도 없었고.
이게 뭔가? 귀문만 세상에서 없앴지 않나.
“주세요.”
몽설이 팔 장로에게 말했다.
“하나씩 이리 와.”
팔 장로가 아홉 살수에게 말했다.
월영이 팔 장로에게 갔다.
“수고했다. 여기! 이거 가져가.”
팔 장로가 일(一)이라고 적힌 목함(木函)을 가리켰다.
월영이 나무상자를 가지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은 소호가 갔다. 그녀도 이(二)라고 적힌 나무상자를 들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장 마지막 사사까지 아홉 명 모두 숫자가 적힌 나무상자를 받았다.
몽설이 말했다.
“모두 연공하는 동안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름대로 수집했어. 열어봐.”
모두 목함을 열었다.
목함에는 몽설이 적어놓은 종이 뭉치가 하나 가득 들어있었다.
“이건!”
규화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녀가 열어본 목함에는 제사곡이 현재 추진하는 청부가 소상히 기재되어 있었다.
제사곡이 움직였던 중원 인맥, 자원,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일들.
“아!”
취운도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육곡 문서각을 보전했다. 아무도 문서를 태우지 못하게 차단했다.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하지만 몽설이 준 목함에는 취운이 생각도 하지 못한 것, 정말 기가 막힌 것들이 기재되어 있었다.
중원 조직망이다.
정보를 받아오고, 분류하고, 보관하고, 내주는 일까지 실질적으로 오곡주가 했던 모든 일이 기재되어 있다.
한 마디로 오곡주의 머리를 떼다가 목함 안에 넣어두었다.
“이걸…… 어떻게……?”
취운이 몽설을 보며 물었다.
“아까 말했잖아. 모두 운공할 때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적화, 돈을 풀어. 아낌없이. 모두 적화에게서 돈을 받아서 조직을 재건해. 일할 사람들을 구하라고. 어디서 구하는지는 알지? 난 일절 간여하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만들어.”
몽설이 웃었다.
“넷! 알겠습니다!”
취운이 즉시 포권을 취했다.
“알겠습니다. 곧 수습하겠습니다!”
월영도 포권을 취했다.
언니들이 포권을 취하며 존경의 예를 보낸다. 몽설을 귀문 문주이자 취화원 원주로 대한다.
단순한 예의가 아니다. 진정한 예의다.
* * *
‘위험한 여자야.’
아걸은 고개를 내둘렀다.
몽설은 귀문을 점거한 것이 아니다. 취화원을 점거했다. 팔 장로는 물론이고 취화원 살수 아홉 명을 심복으로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생락까지 수련시켰다.
지금 취화원은 전대 취화원보다 열 배는 강하다.
사생락을 수련한 무인 두 명이면 취화원을 멸절시킬 수 있다. 이번 산곡 싸움에서 보여주었듯이, 단신으로 한 문파를 멸절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전대 취화원주는 아홉 살수 중 그 누구도 상대하지 못한다.
그만큼 취화원이 강해졌다. 그리고 그들 모두 몽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정말 위험한 여자다.
겉은 말랑말랑해서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데, 안은 강철로 휘감겨 있다.
몽설, 말 그대로 몽설이다.
부드러운 눈에 현혹되면 안 된다. 눈 속 깊이 들어가면 산사태가 휘몰아친다.
그런 여자가 정혼녀다.
한없이 보호해야 할 것 같은 여자였는데, 일파의 존주로 우뚝 서고 있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정동이 될 것이다.
취화원 복수를 하려면 당연히 정동부터 쳐야 한다. 하지만 그곳을 치려면 생각할 것이 있다.
서리형개를 이길 수 있나?
그 판단이 먼저다.
정동을 건드리면 서리형개가 즉각 나선다.
어차피 언젠가는 서리형개와 부딪쳐야 하겠지만, 그때가 지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박! 사박!
아걸은 산길을 걸었다.
이제 적은 없다. 긴장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걸어도 된다.
울긋불긋한 낙엽이 보였다.
‘벌써 가을이군. 올겨울은 무척 춥겠어.’
아걸은 만산홍엽(滿山紅葉), 붉고, 노란색으로 활활 불타고 있는 산을 보며 걸었다.
* * *
몽설이 왔다.
아침에 와서 차 한 잔 마시고, 저녁을 같이 먹는다. 하루에 두 번은 꼭 찾아온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다르다. 취화원을 안정시켜서인지 더 차분해진 느낌이다.
반찬을 집어 먹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린다.
“일이 잘된 것 같은데,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걸이 물었다.
“밥 먹고 말해. 할 이야기 있어.”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한데? 뭔데?”
“이야기가 기니까 밥부터 먹자.”
몽설은 말하지 않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
두 사람은 정원으로 나왔다.
산속은 밤이 차다. 불어오는 바람에 제법 찬 기운이 섞여 있다. 그래서인지 하늘에 떠 있는 달빛도 시리게 느껴진다.
“나 추워.”
아걸은 장삼을 벗으려고 했다.
“아니, 안아줘.”
아걸은 몽설의 등 뒤로 가서 그녀를 꼭 안았다.
“무슨 이야기인데, 이렇게 뜸을 들여? 말해봐. 뭔데?”
“이젠 들을 때가 된 것 같아. 긴 이야기라도 들을 테니까 말해줘.”
“긴 이야기?”
“우리 아버지, 어머니 어떻게 돌아가셨어? 자세히 말해줘. 누가 우리 부모님을 왜 죽였는지, 어떤 식으로 죽였는지 알아야지.”
“……아직 안 돼.”
“알아. 안 되는 거. 풍도곡 사람들이 원수라면 아직은 역부족이지. 그래서 오빠 싸움도 내게 맡겼으면 해.”
“내 싸움?”
“오빠 싸움이 아니라 우리 싸움을 했으면 해. 항상 둘이 같이 생각하고 의논해서 싸우자. 그럼 최소한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덜 외롭잖아. 사부 원수, 부모 원수. 결국, 같은 원수잖아.”
‘역시 위험한 여자라니까.’
아걸은 몽설을 더 깊이 안았다.
사실, 몽설은 이 말을 꽤 오랫동안 참아왔다.
진작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었을 텐데, 힘이 생길 때까지 꾹 눌러 참았다.
지금도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풍도곡이나 성검문과 싸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해줘도 괜찮을 것 같다. 신중한 여자이니까.
“꽤 긴 이야기인데, 어디서부터 말해줄까?”
“천천히 이야기해. 나…… 오늘 여기서 잘 거야.”
“뭐?”
아걸은 급히 안고 있는 팔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몽설에게 꽉 잡혀 풀 수 없었다.
몽설이 말했다.
“지금 이 팔 풀면 영원히 나 잃어.”
아걸은 팔을 풀지 못했다.
‘역시…… 위험한 여자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