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第二十四章 명부판관(冥府判官) (3)
“앞으로 내가 싸우라면 싸워. 물러서라고 하면 물러서고. 군말 없이 따라주기?”
“그건 너무한데?”
“몸에 상처 생기는 거 싫어.”
몽설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여자는 정말 종잡을 수 없다.
천변만화(千變萬化), 조석지변(朝夕之變) 등 어떤 말을 사용해도 설명이 부족하다.
조금 전까지 환하게 웃던 여자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린다.
이렇게 할 수가 있나? 어떻게 웃다가 울 수 있지? 눈물이 마음대로 만들어지나?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그래.”
몽설이 품에 찰싹 감겼다.
아걸은 아주 크게 실수한 것이 있다. 엄청난 실수인데, 아침에 눈을 떴을 때야 깨달았다.
여자는 같이 잠을 자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여자가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남자가, 아걸 자신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재 몽설은 중원 어디에 내놔도 꿋꿋이 살아갈 정도로 강하다.
혈검경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벌써 제이식을 마치고 제삼식으로 들어서고 있다.
소축십검과도 검을 겨룰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아걸 눈에는 마냥 약해 보였다. 자신이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젯밤에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같이 밥을 먹을 때만 해도 전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
‘이 여자가 과연 정동을 칠까? 취화원도 얻었고, 자신감이 생겼으니 친다고 할 텐데. 아직은 안 돼. 어떻게 말린다? 워낙 고집이 세서 걱정이네.’
일단 만류해 보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같이 나서 줄 생각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그 생각조차 달라졌다.
이 여자가 다치는 게 싫다. 목숨에 지장이 없더라도 검에 맞는 것이 싫다.
몽설이 너무 약해 보여서 불안하다.
‘앗차!’
아걸은 비로소 마음의 변화를 감지했다.
누군가를 아낀다? 보호한다? 제길!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전에도 몽설을 받아들일 생각은 있었다. 몽설의 정혼자이니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자.
실제로도 몽설을 아끼는 마음이 깊었다.
몽설이 빨리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동굴 수련까지 자청해서 해주지 않았나.
그런데 정말로 내 사람이 되고 보니 그 정도가 아니다.
너무 푹 빠졌다.
단순히 약점이 생긴 것이 아니다. 가장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사람이 생겼다.
아걸은 자신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몽설의 눈물 한 방울은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내는 고문보다도 효과가 크다.
아걸이 말했다.
“어떻게 할 건데?”
“오빠 지금 별호가 혈도비자잖아.”
“좋지 않지.”
“많이 안 좋지. 그러니 좋은 별호를 얻어야지.”
“별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데. 난 혈도비자든 뭐든 관계없어. 그것보다 더 나빠도 신경 안 써.”
“내 말대로 한다며?”
“…….”
아걸은 입을 열지 못했다.
“우선은 일홀도를 완성해. 난 혈검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릴게. 이번 겨울은 여기서 조용히 보내. 내년 봄쯤에는 구절곡에도 사람이 꽉 찰 거야. 그때 움직여. 괜찮지?”
“그래.”
아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이 다른 생각은 일절 들지 않았다.
* * *
아걸은 반철도를 들고 바위 앞에 섰다.
바위를 적이라고 생각하고 일홀도를 전개한다.
겨울 동안 딱 한 가지만 이뤄낼 생각이다. 바위를 치지 않고 칼을 멈추는 것.
필살도를 어떻게든 순화시켜 볼 생각이다.
파앗!
신형을 쏘아냈다.
감각과 육신과 목표가 한 덩어리다. 이미 끊어지지 않는 줄로 연결되었다.
퍼억!
반철도가 바위를 쳤다.
바위를 치지 않고 멈출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깊은 구멍을 파내고 말았다.
몰안이 너무 깊다. 남들은 정신 집중을 하지 못해서 안달인데, 너무 함몰되어도 좋지 않다.
정신 집중을 풀어야 한다. 바위를 치기 전에 ‘그만!’하고 제동을 걸어주어야 한다. 칼을 멈춰도 좋고, 옆으로 비켜서 지나가도 무방하다. 치지만 않으면 된다.
문제는 타격이 끝난 다음에야 몰안이 풀어진다는 것이다.
아걸은 여기서 단서를 찾았다.
오체진감과 육신이 연결되어서 몰안이 일어난다. 몸은 잊히고 오직 보는 것만 남는다.
그렇다고 감각이나 육신 중에서 하나만 삐끗해도 몰안이 깨지지 않을까? 타격이 이루어지기 전에 삐끗 어긋나는 법을 찾아내면 필살도가 깨질 텐데.
스읏! 파앗! 퍼억!
오체진감도 육신도 무너지지 않는다. 몰안은 계속 유지된다. 일홀도가 정확하게 터진다.
아걸은 삼십육 문주의 일홀도를 펼쳐봤다.
삼십육 문주의 일홀도 역시 몰안 상태에서 펼쳤다. 하지만 자신의 일홀도를 펼칠 때처럼 완벽한 집중은 되지 않았다. 칼도 보이고, 육신도 보이고, 상대도 보였다. 셋 중 하나를 무너트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왜 같은 방법으로 도법을 펼치는데,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되는 것일까?
삼십육 문주의 일홀도 중에는 자신이 찾아낸 일홀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 일식이지만, 필살도다. 변초(變招)도 없다. 칼과 상대방이 일직선으로 그어지고, 쭉 나아간다.
변초는 타격 직전에 이루어진다.
베고, 찌르고, 내리치고, 올려치는 모든 동작이 타격 직전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솔직히 말하면 아걸 자신조차도 도초가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한다. 몰안이 상대방의 움직임을 잡아내고, 오체진감이 즉시 초식을 변형시킨다.
감각에 완전히 의존하는 도법이다.
흔히 선천적으로 반사신경을 타고났다는 말을 하는데, 타격 직전의 아걸이 바로 그런 상태다.
슛! 쒜엑! 퍼억!
바위를 쳤다. 워낙 강하게 쳐서 손아귀가 얼얼거린다.
“오늘도 안 됐네?”
몽설이 바위를 보자마자 말했다.
“펼칠 수는 있는데, 어떻게 펼치는지 모른다. 말이 되나?”
“말 되지. 진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여기 있잖아. 호호!”
몽설이 눈을 한쪽으로 쓸었다. 그리고 잔가지를 쌓아놓더니 부싯돌을 켰다.
탁! 탁!
잔가지에 불이 붙었다.
몽설은 불 위에 물 주전자를 얹었다. 차를 끓이려는 것이다.
좋은 다기에 차분한 마음으로 마시는 차가 아니다. 차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지도 않는다. 그러니 다도 같은 것은 애당초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물 끓여 마시듯이 차를 마신다.
추우니까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속만 달래준다.
하지만 아걸은 이 시간이 매우 즐거웠다.
사랑하는 여인과 나란히 앉아서 차를 마시면 행복하다는 느낌이 사르르 일어난다.
산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것도 좋고, 으깨져서 가루가 되어 버린 바위도 좋고, 얼음물이 되어버린 개울도 좋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좋다.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좋은데.”
몽설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구곡주는 수하들을 영입하느라고 바쁘지만, 세 사람만은 한가한 시간을 즐긴다.
아걸, 몽설, 팔 장로다.
아침부터 밤까지 오직 무공 수련에만 매진한다. 다른 사람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다. 온 산을 뛰어다녀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묘한 것이 세 사람 모두 비무를 할 수가 없다.
아걸의 일홀도는 필살도라서 할 수가 없다.
몽설은 혈검을 조절하지 못한다. 아걸처럼 강한 힘밖에 뻗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조절하는 방법을 안다. 제삼식을 오 성 정도만 수련해도 힘 조절이 가능해진다.
아직은 그녀도 필살검이다.
아걸과 몽설이 이러니 팔 장로 혼자서 사생락을 수련하는 수밖에 없다.
모두 각각 수련해야 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도와주지 못한다.
“곡 사정은 어때?”
“괜찮아. 약 절반쯤 채워진 것 같아. 예상보다 빨리 채워지고 있어. 언니들이 능력 있어.”
“…….”
“왜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말?”
“내가 언니들 능력 있다고 했잖아.”
“능력 있는 거야 원래 아는 건데 뭘.”
“그럼 원주 칭찬도 해줘야지.”
“하! 미안, 미안. 원주가 능력 있으니까 밑에 사람들도 잘하는 거지 뭐. 안 그래?”
“호호호!”
몽설이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는다. 별말도 아닌데 배꼽을 잡는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닿는다.
“한 잔 더 줄까? 아직 따뜻해.”
“그래.”
아걸은 사양하지 않고 찻잔을 내밀었다.
겨울은 무척 추웠다.
온종일 아궁이에 불을 때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놨는데, 그걸 모두 태우고 몇 개 남지 않았다.
올겨울에는 눈도 많이 왔다.
눈이 종아리까지 쌓여서 길을 나설 수 없었다. 길과 절벽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도 구곡주는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휘몰아치는 강풍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중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수하들을 긁어모았다.
곡주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할 수 있는 자들이다.
곡주는 문파를 건립한다는 생각으로 문도를 모았다. 곡 하나가 문파 하나인 셈이다.
날이 많이 풀렸다.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추위도 한결 가셨다. 제법 따뜻한 햇볕이 마당을 내리쬔다.
쉬잇! 파앗! 퍼억!
아걸은 여전히 바위를 쳤다.
바위를 치지 말아야 하는데, 중간에서 끊지를 못했다.
겨우내 반철도를 쥐고 살았지만, 필살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봄을 맞이했다.
몰안이 없으면 전대 문주들의 일홀도를 펼치지 못한다.
그러니 몰안은 기본이다. 몰안은 도신일체(刀身一體)를 말한다. 칼과 한 몸이 된 상태다.
중원 무인들은 검신일체(劍身一體)를 이루면 초고수 반열에 올라섰다고 말한다. 일홀도에서는 겨우 초입에 들어선 것뿐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안 돼. 결국, 내 일홀도는 필살도로 사용해야 해. 이 칼을 맞는 자는 죽는다.’
아걸은 묵묵히 반철도를 쳐다봤다.
자신의 일홀도를 얻으면 전대 문주들의 일홀도는 버려도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같이 사용한다.
* * *
몽설은 용의주도하다.
그녀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미리 준비해두었다. 상황만 맞춰지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게.
드디어 상황이 맞춰졌다.
“취운이 내 대리야. 취운이 귀문을 관리해.”
“네.”
취운이 포권했다.
봄이 찾아올 무렵, 구절곡도 안정되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용된다. 일이삼사 곡은 청부를 진행한다. 오곡은 정보를 수집하고, 육곡은 청부를 살핀다. 아귀 맞추듯 착착 돌아간다.
“가시죠.”
팔 장로가 먼저 나섰다.
긴 겨울 동안 산에 머물다가 중원으로 내려간다니 마음이 들떠있다.
“잠깐 기다려. 오빠 와야지.”
“아이고! 그 오빠, 염라전에 온 지 오래됐어요.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 그래요?”
몽설이 활짝 웃으면서 일어섰다.
귀문을 취운에게 맡기고, 아걸과 함께 중원으로 나간다.
나가서 아걸 방식이 아닌, 그녀의 방식으로 성검문과 풍도곡을 자극할 것이다.
쉬이잇!
몽설이 신법을 펼쳐서 염라전 밖으로 뛰어나갔다.
“신나셨네. 저렇게 좋을까?”
월영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