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第二十五章 위적(圍敵) (2)
봄이 지나고 초여름이 다가왔다.
사람들이 긴 소매 옷을 벗어 던지고 짧은 팔이 달린 옷을 꺼내 입었다.
날이 많이 풀렸다.
정오 무렵에는 벌써 한여름 분위기까지 풍긴다.
아걸과 몽설은 석 달 여정 끝에 초도성(礎燾城)에 도착했다.
초도성에는 성검문이 있다.
초도성 전체가 성검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단단히 자리 잡았다.
“결국, 왔네.”
아걸이 중얼거렸다.
“혈도비자는 여기까지 못 와. 은밀히 숨어서 온다고 해도 벌써 죽었을걸? 명부판관이니까 온 거야.”
“그래.”
“뭔 말이 그래? 고맙다, 감사하다. 이런 말 없어?”
“숙소 잡아놓고 있어.”
“어디 가게?”
“성검문.”
“혈첩 주러?”
“비무하러 왔으니 당장 해야지. 오늘 혈첩 주면 내일은 비무할 수 있어.”
“하! 내가 못 말려. 오빠가 단순한 거야, 사내가 모두 이렇게 단순한 거야?”
“너 이제 막 나간다?”
“오빠한테 내가 막 나가지 못할 게 뭐 있어? 안 그래?”
“끄응!”
아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길을 오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말로는 절대로 몽설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눈물과 애교, 그리고 논리정연한 이치.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반박하려고 해도 몽설 말이 맞으니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여기 왔으니까, 이제 급한 건 성검문이야.”
“별로 급해 보이지 않는데?”
“성검문은 그동안 오빠 무공을 자세히 분석했을 거야. 하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무공이거든? 호기심 반, 경계심 반. 이놈들이 여기 왜 왔지?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성검문에 가서 비무하라면서?”
“비무는 해야지. 하지만 비무가 능사는 아냐. 성검문을 단숨에 짓밟을 힘이 있다면 몰라도 살살 달래가면서 쳐야 해.”
몽설이 눈빛을 반짝 빛냈다.
몽설 말이 또 맞았다.
두 사람이 초도성에 들어가기 무섭게, 잘 차려입은 무인 네 명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들은 매우 정중하게 인사했다.
“누구시죠?”
“아! 제 소개를 먼저 해야 했는데. 전 쇄벽철장(碎碧鐵掌)이라고 합니다.”
“저는 벽력마권(霹靂摩拳).”
“용풍추보(龍風趨步)라고 합니다.”
“한쇄조(寒碎爪)라고 합니다. 아마 들어보시지 못하셨을 겁니다. 워낙 빈천해서.”
네 명이 각기 자기소개를 했다.
이들 네 명은 유명하다.
모두 상당한 일류고수다. 각기 문파를 건립해도 충분할 정도로 무공이 높다. 그리고 지금은 성검문 빈객(賓客)으로 있으면서 무공을 연구한다.
장법, 권법, 보법, 조법!
싸움은 자고로 병기를 버리고 적수공권으로 치고받아야 제 맛이 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실제로 병기가 없다.
무림을 종횡하면서 누구와 싸우게 되는 일이 있어도 항시 맨손으로 싸웠다.
“유명하신 분들이시네요. 그런데 저희에겐 무슨 볼일이……?”
“볼일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 유명한 명부판관이 오신다기에 무림 동도로써 술 한잔 같이할까 하고 기다렸죠. 괜찮으시면 가시죠. 저희가 객사를 잡아놨습니다.”
‘흠!’
아걸은 몽설에게 대화를 맡기고 멀리 우뚝 서 있는 첨탑(尖塔)을 쳐다봤다.
성검문 첨탑이다.
성검문을 치기 전에 풍도곡부터 정리하려고 했는데, 일이 거꾸로 되었다.
몽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네 명은 성검문 빈객 중에서도 상당히 대우받는 고수들이다.
이들이 괜히 왔을 리 없다.
몽설 말대로 성검문을 대신해서 먼저 찔러보려고 왔다. 이곳에는 왜 왔는지, 성검문에 불리한 일은 없는지, 문제를 어디까지 일으킬 것인지.
“좋아요. 기왕 숙소를 잡아놓으셨다니 거기서 묵죠.”
“오늘도 심판이 있습니까? 하하! 심판이라는 말이 워낙 유명해서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아뇨. 오늘 점심에 마부를 처리했어요.”
“아! 그 사건! 우리도 깜짝 놀랐지 뭡니까? 그 마부는 성검문에서도 종종 불렀는데, 그놈이 그런 짓을 하는 줄 까마득히 몰랐다는 거 아닙니까?”
한쇄조가 민망한 듯 말했다.
마부는 연약한 사람에게 공짜로 마차를 태워주었다. 주로 밤길을 가는 사람들을 유인했다.
두 명도 좋고, 세 명도 무방했다.
그들은 안심하고 마차를 탔다.
마부는 인심 좋은 사람이고, 자기 쪽에도 사람이 많으니 안심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마차를 타는 순간, 의자에 묻은 미약이 펄럭 피어난다.
사람들은 즉시 혼절한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확인해 볼 시간조차 없다.
마부는 그들을 집으로 데려가서 죽였다.
도대체 왜 사람을 죽일까?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을 끌어다가 죽이는 이유가 뭘까?
죽이는 재미다.
사악한 인성이 마부를 사람이 아닌 괴물로 만들었다.
명부판관은 오늘 낮에 그에게 심판을 내렸다.
마부 집에서는 마부가 기념으로 죽은 사람들에게서 빼낸 소장품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 소문이 벌써 초도성까지 전해졌다.
“여깁니다. 우리 초도성에서 제일 크고 조용한 객잔이죠. 여기 특실로 예약해 놨습니다. 정원도 있어서 산책도 되고, 간단한 아침 연공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따 저녁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저녁에요?”
“아! 괜찮으시면 저녁 식사 겸 반주 한잔하면서 소협 이야기 좀 들을까 합니다만…….”
“그러세요. 이따 오세요.”
몽설이 꺼릴 것 없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
* * *
“자.”
몽설이 붉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홍첩. 성검문에 가서 던져줘.”
“홍첩? 이따가 성검문 사람과 저녁 같이 하기로 하지 않았어?”
“그거와 이건 별개잖아. 저녁은 저녁이고, 비무는 비무고. 아까 성검문으로 달려갔으면 모든 사람이 지켜봤을 거야.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내일 비무를 치러야 해.”
“지금은?”
“지금은 아무도 우릴 주시하지 않아. 참! 월도는 놓고 가는 것 알지? 눈에 띌 필요 없잖아.”
“조용히 가서 홍첩만 전해라?”
“비무는 전통적으로 혈무대에서 치르되, 날짜와 시간은 저쪽에 양보했거든. 그러니 조율하고 조율하다가 통보해 올 거야. 우린 최대한 적의를 보이지 않고 비무만 하는 거야.”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모르겠다. 그냥 확 치면 되잖아?”
“성검문을? 이길 수 있어?”
“…….”
“정말 무모하다니까. 저들에게 최대한 시간을 주면 저들은 정말 비무로 생각할 거야. 그런데 장소가 혈무대야. 죽어도 말을 못 하는 곳이지.”
“혈무대. 음!”
“저쪽에서는 소축십검이 나올 거고. 그럼 최소한 한 명은 죽일 수 있어. 한 명씩 줄여나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성검문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어.”
“하하! 이런 걸 쓰고는 소축십검과 싸우지 못해.”
아걸이 방갓을 가리켰다.
“장로님께서 다른 걸 구하고 있어. 면구(面具)를 구할 생각인데, 요즘은 면구 만드는 사람도 귀해서 쉽지가 않네. 비무 때까지 못 구하면 복면이라도 써야지 뭐. 아! 그런데 객실 정말 좋다. 쉴 거야? 난 목욕 좀 하고 올게. 여기 객실 안에 욕탕도 있어.”
몽설이 피곤한지 기지개를 쭉 켰다.
* * *
아걸은 큰 방갓 대신 작은 방갓을 썼다. 옷도 깔끔한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단지 방갓 크기만 바꾸고 옷만 갈아입었는데, 명부판관과는 전혀 다른 인상착의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월도를 들고 있지 않다.
대로를 걷고 있지만 그를 주시하는 사람이 없다. 티끌만 한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아걸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해가 석양으로 지고 있다.
지금쯤 성검문 빈객 네 명이 객잔을 방문했을 것이다. 몽설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을 터이다.
성검문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다.
성검문에 홍첩을 건네는 것뿐인데, 꼭 이런 식으로 기습하듯이 건네줘야 하나?
성검문은 상대가 누구든 홍첩만 건네면 받아들인다.
성검문이 창건된 이후, 단 한 번도 홍첩을 거절한 적이 없다. 모든 홍첩을 받았고, 비무를 했으며, 이겼다.
그래서 성검문을 무적, 천하제일 문파라고 부른다.
위세로 천하제일이 된 것이 아니다. 천하를 움켜쥘 만한 무공이 버티고 있다.
하지만 명부판관의 비무를 받아들이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명부판관은 심판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월도를 겨누는 모든 사람이 악인이다. 죽은 사람 전부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마였다.
그런 칼이 성검문을 향하면 모양이 좋지 않다.
그래서 성검문은 될 수 있으면 회유를 하고자 한다. 비무를 원하면 혈무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은밀히 진행하는 것도 괜찮지 않냐고 의사 타진을 한다.
성검문 빈객과 몽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저벅! 저벅!
아걸은 성검문 정문을 향해 걸었다.
“무슨 볼일이십니까?”
수문 무인이 정중하게 물어왔다.
“비무를 하려고 왔습니다.”
아걸은 품에서 홍첩을 꺼내 수문 무인에게 건넸다.
“비무? 하하! 비무가 끊긴 지 오래전인데, 아직도 도전하는 사람이 있네. 어느 문파이신지?”
“이리저리 떠돌며 배운 무공이라서, 문파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홍첩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홍첩에는 이름, 별호, 나이, 문파, 무공, 무림에서 활동한 이력 등등이 기재되어 있다.
칼을 맞대는 상대방에게 최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게 예의다.
“웬만하면 그만두시지. 이번 달 월직이 독안혈검 전가성 어른입니다. 검에 사정을 두지 않아요. 아마도 살아서 혈무대를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아! 독안혈검. 영광입니다.”
아걸은 정말 영광이라는 듯 포권을 취해 보였다.
“휴우! 정 그렇게 죽기가 소원이라면….”
수문 무인은 홍첩을 받았다는 표시로 붉은 나무, 적목(赤木)을 건네주었다.
“연락은 어디로 하면 되겠습니까?”
“홍첩 안에 기재해 놨습니다.”
“됐습니다. 가도 좋아요. 홍첩에 적힌 날짜와 시간에 혈무대에 오르면 됩니다. 이 홍첩은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수문 무인이 관례대로 말했다.
성검문은 비무를 늦추지 않는다. 상대방이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맞춘다. 단, 장소만 혈무대다.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은 전통이다.
당연히 홍첩을 접수하는 권한도 수문 무인에게 주어져 있다.
뒤로 미루지 않을 비무여서 특별히 홍첩을 보고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홍첩 내용은 비무 당일에 공개되니, 그전까지는 취소할 수 있습니다.”
“그럼 비무 날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걸이 포권을 취했다.
홍첩은 전달되었다.
월직이 독안혈검 전무성이다. 소축십검 중 첫째.
자신을 잡아들이지 못해서 가택연금에 처했다고 들었는데, 풀렸나 보다.
독안혈검도 자신을 안다.
그는 독안혈검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독안혈검은 아걸을 본 적이 있다.
면구가 꼭 필요하다.
몽설 말대로 정 안 되면 복면이라도 써야 한다. 방갓을 쓰고 전가성 같은 고수와 싸울 수는 없다.
‘홍첩 내용을 볼 걸 그랬나?’
아걸은 홍첩에 기재된 내용이 자못 궁금했다.
홍첩은 몽설이 기재했다. 중간에 열어보지 못하게 밀봉된 상태로 전달되었다.
아걸은 정말로 홍첩을 건넬 때까지만 해도 어떤 내용이 기재되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몽설이 어련히 알아서 잘 적었을까.
지금은 궁금해진다. 문득 궁금해졌다.
홍첩에는 강호 상에서 벌인 일도 기재하는 게 관례다.
몽설을 명부판관이 한 일을 어떤 식으로 기재했을까?
‘궁금해.’
아걸은 몽설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몽설만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어진다. 세상이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