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第二十五章 위적(圍敵) (5)
혈무대는 성검문 밖에 세워져 있다.
성검문 안으로 들어서면 성검문 영역이 된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무인이 타 문파의 영역에 들어가면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혈무대를 성검문 밖에 세웠다.
비무는 완전히 공개된다.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볼 수 있다. 일찍 온 사람은 앞자리에서 구경하고, 늦게 온 사람은 뒤에서 구경한다.
비무가 벌어지는 날이면 인근 다루나 객잔, 불탑 등은 하루에 한 달 수입을 벌어들인다.
혈무대가 환히 보이는 이층, 삼층, 사층 창가 자리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다. 차를 시키지 않아도 차 백 잔 값을 내야 한다. 그래도 자리가 없다.
혈무대는 한동안 쓸쓸했다.
성검문에 도전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더니, 십여 년 전부터는 아예 뚝 끊겼다.
그런데 혈무대가 다시 열린단다.
이번에 도전한 사람은 어제까지만 해도 인면수심 인간을 죽인 명부판관이다.
명부판관이 성검문도 심판할 수 있을까?
명부판관 무공이 일군에게도 통할까? 공부 허도기의 수제자나 다름없는데?
일군이 살인마일 리는 없고, 일군을 이긴다면 살인마를 내놓으라고 할 것 같은데, 누구를 요구할까? 그러면 성검문은 요구한 자를 내줄까?
혈무대를 바라보는 눈길 속에는 온갖 궁금증이 담겼다.
* * *
“명부판관이다!”
“월도다!”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아걸이 걸어가는 길에는 인벽(人壁)이 세워졌다.
좌우로 사람들이 빼곡히 서서 아걸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고 했다.
손을 뻗거나 만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아걸이 살짝 스치기라도 할 것 같으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명부판관은 무서운 사람이다.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지를 수 있는 저승사자다. 사실, 살인이 아니다. 심판이다. 하늘을 대신해서 심판하는 사자다.
하루에 한 명에서 두 명은 꼭 죽인다.
세상에 이런 인간이 어디 있나? 아무리 나쁜 자라도 이토록 많이 죽일 수는 없다.
다른 생각도 일어난다.
나는 잘못한 게 없나? 명부판관에게 밉보일 짓은 하지 않았나? 그랬다면 당장 월도가 날아올 텐데…….
이래저래 명부판관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저벅! 저벅! 저벅!
아걸이 사람들 사이를 걸어갔다.
“헉! 귀, 귀신!”
방갓에 가려진 얼굴을 보겠다고 허리를 숙여서 올려다보던 사람이 깜짝 놀라 자지러졌다.
아걸 얼굴은 귀신 형상이다. 놀랄 수밖에 없다.
아걸은 피식 웃었다.
물감칠을 한 얼굴에 하얀 이가 돋보인다. 그 모습이 더 섬뜩하고 괴기하다.
사람들이 길을 쫙 열어주었다.
독안혈검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오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혈무대 앞에 세워진 해시계가 정오에 조금 못 미친다.
아걸은 혈무대에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체진감을 일으켰다. 몰안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확 풀었다. 집중했다가 풀고, 풀었다가는 다시 집중했다. 집중은 쉽게 되는데, 이완이 쉽지 않다.
집중이 일(一) 만큼 쉽다면 이완은 오(五)만큼 어렵다.
몰안을 일으키지 않은 상태에서는 당연히 이완도 쉽게 된다. 확 풀린다. 하지만 몰안까지 들어가면 이완이 무척 어렵다. 집중을 지속시키기가 더 쉽다.
아걸은 심신일체(心身一體)를 계속 유지했다.
이런 운공을 하다 보면 옆에서 사람이 떠들든 잠을 자든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시간의 흐름도 잊는다. 전혀 지루하지 않다.
“후우우웁!”
긴 숨이 들어오고 나간다.
끼이익! 덜컹!
잠시 후, 성검문 정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독안혈검 전가성이다.
소축십검 중 정문을 나선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다른 십검은 관례에 따라서 문안에 머문다. 아마도 혈무대가 내려다보이는 삼층 전각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일군이야.”
“일군, 오랜만에 뵙네.”
사람들은 존경심을 담아서 말했다. 일군이라는 말을 할 때도 지극히 공경하는 어조였다.
몽설 말대로 성검문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것 같다.
사람들을 위하고, 불우한 사람을 돕고, 무공에 정진하고, 명예를 탐하지 않고.
저벅! 저벅!
전가성이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동현. 뭐냐?”
전가성이 대뜸 말했다.
‘확실히!’
아걸은 성검문에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스읏!
아걸은 월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하는 게 순서에 맞지 않겠나?”
“질문이 곧 답이니까.”
“해봐.”
“허도강, 현정부인, 허문승, 허문학, 허문기. 이들 중 네 검에 묻은 피는 누구 것이냐?”
“……후후후! 역시.”
전가성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측했다는 투였다.
“네놈이 그렇게 말하니 정말 궁금해지는군. 너, 누구냐?”
“방금 순서를 말하지 않았나? 그럼 순서를 지켜. 내 물음에 먼저 답하고 물으라고.”
“아무도 아니다.”
“흠!”
“그분들 죽음이야 마인이 저지른 것. 내게 묻는 게 비정상이지. 자, 이제 말해봐라. 누구냐?”
아걸은 눈살을 좁혔다.
독안이 말한 말은 하나가 진실이다. 하나는 거짓이다.
검에 누구의 피도 묻히지 않았다는 말은 진실이다. 전가성은 멸겁에 간여했지만, 직접 검을 쓰지는 않았다. 묘법제일이니 뒤에서 계획을 수립했을 것이다.
뒷말은 거짓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말을 한 것에 불과하다.
아걸은 월도를 들어 올렸다.
“정오가 지났어. 그만 검을 뽑지?”
“이번 일, 큰 실수 했다는 생각이 안 드나?”
“실수?”
“네 첫 살인이 금강 낚시꾼이지? 그때부터 어제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보고했다. 네가 누군지 금방 알게 될 거야. 아니, 누군지 알게 되기 전에 죽으려나?”
스릉!
전가성이 검을 뽑았다.
소축십검 네 명이 아걸을 잡고자 풍도곡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십군 이도창이 죽었다.
남은 셋은 결국 아걸을 만났다. 그리고 이도창의 죽음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셋이 합공을 펼쳤다.
셋! 소축십검 셋이 합공했다.
그런데도 놈을 놓쳤다. 그중 둘은 잠기일력타를 사용했는데, 즉사시키지 못했다. 전 공력을 운집해서 일 검에 담았는데, 그런 검을 맞고도 살았다.
그 후, 소축십검은 조명십해에 매달렸다.
독안혈검 전가성도 예외일 수 없다. 잠기일력타가 무용지물이라면 더 강한 무공을 수련해야 한다.
전가성은 조명천검 중 우중광류에 집중했다.
빗줄기를 뚫고 한 줄기 빛이 흐른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폭우가 쏟아질 때, 비를 맞지 않고 한 줄기 검광을 쏘아낼 수 있어야 한다.
폭우가 쏟아지는데 어떻게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나?
축검(縮劍)이면 가능하다.
축검은 조명십해 중 하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리 열 개 중 하나다. 그것도 상위 네 개, 사상(四上)에 포함된 무리다.
축검은 진기를 응축시켰다가 터트리는 것을 말한다. 강하게 압축한 후에 일시 폭발시킨다. 그러면 잠기일력타보다 두 배는 강한 빠름이 일어난다.
그런데 진기를 응축시킨다는 것, 이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진기는 물과 같다. 물을 한군데에 모을 수는 있지만, 강하게 압축시킬 수는 없다.
물은 얼음이라도 될 수 있지만, 진기는 얼리지도 못한다.
불가능한 무공을 가능케 한 절공, 삼륜축첩공(三輪蓄疊功)이다.
잠기일력타를 끌어낸 상태에서 다시 한번 잠기일력타를 끌어낸다. 그리고 또 한 번.
잠기일력타를 시전하면 전신 진기가 한 군데로 밀집된다. 단전은 텅 빈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운기를 시도하면 운기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운공법에 따라서 의념(意念)은 흐른다.
의념이 진기를 친다. 여기서 압축이 일어난다.
압축 강도는 처음에는 약하게, 두 번째는 강하게 누른다. 잠기일력타가 꽁꽁 동여매진다.
이것을 일시에 쏟아내는 게 축검인데, 이래도 되나? 이런 식으로 진기를 쏟아내도 몸이 성할까? 언뜻 생각해도 보기(補氣)를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진기를 모두 쏟아냈으니 보기할 것도 없고, 그냥 누워서 쉬나?
잠기일력타를 쏟아내면 하루나 이틀 정도 쉬어야 한다.
축검을 사용하면 일 년에서 이 년가량 차분히 보기하면서 쉬어야 한다.
츠으으읏!
전가성은 축검을 일으켰다.
명부판관을 보는 순간 알았다. 자신이 상대하기 벅찬 엄청난 고수라는 사실을.
명부판관은 그저 월도를 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보라. 도신일체, 칼과 몸이 하나가 되어 있다. 칼을 쓰면 몸이, 몸을 쓰면 칼이 따라서 움직인다.
명부판관은 육신이 없다. 오직 칼만 존재한다.
기수식에서 도신일체를 보일 정도라면 도법은 볼 것도 없다. 자신이 지닌 모든 재간을 쏟아내야 한다. 그것이 설령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이라도 펼쳐야 한다.
츠으읏! 츠으으읏!
삼륜축첩공을 일으켰다. 진기를 검에 모았다.
잠기일력타가 일어나고, 계속해서 일으킨 의념이 진기를 밀어내고, 압축시킨다.
파앗!
명부판관이 먼저 신형을 쏘아냈다.
역시 생각했던 그대로다. 칼과 몸이 하나가 되어서 쏘아져 온다. 곧 몸을 사라지고 칼만 남는다. 번뜩이는 월도가 사정없이 전신을 쪼개온다.
텅! 파아아아앙!
전가성은 일심으로 축검을 터트렸다.
그는 응축된 진기가 터지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텅! 하고 무엇인가가 터져나갔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은 벌써 명부판관의 몸 앞에 이르렀다.
우중광류가 심장을 뚫었다. 검이 가슴을 뚫고 들어가서 등 뒤로 삐져나왔다.
‘잡았어!’
전가성은 웃었다.
사람들은 조용했다.
수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지만,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명부판관은 전가승이 내지른 검을 그대로 맞았다.
검이 몸을 뚫고 들어가서 등 뒤로 삐져나왔다.
핏물이 확 터졌다. 명부판관의 육신도 검력에 떠밀려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순간, 월도가 전가성을 쳤다.
왼쪽 귀를 잘라내고 어깨를 파고든 칼이 비스듬히 휘어지더니 오른쪽 옆구리로 빠져나왔다.
전가성의 상반신이 하체와 분리되어 툭 떨어졌다.
검은 전가성이 훨씬 빨랐다. 거의 두 배는 빨랐다. 검을 찌르고도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심장을 찌르지 못했다.
전가성의 검은 심장보다 한 참 아래인 옆구리를 찔렀다.
어떻게 전가성 같은 고수가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을까? 왜 제대로 검을 쓰지 못했을까?
반면에 명부판관은 정확하게 월도를 사용했다.
처음 노렸던 부위를 놓치기는 했다. 정수리부터 파고들 생각이었지만 옆으로 밀려서 귀부터 잘라냈다.
검을 맞은 충격에 초식이 흔들렸다.
그것뿐이다. 월도는 전가성을 단 일도에 즉사시켰다. 죽음 외에 다른 결과는 생각할 수 없는 필살도다.
“쿨럭!”
명부판관이 거센 기침과 함께 선혈을 토해냈다.
전가성의 검력에 내상을 크게 입었다.
지금 상태라면 성검문 빈객 중 누구라도 공격만 하면 죽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명부판관은 혈무대에 서 있지 않나.
털썩!
아걸은 혈무대에 주저앉았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곳,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비무대, 이곳보다 세상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아걸은 전가성의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뒤로 벌렁 쓰러졌다.
혼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