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第二十六章 퇴로(退路) (1)
‘일어나!’
몽설이 중얼거렸다.
아걸이 쓰러지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흔들리지 않겠다. 아걸이 죽어도 눈물 같은 것은 흘리지 않겠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복수를 생각한다. 성검문과는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 수 없으니까.
온갖 생각을 떠올렸고, 굳은 다짐을 했다.
하지만 아걸이 검에 맞는 순간, 단단하게 쌓았다고 생각했던 다짐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눈물이 계속 흘러내린다.
아걸은 비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내려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몽설은 느낀다. 아걸에게는 신형을 날릴 만한 힘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걸은 비무대가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많은 사람이 쳐다보기 때문에 안전하다.
몽설도 그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다.
비무대에서 내려오면 당장 위험해진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는 습격하지 않겠지만,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의원을 찾는다거나 객잔으로 들어가면 당장 공격할 것이었다.
성검문은 자신들이 나서지 않고, 비겁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내세우리라.
아걸이 죽어도 성검문과는 관계가 없다.
벌써 그런 공격을 여러 차례 당했다. 팔 장로 같은 경우에는 아직도 숨은 곳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공격하는 자들이 치밀하고 매섭다.
‘그래. 거기 있어. 거기가 안전해. 하지만 반드시 일어나야 해. 거기 계속 누워 있으면 안 돼. 알았지?’
몽설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다. 비무대에 올라서 아걸의 상처부터 살펴봤으면 좋겠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걸을 낚아채는 것은 수월하다. 하지만 그 후에는 처절한 싸움이 기다린다. 싸움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싸워줄 수 있다. 하지만 싸우는 와중에 아걸을 잃게 된다. 저들은 자신보다 혼절한 아걸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그런 점이 두렵다.
‘빨리! 빨리 나와! 너희들 가만히 있을 것 아니잖아! 빨리 나와서 아걸을 살려!’
몽설은 무서운 눈으로 성검문을 쏘아봤다.
* * *
저벅! 저벅! 저벅!
성검문에서 일단의 무인들이 줄을 맞춰서 뛰어왔다.
그들은 질서가 있었다. 당황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정해진 규범대로 움직였다.
척! 척! 척! 척!
그들은 비무대 위까지 줄을 맞춰서 뛰었다.
비무대에 올라서자 그중 한 명이 열에서 이탈해 전가성에게 갔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전가성의 맥문을 움켜잡았다. 목 옆에 손가락을 대고 맥도 살폈다. 덮인 눈꺼풀을 밀어 올려 눈동자도 보고, 입도 벌려보았다.
슷!
그가 손을 들었다.
줄지어 달려온 무인들이 질서 있게 움직였다.
네 명이 들것을 붙잡았고, 네 명이 전가성을 들어서 들것 위로 옮겼다.
척척척! 척척!
들것에 전가성을 실은 무인들이 성검문을 향해 느린 속도로 달려갔다.
무인들을 뒤쫓아서 단정한 모습의 노인이 비무대에 올랐다.
한눈에 봐도 의원이다.
성검문은 무림 문파인 만큼 부상자가 많이 생긴다. 그래서 명의를 초빙해 성검문에 상주시키고 있다.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느릿느릿 걸어서 아걸에게 갔다.
역시 살았나 죽었나 살핀다. 가슴을 열어 상처를 보고, 치료를 시작했다.
지혈산을 뿌린다. 침을 놓아서 지혈을 시키고, 금창약을 바른다.
의원은 차분하면서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처를 치료해 나갔다.
“역시 성검문이야. 적인데도 치료해 주잖아.”
“치료는 전에도 해줬지. 하지만 일군이 쓰러졌는데도 치료해 줄 줄 몰랐는데.”
“성검문은 비무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 내가 쓰러질 수도 있고, 네가 쓰러질 수도 있다. 비무 전에 성검문이 항상 하는 말이잖아. 비무는 비무로 끝낸다. 더는 원한을 쌓지 않는다.”
“말이 쉽지. 그동안은 성검문이 계속 이겨왔으니까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거고. 지금은 졌잖아.”
“일군이 크게 다치지 말아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죽은 것 같은데?”
“에이. 죽었으면 저 사람들이 저렇게 태연할 수 있겠어. 살았으니까 태연한 거지. 좌우지간 성검문이 큰 문파는 큰 문파인가 봐.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잖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사람들은 어느새 명부판관이 성검문에 도전한 사실을 잊어버렸다.
성검문에 어떤 잘못이 있어서 명부판관이 칼을 들이댔는지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잠시 한쪽으로 밀쳐놓았다.
의원이 아걸을 치료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성검문은 바로 명문 정파의 자리를 되찾았다.
성검문이 쌓아온 역사는 진하다. 정의를 위해서 힘써온 역사가 강하고 장렬하다.
웬만한 흠집 가지고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명부판관이 성검문에 칼을 들이댄 것은 뜻밖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검문이 반드시 나쁘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할 뿐, 십중팔구는 명부판관이 오해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비무대를 쳐다봤다.
‘살았어!’
몽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활짝 웃었다.
아걸이 살았다. 살아있을 줄은 알았다. 하지만 혼절해서 많이 걱정했다. 자신이 직접 돌봐주지 못하고 아걸이 스스로 일어나야 하는 처지라서 더 안타까웠다.
아걸은 붕대를 다 감고 매듭을 묶을 무렵, 움직임을 보였다.
손발을 꿈지럭거렸다.
움직임이 너무 미미해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걸을 치료하는 의원은 눈치챘다. 아걸만 주시하고 있는 몽설도 알아챘다.
전가성은 확실히 치명타를 날리지 못했다.
일군의 검은 맹렬하고, 빠르고, 강했다. 하지만 정확하지 못했다. 아니, 일군은 정확하게 검을 꽂아 넣었지만, 아걸이 일군의 공격을 비틀어 버렸다.
‘그래! 그래야지! 잘했어! 잘했어, 오빠!’
몽설을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또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도 막지 못했다.
그녀는 울면서 웃었다.
* * *
무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음!”
쓰레기 이뢰가 신음했다.
전가성은 즉사했다. 조금이라도 숨이 붙어 있었다면 살리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침 한 대 놓을 필요가 없을 만큼 확실하게 절명했다.
점박이 오진복은 칼자국을 유심히 살폈다.
월도가 심장을 쑤시는 모습은 봤다. 그래서 명부판관이 어떤 초식으로 전가성을 죽였는지 안다.
“변초가 전혀 없어.”
“그러니까 미치겠다는 거지. 그냥 일직선을 쭉 뻗어낸 칼에 당한 거잖아. 어떻게 이런 칼에 당하지? 선수도 쳤고, 먼저 가격했고, 반격도 느리고. 이거야 원!”
진개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명부판관이 전개한 초식은 매우 평범했다. 그냥 월도를 쭉 뻗어냈다.
누구라도 피할 수 있는 도법이다.
그런데도 당했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이런 공격은 시기(時機)에 주안점을 둔다. 공격 시점을 정확하게 잡아챘다.
명부판관의 칼은 피할 수 없을 만큼 적시에 들이쳤다.
반격하는 칼을 보면서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반격 시점이 정확했다. 무턱대고 공격한 것이 아니다. 전가성의 공격을 예리하게 주시한 끝에 공격에 맞춰서 칼을 뻗어낸 것이다.
아걸은 이런 칼을 쓰기 위해서 몸을 내줬다.
먼저 검을 맞고, 반격했다. 정확하게 반격타를 꽂아 넣었다.
“이런 칼, 본 적 있어?”
진개가 물었다.
소축십검이 쳐낸 공격을 감당하고 반격타를 사용한 공격.
이 정도의 무공이라면 적어도 풍도곡 칼 귀신 정도는 되어야 한다.
진개는 머릿속에 일홀도를 그렸다.
‘아걸인가?’
아니다. 아걸과 싸워봤지만, 명부판관의 도법은 아걸의 일홀도와는 전혀 다르다.
또 일홀도라면 버젓이 모습을 드러낼 리 없다.
“이런 칼은 초식을 알아내기 힘들어. 문파를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
오진복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두 사람은 잠시도 전가성의 시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성검문이 비무에서 패했다.
월직이 도전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무적으로 군림하던 소축십검이 무너졌다.
그들 눈앞에서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일단 사부님께 알려야지?”
진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야지. 그럼 난 저놈 감시. 저놈을 살려 보낼 수는 없잖아. 차라리 비무대에서 죽는 게 훨씬 편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지.”
오진복이 말했다.
* * *
의원이 아주 작은 세침을 꺼냈다.
의원은 세침을 심장 부위와 폐 부위, 옥예혈(屋碨穴) 두 군데에 푹 찔러넣었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시침이었다.
하지만 그 시침은 굉장히 잘못되었다. 폐의 활동과 심장 활동을 저해시킨다. 몸을 낫게 하는 시침이 아니라 폐 질환을 유발하는 시침이다.
의원은 아걸을 치료해주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은밀히 치명적인 위해를 가했다.
그때, 아걸이 눈을 번쩍 떴다.
의원이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의원의 몸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버렸다.
의원이 바르르 떨리는 눈으로 아걸을 쳐다봤다.
“빼지.”
“뭐? 뭘……?”
“지금 빼면 살려줄 수 있다.”
“저, 저 이건 치료…….”
아걸이 의원을 쳐다봤다.
감정 없는 무심한 눈이 의원을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한 마디만 더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당장 월도가 목을 뎅겅 잘라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워, 원하지 않으신다면…….”
의원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세침을 빼냈다.
아걸이 무심히 말했다.
“성검문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하나로 똘똘 뭉쳐 있네. 그걸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이 세상은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지고, 내 편이 아니면 미워하는 건 당연하니까.”
아걸이 의원을 다시 쳐다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무인을 모욕하지는 말아야지. 지금 이런 행동은 성검문 무인을 모욕하는 행위야. 정당하게 싸우면 성검문이 날 이기지 못할 것 같아?”
“무, 무슨 그런 소리를…….”
아걸이 품에 손을 찔러넣었다.
의원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걱정하지 마.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어.”
아걸은 품에서 홍첩을 꺼내 의원에게 건네주었다.
“가서 이걸 전해. 괜찮으면 나 좀 일으켜 주고. 무인이 너무 오래 누워 있으면 안 돼. 못 일어나.”
“그, 그냥 누워 있는 것이…….”
의원은 말을 하면서 아걸을 일으켜 앉혔다.
아걸이 말했다.
“그거, 지금 바로 전해 주는 게 좋아. 이미 많은 사람이 봤거든. 그러니 중간에서 빼돌리거나 딴짓하지 말고. 이건 무인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아걸이 눈을 감았다.
그는 주위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 * *
“홍첩이다!”
“또 홍첩이야! 세상에, 저런 몸으로 또 싸우겠다는 건가?”
“도대체 누구와 싸우겠다는 거야? 일군을 꺾어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거잖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명부 판관이 성검문에 또 홍첩을 건넸다.
방금 비무를 끝냈는데, 상대편이 졌는데, 그런데도 또 홍첩을 건네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명부판관의 의도는 명확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홍첩을 보내겠다는 거다.
정말로 성검문에 인면수심의 악인이 있나?
사람들은 명부판관이 나쁜 자만 공격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사람들은 성공문을 다시 의심의 눈으로 쳐다봤다.
성검문에 뭐가 있으니까 명부판관이 저런 몸으로도 홍첩을 던지는 게 아니겠나.
사람들은 비무가 끝났는데도 비무대를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