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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127화 (127/600)

#127화. 第二十六章 퇴로(退路) (2)

진개는 당황했다.

의원이 내미는 홍첩을 보고도 선뜻 받아들지 못했다.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명부판관이라는 작자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나! 비무 상대가 죽었으면 조문이라도 하고 홍첩을 내밀 것이지, 시신을 앞에 놓고 또 홍첩을 내밀어!

기가 막히고, 답답하고, 화가 치솟는다.

“후후……. 또 싸우자는 거네.”

오진복이 중얼거렸다.

소축십검 중 일군을 쓰러트렸다. 그러니 일군보다 더 강한 자가 나오라는 것이다.

성검문은 선택해야 한다.

도전자를 상대로 차륜전(車輪戰)을 펼칠 것이냐, 아니면 더 강한 자가 나갈 것이냐.

진개나 오진복이 나가면 차륜전이 된다.

상대방이 힘이 빠지고, 탈진할 때까지 계속해서 덤벼드는 꼴이 된다.

이런 싸움에서는 이겨도 떳떳하지 못하다.

일군보다 더 강한 사람이라면 문주밖에 없다.

무림 제일인 공부 허도기!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문주도 나가지 못한다. 천하제일인이 상처 입은 자를 상대로 검을 들 수는 없다.

결국, 명부판관은 싸울 수도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얄팍한 속임수를 쓴 것이다.

“결국, 우리를 개망신시키면서 자기에게는 타협안을 내밀라는 거네. 우린 꼼짝없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고. 하하! 내가 나가보지.”

오진복이 일어섰다.

* * *

저벅! 저벅!

오진복이 비무대를 향해 걸었다.

순간, 사람들 시선이 오진복에게 쏠렸다.

“오군이잖아?”

“오군이 나왔어! 일군에 이어서 두 번째 상대인가?”

“에이, 그럼 너무 치사하지. 명부판관은 다 죽어 가는데, 이게 정당한 비무야?”

“명부판관이 먼저 홍첩을 내밀었잖아. 그럼 죽어도 좋다는 뜻이 아닌가?”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다. 당연히 이런 말들이 나온다. 거기에 비무를 해서 명부판관을 죽이기라도 하면, 성검문은 정말로 치사한 문파가 된다.

오진복은 많은 시선을 받으면서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아걸은 아직도 운기조식을 풀지 않았다.

누가 비무대 위로 올라오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좌정한 채 운기에 몰두했다.

비무대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다.

오진복이 아걸 앞에 섰다.

“나 오군이다.”

“……가라.”

아걸이 대뜸 내쳤다.

“뭐라고?”

“내가 원하는 상대는 네가 아냐.”

“후후, 원하는 사람이 있나 보군. 누굴 원하나?”

오진복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성검문주 공부 허도기.”

아걸은 오진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검문주의 이름을 말했다.

대상이 확실했다. 분명했다.

‘공부 허도기’라고 말하는 소리가 너무 뚜렷하고 맑아서 비무대 주변에 있는 사람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문주님?”

“명부판관이 문주님을 지목했어!”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명부판관이 공부 허도기를 원했다. 달리 말하면 공부 허도기가 인면수심의 인간이라는 뜻이다.

성검문주는 명부판관의 심판 대상이다.

그동안 명부판관이 심판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악독했다. 그럼 성검문주 역시 나쁜 짓을 했나?

공부 허도기가? 무림 제일인자가? 백만대군의 무공 교두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부 허도기는 이미 증명된 사람이다.

무공과 경륜이 모두 증명되었다. 중원 무림 모든 문파의 장문인, 명숙이 공부를 인정했다. 초도성 사람은 물론이고, 공부를 아는 모든 사람이 공부의 은혜를 입었다.

명부판관은 그런 사람이 위선자라고 말한다.

이놈이 미쳤나? 하지만 단순히 미쳤다고 생각하기에는 뭔가 께름칙하다. 명부판관이 처리한 사람들은 악행이 너무 뚜렷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칫했으면 속고 넘어갔을 정도로 은밀했다.

성검문주에게 은밀한 비밀이 있나?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검문주가 아주 사소한 실수를 했고, 그것이 명부판관의 눈에 거슬렸지 않을까 하는 정도까지는 생각한다.

“문주님과 비무를 하겠다? 후후! 문주님은 워낙 바쁘셔서 성검문에 잘 계시지 않아.”

“기다리지.”

“여기서?”

“…….”

아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주님과 무예를 겨룰 생각이면 다음에 오지 그래? 언제 오실지 우리도 몰라서 하는 말이야.”

“…….”

“이렇게 하지. 비무를 육 개월 후로 하는 거로. 그동안 문주님께 연락을 취해 놓지. 문주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니, 우리한테도 시간을 줘야지?”

“육 개월 후. 약속하나?”

“뭐? 하하하! 하하하하! 성검문이 설마 너 하나 상대하지 못할까!”

“상대하지 못했잖아.”

“……!”

오진복이 눈을 부릅떴다.

아걸이 말했다.

“공판(公版)을 걸어라. 육 개월 후, 성검문주와 명부판관이 무예를 겨룬다고. 증인은 너. 비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결 정도면 괜찮지? 비무 상대를 기만한 죄로.”

“너무 몰아붙이는군.”

“일군을 이겼잖아. 이 정도 오만은 부릴 수 있어. 비무가 당당하면 공판을 써. 공판 쓰기가 어렵나?”

“좋아. 쓰도록 하지. 그때까지 살아있어라. 최대한 몸부림치면서 살아봐.”

나중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렇게, 비무대 앞에 공판이 걸렸다.

성검문 비무 통보.

일시(日時) : 병인년(丙寅年) 사월(四月) 십오일(十五日) 정오(正午).

비무 당사자 : 성검문주 대 명부판관.

비무 증인 : 오군(五君) 오진복

공판은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끔 큼지막하게 적혔다.

아걸은 그제야 일어섰다.

상처가 심해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칼을 집은 채 간신히 일어섰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힘들게 비무대를 내려갔다.

저런 몸으로는 오군도 상대하지 못한다.

오군의 눈꼬리 살광이 일렁거렸다.

잘못된 선택을 한 건가? 자신이 상대했어도 될 것 같은데. 욕 좀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차륜전으로 나섰어야 했나?

명부판관이 비틀거리면서 걸어갔다.

사람들이 쫙 갈라서면서 길을 내줬다.

어떤 사람은 비틀거리면서 쓰러지는 그를 부축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명부판관을 악인으로 보지 않는다.

만약 다른 무인이 성검문 일군을 쓰러트렸다면 당장 때려죽일 놈 쳐다보듯이 노려봤을 것이다. 하지만 명부판관은 문주에게 도전하기까지 했는데도 악의를 갖지 않는다.

차륜전을 펼쳤다면 성검문의 명망은 폭삭 주저앉았을 것이다.

‘오늘은 잘 참았어. 그래, 어디 네놈이 언제까지 살 수 있나 보자. 너, 이 순간부터 두 발 뻗고 잠들기는 틀렸어. 후후!’

오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 *

‘금검팔황(金劍八惶)!’

퍼뜩 진개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비무가 있기 전, 빈객들이 전초전을 벌였다.

다정나찰에게 은밀히 소식을 전하는 노파를 발견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다정나찰과 연관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또 무공도 범상치 않았다.

웃긴 것은 노파가 상당한 무공을 지녔는데도 빈객 중 노파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노파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던 것일까?

빈객도 놀랄 만한 무공을 지녔으면서 어떻게 무림에는 얼굴도 비치지 않았을까?

빈객과 노파가 부딪쳤다.

그 결과, 금검팔황이 죽었다.

노파가 다정나찰과 연관이 있다면, 명부판관과도 줄이 닿는다. 노파를 알면 명부판관도 알게 된다.

진개는 즉시 금검팔황의 시신을 찾았다.

“음!”

진개가 침음했다.

금검팔황은 목덜미에 일격을 당했다.

손속에 전혀 사정이 담기지 않은 공격을 당해서 검을 맞는 즉시 즉사했다.

금검팔황을 죽인 솜씨는 대단히 비상하다.

금검팔황은 금검문의 자랑이다. 성검문의 빈객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한 지역의 패자이거나 아니면 장문인, 또는 그와 비슷한 명숙이어야 한다.

금검팔황은 칠십육전 칠십육승이라는 놀라운 전적이 있다.

그런데 죽었다.

‘이게 무슨 검이지?’

진개는 목덜미 상처를 유심히 살폈다.

사인은 흉수가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다. 하지만 흉수의 무공까지 말해 주지는 않는다.

진개가 찾으려는 것은 흉수의 무공이다.

빈객과 노파가 싸울 때, 금검팔황은 금전일광(金剪一光)이라는 검초를 사용했다고 들었다.

금전일광은 금검으로 빛을 자른다는 검초다.

금검문 검공 중 가장 빠른 쾌검이다. 금전일광이 구성 경지에 이르면 검은 보이지 않고 금빛만 번쩍인다.

진개의 머릿속에 한 폭의 결전도가 그려졌다. 금검팔황이 금전일광을 펼쳐서 노파를 공격한다. 금검팔황이 가장 잘 치는 곳은 어깨, 이번에도 어깨를 노렸을 것이다.

그런데 노파가 피했다. 그리고 목덜미를 쳤다.

“굉장한 전환……!”

진개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금전일광을 피하고 몸을 휘돌렸다. 그리고 검을 내뻗는다. 그렇게 해야만 목덜미를 친다.

굉장히 빠른 전환, 신법 전환이다.

금전일광을 신법으로 피한 것이나 다름없다.

‘환술인가?’

얼핏 든 생각이다. 금전일광을 피할 만큼 빠른 신법이 많지 않다. 하지만 환술을 잘 쓰면 눈속임할 수 있다. 한두 번에 한해서 금전일광도 피할 수 있다.

진개는 고개를 저었다.

환술로 피했다면 역공을 가하지 못한다. 목덜미를 치지 못한다. 고작해야 뒤로 물러서는 게 전부다.

노파는 역공을 가했으니 진공(眞功)으로 피한 것이다.

진공이면서 굉장히 빠른 신법 전환, 금전일광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목덜미를 치는 검.

더욱이 성검문에 반기를 든 문파의 무공이라면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생락?’

진개는 이미 멸문한 취화원 절기를 떠올렸다.

죽은 취화원주의 사생락이라면 어떨까? 역시 안 된다. 취화원주와 금검팔황을 비교하면 호적수다. 팽팽하다. 누가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다.

만약 취화원주가 신법 전환을 일으켰다면, 금검팔황도 당장 쫓아갔다. 적어도 목덜미에 일격을 맞지는 않는다. 금전일광이 취화원주는 치지 못할 수는 있지만, 역공도 당하지 않는다.

노파가 취화원주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었다.

‘사생락…… 취화원주보다 더 강한 사생락…… 흠!’

진개는 금검팔황의 목덜미를 유심히 살폈다.

노파의 무공이 사생락이라면, 금전일광이 터졌을 때, 신법 전환을 하고 목덜미를 탁!

‘가능하다!’

진개는 노파의 무공을 찾은 느낌이었다.

취화원에 취화원주보다 더 강한 무인이 있을 수 있다. 아니면 은거한 장로일 수도 있다.

취화원이 존재할 때 말썽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다.

취화원주, 몽설, 아걸.

이번에도 취화원 절기가 나타나고, 말썽을 일으킨 자가 있다.

노파, 다정나찰, 명부판관.

“아걸!”

진개는 벌떡 일어섰다.

취화원이 존재한다면, 취화원 무공을 사용하는 사람이 여전히 활보한다면 명부판관은 아걸이다.

취화원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면 된다.

“후후, 후후후후!”

진개는 웃었다.

조금 있으면 회합을 연다.

오군이 약속한 비무, 일군 장례, 명부판관 문제 등등 의견을 나눠야 할 사안이 많다.

자신도 할 말이 생겼다.

모두가 알아야 할 아주 중대한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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