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第二十六章 퇴로(退路) (5)
아걸은 경계가 확 풀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나, 둘, 셋…….’
아직도 지켜보는 눈이 십여 개는 된다. 여전히 많다. 하지만 예전처럼 전신을 바늘로 찌르듯이 무수히 많은 눈이 지켜보지는 않는다. 질시 섞인 눈길 중 구 할 이상이 사라진 느낌이다.
아걸은 몽설을 떠올렸다.
‘분명히 가만히 있겠다더니…… 풋! 내가 그 여자를 믿은 게 잘못이지. 후후!’
아걸은 툴툴 웃었다.
지켜보는 눈이 괜히 사라졌을 리 없다. 분명히 몽설이 무슨 일인가를 했다.
몽설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쩔 뻔했나? 자신의 인생이 그려진다. 무조건 치고, 치고, 치고…… 맞고, 맞고, 맞는 혈로(血路)를 걷고 있을 것이다.
몽설을 생각한다거나, 지금처럼 도움을 받는다거나, 일이 수월하게 술술 풀리는 일 따위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몽설은 대단한 여자다.
무공은 자신이 강할지 모르지만, 어쩐지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금창약을 챙겨주시오.”
아걸이 차게 말했다.
“벌써 가시려고요? 안 됩니다. 지금 움직이면 상처가 덧나요. 더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의원이 만류했다.
의원의 만류 속에는 악심이 숨겨져 있다.
의원은 치료를 빌미 삼아서 아걸을 병실에 묶어놓을 생각이다.
사실, 의원은 성검문과 비밀리에 밀서 몇 통을 주고받았다.
아걸이 찾아오자마자 성검문에 보고했고, 성검문은 의원에게 밀명을 내렸다. 아걸을 맨 뒤쪽 병사(病舍), 전염병 환자를 격리해 놓는 외딴 병사로 몰아넣으라는 것이다.
의원은 그 일을 오늘 할 생각이었다.
맨 뒤 병사는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암살하기 딱 좋다.
아걸을 그곳에 몰아넣고, 빈객이 들이치면 지금 아걸 상태로는 꼼짝없이 당한다.
아걸이 말했다.
“금창약을…….”
의원이 아걸의 말을 끊고 재빨리 말했다.
“사실 제가 보려고 해서 본 건 아니고, 주위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봤는데. 칼에 이도 빠져있고, 피도 닦지 않아서…… 그래서 제 딴에는 도와드린다고 도검사(刀劍師)를 불렀습니다. 곧 도검사가 올 테니, 칼도 맡기시고…….”
의원이 한 말은 막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도검사를 불러서 조금 있으면 도착할 것이다.
의원은 칼도 치워놓을 생각이다.
기왕 암살할 생각이라면 저항도 적을수록 좋다. 칼을 들고 맞서는 것보다 맨손인 것이 처리하기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니 아걸이 지금 가면 안 된다.
“금창약을 주시오.”
아걸이 세 번째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만 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서 월도를 잡았다.
의원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걸의 의도가 너무 분명해서 차후에 벌어질 일이 쉽게 예상된다.
아걸의 눈에서 살광이 튀어나오는데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천하에 다시없는 바보일 것이다.
“아, 네네. 꼭 가시겠다면…….”
의원이 서둘러서 금창약을 챙겼다.
아걸은 의원을 나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초도성 성안에서는 성검문의 눈길을 따돌리지 못한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성검문 눈이다.
저들 모두가 의원처럼 아걸의 행방을 알려줄 사람들이다.
스으읏! 츠츠츳!
아걸이 골목길로 들어서자 당장 살수들이 따라붙었다.
담장 위, 지붕, 골목 어귀……. 사방에서 인기척이 감지된다.
저들은 아걸이 나올 것을 알고 이미 칼날을 준비해 둔 상태다. 아걸이 마음껏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도 안다. 상처가 깊어서 칼이나 제대로 들 수 있을까?
저들은 의원에게서 상세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그러니 아걸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걸은 그런 점을 알기에 일부러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저들에게 공격 기회를 줄 생각이다.
이것 또한 몽설이 말해 준 계획이다.
- 무작정 숨거나 도망치면 더 기를 쓰고 쫓아와. 힘들더라도 싸워야 해. 당연히 도망칠 거로 생각한 쥐가 느닷없이 뒤돌아서 고양이에게 덤벼들면 고양이도 깜짝 놀라서 물러설 수밖에 없어. 한 번의 싸움은 그런 효과가 있어.
“쥐새끼 노릇은 그만하지. 무인이라는 작자들이 뭐라는 짓이야?”
아걸이 중얼거렸다. 순간!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버럭 일갈이 터지며 하늘에서 칼바람이 일었다.
암중유영(暗中流影)!
어둠 속을 구름이 흐르는 듯 그림자가 곱게 흐르니 찾아낼 수가 없구나.
동영(東瀛) 암혼류(暗魂流)다.
암혼류는 수참류(水斬流)와 더불어서 동영 이대 인술 중 하나다.
성검문이 동영 인자까지 빈객으로 데려왔는가.
중원 살수 문파를 연구 분석하기 위해서는 동영 인자술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러니 단지 무공만 살펴보기 위해서 빈객으로 초빙했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쒜에엑!
어둠 속에서 검은 살광이 번뜩거렸다.
아걸은 진기를 일으켰다. 순간, 그의 신형이 유령처럼 흔들렸다.
상대방은 만취했을 때처럼 아걸이 흐릿하게 보일 것이다. 두 겹, 세 겹 겹쳐서 보인다.
“환술!”
어둠 속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쳐낸 검은 아걸을 맞추지 못했다. 몸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고 허공을 빗겨 쳤다.
그 순간, 월도와 상대방이 심장이 일직선으로 맞춰졌다.
도첨(刀尖)과 심장이 팽팽한 줄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줄이 일시에 팍! 당겨졌다.
일도직자(一刀直刺)!
월도는 상대방의 심장과 가장 가까운 거리를 일직선으로 쏘아갔다. 양쪽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칼이 날아오는 것을 눈치챌 사이도 없었다.
퍼억!
월도는 찰나의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상대방의 몸에 틀어박혔다.
“컥!”
상대방이 짧은 신음을 쏟아냈다.
상대는 일도에 즉사했다. 바로 일군 전가성을 죽인 칼, 바로 그 도법이다.
아걸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칼을 들고 잠시 기다렸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아걸이 일홀도를 꺼내자 선뜻 덤벼드는 사람이 없었다.
“또! 고작 이 정도인가!”
아걸이 숨어있는 자들을 도발했다. 그러자,
“킥킥킥킥! 킥킥킥!”
기묘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달려 나왔다.
작은 키에 몸이 뚱뚱해서 마치 공이 굴러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구사겸(小球死鎌)!’
아걸은 즉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소구사겸은 키가 무척 작다. 오 척밖에 되지 않는다. 몸은 굉장히 뚱뚱하다. 허리둘레가 오 척에 이를 것 같다. 그러니 멀리서 보면 꼭 공처럼 보인다.
소구사겸은 놀랄 만큼 탄력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검을 쳐내는 것보다 신법이 더 빠르다. 표창을 던지거나 활을 쏘는 것보다 두 발을 튕겨내는 게 더 빠르다.
소구사겸의 두 발은 용수철이다. 두 손 역시 용수철이다. 손에 들고 있는 낫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텅! 텅!
소구사겸은 달려오면서 힘차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바보 아닌가?’
아걸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칼은 상대방의 심장을 겨눈다. 도첨과 심장이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이제 일도직자가 터지면 상대방은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진다.
스읏!
아걸이 월도를 들어 올렸다. 순간,
터엉! 터엉!
소구사겸이 다시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허공에서 다시 퉁겨서 옆으로 쭉 밀려갔다. 허공에 있는 발판을 밟고, 옆으로 뛴 것처럼 보인다.
소구사겸은 순식간에 아걸의 우측으로 다가왔다.
소구사겸이 두 발을 오므렸다.
순간, 발밑에서 작은 발판이 드러났다. 그리고 소구사겸이 발판을 디딤돌 삼아서 다시 도약했다.
터어엉!
소구사겸은 신형을 허공에 둔 채 이리저리 사방을 돌아다닌다. 자유자재로 허공을 돌아다닌다.
‘이 신법…… 배울 만한데?’
아걸은 월도를 쳐내는 것도 잊어버리고 소구사겸의 신법을 유심히 살폈다.
“킥킥킥!”
소구사겸이 웃는다. 그리고 드디어 양손에서 시퍼런 낫이 툭 튀어나왔다.
쒜에에엑!
낫 두 자루가 날아왔다. 하나는 머리를, 다른 하나는 머리 위로 넘어가서 등을 찍는다.
허공을 돌아다니는 신법도 신기하고, 낫을 쓰는 용법도 기이하다. 대응하기가 무척 난해하다. 이럴 때는 앞으로 달려가거나 땅을 뒹굴어야만 낫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츠으읏!
아걸은 진기를 일으켰다.
낫을 맞더라도 상대가 노리는 곳은 내주지 않는다. 덜 위험한 곳을 내준다.
그의 신형이 파르르 떨렸다.
단전이 흔들린다. 경맥이 따라서 흔들리고 몸도 흔들린다.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손발을 떤다. 그리고 일순간에 신형이 두 개, 세 개로 쭉 불어났다.
월도는 상대방의 심장을 찾았다.
처음 심장에 초점을 맞춘 이후부터 계속 소구사겸을 쫓아다녔다. 그 후, 소구사겸이 다섯 번이나 신형을 퉁겨냈지만, 월도는 심장을 놓친 적이 없다.
문제는 거리다.
일도직자를 치는 순간 심장이 터질 거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파앙!
소구사겸이 다시 신형을 퉁겨냈다.
오른쪽에서 위로 솟구치더니 아걸의 머리 위로 이동했다. 쌍겸은 다시 거두어졌고, 양손에 잡혔다. 손이 잡힌 쌍겸이 머리를 찍어 내린다.
소구사겸이 공격해 온다. 거기가 좁혀졌다. 일도직자 거리가 만들어졌다.
파앙!
심장을 겨눈 칼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상대방이 쳐낸 쌍겸은 월도에 비하면 서너 배가 느리게 떨어졌다. 월도가 그만큼 빠르게 쏘아졌다. 일도직자 거리가 순식간에 압축되었다.
퍼억!
“컥! 킥킥…… 킥!”
소구사겸이 웃었다. 웃고 싶어서 흘린 웃음이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흘린 웃음이다.
소구사겸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가 일으킨 경련이 월도를 타고 손끝으로 전해졌다.
휘익!
아걸은 월도를 휘둘러서 도첨에 꿰인 소구사겸을 담벼락 쪽에 뿌려냈다.
시신을 모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일부러 비정하게 행동했다.
이런 모습들이 상대방에게 공포를 심어준다.
“다음! 함께 와도 좋다!”
골목은 조용했다.
빈객들은 공격하지 못했다.
의원이 말한 상태와 아주 다르다. 아걸이 생생하게 날뛴다. 이게 어디 다친 사람의 움직임인가.
사실 아걸은 사력을 다했다.
이제는 칼을 들고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미 봉합된 상처는 터져서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어둠이 훨씬 짙은 골목이라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저벅! 저벅!
아걸은 걸었다.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데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지켜보는 자들에게 허점을 보이면 안 된다. 절대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저놈은 괴물이야.”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됐다! 상대방이 아걸을 괴물로 봤다면 더는 공격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안전하다!
아걸은 진기를 두 발에 집중시켜서 한 걸음씩 힘 있게 떼어 놓았다. 몽설과 약속한 장소로 가야 한다. 어쩌면 갈 수 있을 것 같다. 고통이 죽일 듯이 일어나지만.
* * *
“무사했네?”
몽설이 한달음에 달려와 안겼다.
“나 많이 아픈데, 치료해 줄래?”
“당연하지. 이리 와.”
몽설이 아걸을 이끌었다.
“그런데 뭘 한 거야? 눈들이 일시에 떨어져 나갔어.”
“그랬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움직이지 않고 기다린다고 했잖아.”
“그래?”
“그래. 여기서 얌전히 오빠만 기다리고 있었어. 앉아. 치료해줄게.”
몽설이 아걸을 풀로 만든 침상에 앉혔다.
아걸은 금창약은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
몽설이 금창약을 준비해놨다. 고통을 줄이는 미약(媚藥)도 보였다. 상처를 씻기 위해 물도 끓여놨고, 상처를 꿰맬 때 쓰는 실과 바늘, 깨끗한 붕대도 보였다.
몽설은 이미 모든 걸 준비해놨다.
“나 좀 자도 될까?”
“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자. 자고 나면 훨씬 좋아져 있을 거야.”
“그럼 잔다.”
아걸은 풀잎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잠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