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133화 (133/600)

#133화. 第二十七章 구원(舊怨) (3)

아걸은 더는 명부판관 행세를 하지 않았다.

다음 싸움이 어느 정도 예상된다.

풍도곡 사형들이 성검문 등쌀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달려들 것이다.

물론 변수는 있다.

풍도곡이 성검문의 지시를 벗어날 방법만 있다면, 사형들은 틀림없이 그 방법을 쫓는다. 하지만 지시를 따르는 수밖에 없다면 방법이 없다. 싸워야 한다.

일홀도끼리 만나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저번처럼 요행을 바랄 수도 없다. 이번에는 칼을 부딪치면 생사를 걸어야 한다.

풍도곡이 빠지고 성검문과 만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저들은 바보가 아니다. 일군 전가성이 당하는 것을 봤다. 이미 사흔(死痕)을 연구했을 것이다. 삼륜축첩공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깨달았을 터이다.

다음에는 더 강한 수로 덤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명부판관 행세를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인면수심 인간들을 찾아내서 벌을 주는 것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다. 그런 일은 명부판관의 정당성을 더욱 강하게 해준다.

명부판관의 정당성이 강해질수록 성검문주를 쳐다보는 눈길에 의심이 깃든다. 명부판관의 입지는 강해지고, 성검문주는 약해진다.

그런데 그 차이가 겨우 털끝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상황.

딱 그 정도다.

더욱이 지금은 성검문주와 비무 약속까지 받아 놨다.

천하제일인과의 비무.

이런 비무에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풍도곡조차도 생각하지 못하는 싸움이다.

명부판관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무공 수련에 집중해야 한다.

“일단 귀문으로 돌아가려고. 몸도 추슬러야 하고, 시간도 갖고. 검 맞는 거 보니까 일홀도 완성된 게 아닌 것 같아. 당분간 무공 수련에 집중해.”

“일홀도는 완성했어.”

“그런데 검을 맞아?”

“솔직히 일군이 강했어. 그런 검초는 누구도 피하지 못해.”

“지금 다시 싸워도?”

“그래도 맞을 수밖에 없는 검이야.”

“검을 맞을 수밖에 없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그건 용납 못 하겠는데?”

“휴우……!”

아걸은 옅은 한숨을 뿜어냈다.

“검 안 맞는 방법을 생각해.”

“그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할 수 없으면 더 처절하게 수련해.”

몽설이 막무가내로 말했다.

아걸은 몽설의 마음을 이해했다.

누가 낭군이 칼 맞는 걸 좋아하겠나. 그 칼이 언제 심장을 뚫을지 모르는데 누가 좋아하겠나.

더군다나 아걸이 상대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최강 고수다.

그들이 언제까지 실수만 할까. 어느 칼 하나라도 정확하게 꿰뚫으면 즉사한다.

몽설은 아걸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직 해보지 않은 수련이 있는데, 그럼 해볼까? 시간이 오래 걸려서 나중에 한가해지면 시도해볼까 했는데.”

일홀도 중에 사도, 죽음의 칼은 오직 실전을 통해서만 수련할 수 있다.

몸이 베이고, 찔리고, 갈라지면서 감각도를 깨달아야 한다. 나보다 강한 자들을 찾아다니면서 항상 죽음의 위기를 느껴야만 한다. 가만히 앉아서 수련하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몽설을 달래주기 위해서 마음 편할 말을 했다.

“그렇지? 길이 있지? 있는데 왜 안 하고 그래!”

“깨달을 가능성이 적어서.”

“일단 그것부터 해. 지금 무공으로는 허도기 상대 못 해. 잘 알면서 그래.”

몽설의 표정이 비로소 환해졌다.

비무 날짜가 잡힌 이후, 거의 금기시됐던 말도 자연스럽게 했다.

아걸은 허도기를 이길 수 없다. 이것이 객관적인 평가다. 또 맞는 말이다.

다 알고 있으면서 입으로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마음이 얼마나 편해졌으면 그런 말까지 자연스럽게 늘어놓을까.

“좋아! 해보자.”

“그래. 그럼 일단 귀문으로 갈게!”

몽설이 날아갈 듯 기쁘게 말했다.

* * *

그 시간 상량산에 낯선 자들이 나타났다.

“귀문은 구절곡에 있다.”

키 크고 잘생긴 사내가 말했다.

“이건 옛날 지도야. 취화원이 귀문을 접수한 후로 많이 변했을 거로 짐작되는데. 그 후로 흘러나온 정보도 없다. 그러니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어.”

“후후! 걱정하지 마십쇼. 그까짓 놈들.”

봉두난발에 이가 누런 자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임무는 귀문 멸문인데. 어떻게 할까? 멸문에 초점을 맞출까, 몰살에 맞출까?”

“기왕이면 몰살로 갑시다. 사람 죽여본 지도 오래됐는데. 이참에 손맛 좀 단단히 봐야지.”

“아걸이 명부판관이라면 취화원주가 다정나찰이겠지. 둘 다 중원에 있으니 귀문은 텅 비었어. 취화원 살수 몇 명이 살아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쓰레기일 테고. 몰살은 너무 귀찮지 않아? 모기 죽이는 기분일 텐데.”

“그래도 손맛 좀 봅시다.”

“후후! 그래. 그럼 몰살로 간다. 구절곡에 있는 귀문 족속들, 한 명 남김없이 모두 쓸어버린다. 이의 있는 사람은 지금 이야기해. 나중에 딴말하면 죽여버릴 테니까.”

모두 침묵했다.

그들에게 선배는 아무리 못나도 절대적으로 추종해야 할 존재다. 자신이 선배를 추종하듯이, 후배가 자신을 추종한다. 이것이 인도부가 지켜야 하는 딱 하나의 규율이다.

스읏! 스으읏! 슷!

그들 스무 명은 구절곡에 모습을 드러냈다.

굳이 모습을 숨길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살인이 시작되면 숨길 수도 없다. 몰살이 목적이지 않나. 곧 처절한 비명이 터지고, 귀문 모두가 습격 사실을 알게 된다.

“너희 다섯은 저쪽 곡구를 틀어막아. 그쪽으로 도주하는 놈들이 많을 테니까 나오는 족족 죽여.”

“하하, 이거 손맛은 우리가 제일 많이 보겠는데?”

키 크고 잘생긴 사내에게 지목당한 다섯 명은 흔쾌히 신형을 날려 사라져갔다.

“우린 대형을 넓게 편다. 산 전체를 감싸고 올라가야 하니까 각기 최소 이십 장씩은 맡아야 해. 자기 앞으로 걸려든 자는 미루지 말고 즉살.”

“미루긴 뭘 미뤄요. 죽이기도 바쁜데. 큿큿!”

인도부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들은 산비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 갑자기 산 전체에 짙은 운무가 드리워졌다. 아니, 운무가 아니라 연기다. 어디선가 희뿌연 연기가 피어나더니 곧 계곡 전체를 휘감아 버렸다.

누군가가 연기를 피웠다.

“이것들이 잔재주를 부리네.”

“큿큿! 이까짓 연기는 눈에 익은 지 오래지.”

그들은 거침없이 연기를 뚫고 올라갔다.

귀문 멸문에 초점을 맞췄다면 인원을 두 명 혹은 세 명으로 나눠서 구곡을 동시에 쳤을 것이다. 쏜살같이 치고 올라가서 곡주부터 죽이면 절반은 이기고 들어간다.

하지만 지금을 몰살이 목적이다.

첫 번째 골짜기부터 뿌리를 캐낸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시킨다.

“꼭꼭 숨어야지! 큭큭!”

그들은 곧 나타날 귀문 문도를 생각하며 신바람 나게 산을 올랐다.

탁! 타탁! 탁! 패애애앵!

사방에서 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울렸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인도부는 즉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타타탁! 타탁! 타타탁!

방금까지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표창, 수리검, 비표 등등이 날아와 꽂혔다.

정상적인 함정이다.

그런데 인도부 거의 모두가 일제히 인상을 찡그렸다.

‘비정상이다!’

그들은 근처 나무에 꽂힌 암기를 유심히 쳐다봤다.

암기는 분명히 날아왔다. 하지만 인기척이 감지되지 않는다. 함정을 주시하는 사람도 없다.

그들은 이미 산 중턱에 올라섰다.

최소한 산 중턱까지는 아무도 감시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나?

그들은 흘끔 바깥 동정을 살폈다.

더는 암기가 날아오지 않는다.

“뭘 건드린 사람?”

키 큰 사내가 물었다.

대답이 없다. 아무도 함정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절로 함정이 발동되었나?

“줄 같은 것 건드린 사람, 없어?”

“…….”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 누구도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후후후! 이거 재미있어지는데. 매복으로 암기를 쏘았는데, 사람 흔적은 없다? 후후!”

* * *

“구곡으로 다섯 명이 갔고, 우리 쪽에 열다섯 명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열다섯 명…….”

월영이 중얼거렸다.

“함정을 잘 이용하면 충분히 싸울 수 있다고 봅니다. 척 보니 별것 아닌 거 같은데.”

“조용.”

월영이 입을 다물게 했다.

귀문 문도는 저들이 얼마나 가공할 무인인지 알지 못한다.

취화원 살수들은 저들을 겪어봤다. 저들 몇 명에게 형옥(刑獄)이 몰살당했다. 취화원 살수들이 추풍낙엽처럼 떨궈졌다. 장로들도 힘에 부쳐서 쩔쩔맸다.

저들은 결코 약한 자들이 아니다.

‘열다섯 명. 너무 많아.’

“후퇴한다!”

“곡주님! 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니. 상대가 안 돼!”

월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는 바로 빠져서 육곡으로 가. 중간에 기별을 넣어주고.”

“육곡까지요?”

“바로 육곡으로 빠져.”

“네. 알겠습니다.”

일곡 귀문 무인들은 월영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구곡주는 공통점이 많다.

예쁘고, 어린 나이에도 강하고, 통솔력이 있다.

각 곡 문도들은 자신이 모시는 곡주가 ‘제일 예쁘다.’, ‘제일 강하다.’, ‘제일 뛰어나다’라고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곡주님은?”

“난 할 일이 있어. 빨리 가!”

일곡 문도는 재빨리 산 정상으로 이동했다.

구곡을 이동하는 데는 산등성이를 타고 질주하는 게 제일 빠르다.

월영은 일곡 무인들이 철수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화탄을 집어 들었다.

저들은 상대하기 벅차다.

붉은색.

습격자 중 일대일 승부를 가렸을 때 승산을 예측할 수 없는 자가 스무 명이다.

화탄 한 발에 네 명이니 다섯 발.

월영은 저들이 정동 무인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정동 무인을 지칭하는 말이 없다. 그래서 가장 강한 적이 나타났을 때 쏘아 올리는 화탄을 집었다.

쓔우우우웃! 퍼엉! 퍼엉! 펑펑펑!

푸른 하늘에 붉은 화탄이 힘차게 솟구쳤다.

모두 다섯 발이다. 최소 인원 열일곱 명에서 최대 스무 명까지 가리킨다.

그다음, 월영은 냉철하게 자신을 분석했다.

자신이 저들과 부딪쳤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예상해야 한다. 이 산에서 저들과 어떤 식으로 싸울 것이며, 몇 명까지 상대할 수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본다.

노란 화탄을 집었다.

이번에는 세 발이다.

자신 혼자서 세 명에서 네 명은 상대할 수 있다. 광활한 야지에서 싸운다면 숫자가 더 줄어들겠지만, 구절곡을 잘 이용하면 그 정도는 너끈히 상대한다.

쓔우우웃! 펑펑펑!

노란 화탄 세 발이 붉은 화탄을 쫓아가서 힘차게 터졌다.

이제 곧 곡주 세 명이 달려올 것이다. 자신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형제들이다.

‘우리 네 명이면 싸울 수 있어.’

인원이 저들이 많지만, 이쪽은 지리적 이점이 있다.

“너희들, 여기서 뼈를 묻게 될 거야. 그러잖아도 너희들 곧 만나길 바랐는데, 고맙게도 와줬네. 호호!”

월영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뿌옇게 번진 연기를 쳐다봤다.

연기는 어둠과 흡사하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서로 살법으로 싸워야 한다. 정동 무인이든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살법이라는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우린 취화원 살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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