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第三十一章 미완성(未完成) (1)
서리가헌이 칼을 들어 올렸다.
순간, 서리가헌의 모습이 일시에 변했다. 방금 모습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서리가헌이 나타났다.
서리가헌은 천년 거목처럼 두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박았다. 두 팔은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몸통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중심이 굳건하다.
몸통이 땅에 박혀 있은 느낌이다.
‘베어도 넘어가지 않는다!’
도끼 한두 방 맞고는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힘센 장정이 도끼를 수십 번 내리찍어야 간신히 넘어갈 것 같다.
서리가헌이 그만한 거목처럼 느껴진다.
츠읏!
서리가헌이 칼에 진기를 담았다.
아! 서리가헌의 칼에서 거미줄이 줄기 뻗어 나온다.
독거미 수천 마리가 쏟아져 나와서 땅을 기어 온다. 아걸에게 달려든다. 아걸을 에워싸고, 발등을 덮고, 발목을 지나서 목을 무릎을 휘감아버린다.
몸 전체가 거미줄로 칭칭 감겼다.
서리가헌이 쏟아낸 도망(刀網)에 갇혀버렸다.
여기서 일탄십검이, 아니, 일탄십도가 쏟아지면 꼼짝없이 죽는다. 움직여 볼 생각도 해보지 못하고 멍하니 서서 칼을 맞는다.
서리가헌은 한 점 유감없는 일홀도를 선보이고 있다.
‘과연!’
아걸은 감탄했다.
아직 칼이 쏟아져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기수식만 보고도 어떤 칼이 들어올지 짐작하겠다.
아걸은 눈꺼풀을 살며시 반쯤 내리깔았다. 반쯤 감긴 눈도 서리가헌을 쳐다보지 않고 반철도를 쳐다봤다.
아걸은 바깥에 신경을 쓰는 대신, 자신의 내면을 봤다.
진기를 봤다. 조용하게 숨 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봤다. 도망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다. 아예 벗어날 생각이 추호도 없는 사람처럼 칭칭 감아오는 도망을 내버려 두었다.
도망은 보지 않으면, 의식하지 않으면 달려들 수 없다.
도망은 도기의 파동이다. 그러니 본인 스스로 의식하지 않으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
그런 이치를 깨달으면 도기나 도망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지금 아걸이 하는 것처럼, 차라리 몰안으로 자신의 반철도를 쳐다보는 게 낫다.
스읏!
반철도가 고요히 쳐들렸다. 어떤 진기도 뿜어내지 않고, 도기나 도망도 발출하지 않은 채 차분히 들렸다.
반철도에는 몰안이 깃들어 있다.
고도의 정신집중이 반철도에 응집되었다. 밖으로 뻗어나가는 정신집중이 아니라 내면을 살피는 집중이다. 그러니 도기가 도망도 안으로 응축될 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서리가헌은 어떠한 느낌도 받지 못한다.
아걸이 칼을 들어 올렸는데 이게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어떻게 변화할지 전혀 종잡지 못한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서리가헌이 의심을 일으킨다. 불안하지는 않겠지만 경계심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이 진하게 일어날수록 마음이 흔들린다. 칼도 흔들린다.
무섭게 도망을 쏟아내는 자와 어떠한 진기도 흘리지 않는 자!
“타앗!”
서리가헌이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순간, 그의 칼이 열 개로 쭉 불어났다. 일탄십도다. 산돼지처럼 사나운 짐승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달리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쉬잇!
서리가헌은 발이 미끄러진 듯 몸을 모로 눕혔다. 등이 땅에 닿을 듯이 바싹 눕혔다.
쉬리리릭!
일탄십도가 두 다리를 쳐왔다.
아걸은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검이 발밑을 쓸면서 지나갔다.
아니, 피했다 싶었는데, 어느새 칼이 변했다. 서리가헌이 벌떡 일어서다니 등을 쭉 갈라버린다.
아걸도 신형을 휘돌리면서 반철도를 쳐냈다.
까앙! 깡! 깡! 까앙! 깡!
칼과 칼이 부딪쳤다.
땅에서 위로 솟구친 칼과 선회하며 휘돌린 칼이 맞부딪치며 격렬한 쇳소리를 울렸다.
서리가헌의 칼이 또 변했다.
충돌이 일어나자마자 서리가헌은 좌측으로 돌았다. 몸을 돌리지 않는 한 반철도가 따라가기 힘든 위치다. 그리고 곧장 칼을 거세게 후려쳤다.
아걸은 또다시 몸을 휘돌렸다. 그리고 억지로 반철도를 끌어올려서 간신히 칼을 막았다.
까앙! 깡! 깡!
칼이 부딪치면서 불통을 튀겨냈다.
살쾡이가 뱀을 희롱한다. 날렵한 발톱으로 뱀의 머리를 툭툭 건드린다. 뱀은 악착같이 날아오는 발톱을 물려고 하지만 속도가 느려서 물지 못한다.
스읏!
서리가헌이 일 장쯤 뚝 떨어졌다.
“뭐냐?”
서리가헌이 냉랭하게 말했다.
“일홀도.”
아걸도 차게 말했다.
옆에서 보기에는 분명히 아걸이 희롱당했다. 서리가헌이 던진 칼을 쩔쩔매면서 막았다.
한데 속을 들여다보면 조금 말이 달라진다.
서리가헌이 아걸을 치지 못했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으니 어디 한 군데 살을 베어냈어야 하는데, 조그만 흠집도 내지 못했다. 공격한 칼이 모두 막혔다.
분명히 아걸이 어쭙잖게 막았는데, 엉겁결에 칼을 들어서 막은 것에 불과한데.
“이름은?”
“아직이야.”
“이름은 미리미리 정했어야지. 죽기 전에.”
스읏!
서리가헌이 칼을 들어 올렸다.
전력을 다한 일탄십도가 가로막혔지만, 절망하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일홀도는 완성된 칼이 아니다. 완성되어 가는 칼이다. 상대를 극복하는 칼이다.
장애물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절벽이 나타나면 뛰어넘고, 강이 나타나면 건너고, 유황불이 가로막으면 날아서라도 뛰어넘는다.
상대를 넘어섰을 때, 일홀도가 완성된다.
일홀도의 완성이란 영구 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의 완성, 임시적인 완성이다. 지금은 완성이라는 말을 쓰지만, 다음 상대를 만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넘어섰을 때, 또 완성이라는 말을 쓴다.
일홀도는 싸우면서 완성해간다.
이렇게 일홀도는 매번 완성을 향해 달린다.
일월도를 완성하는 데 같은 칼을 쓸 때도 있다. 같은 칼이 먹히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때는 비교적 쉽게 일홀도를 완성한 것이니 만족한다.
지금처럼 같은 칼이 먹히지 않았을 때는 다른 칼을 찾는다.
지금보다 더 빠르게 치거나, 더 강하게 치거나, 아니면 변화를 더 준다.
즉시즉발(卽是卽發)!
상대에 맞춰서 즉흥적으로 일홀도를 완성한다.
일홀 무인들은 이런 재능이 뛰어나다. 칼이 막히면 절망하는 게 아니라 즉시 다른 방도를 찾아낸다.
스읏!
서리가헌이 심장을 내밀었다.
아걸은 몰안에 집중해 있다. 여전히 서리가헌을 쳐다보지 않고 자신의 칼에만 집중한다.
몰안에 집중하면 상대방이 보이지 않을까? 아니다. 보인다. 상대방이 전하는 모든 기운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자각한다.
단지 중심이 안에 있을 뿐이다.
서리가헌은 아걸의 상태를 읽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심장으로 향하는 길을 터놓았다.
스읏!
반철도가 심장을 겨눴다.
예상했던 대로다. 이제 반철도는 심장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서리가헌이 어떻게 움직이든 끝까지 심장을 쫓아온다. 그것도 무섭도록 빠르게.
‘승부……!’
서리가헌은 이 칼이 마지막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걸의 칼, 일홀도를 봤다.
반철도가 심장을 겨누고 쏘아 들어가는 속도를 봤다.
누구도 피하지 못할 일격!
그런 아걸의 일홀도를 피해 볼 생각이다.
아걸이 심장을 공격해 올 텐데, 최대한으로 몸을 빼내야 한다. 빼내지 못하면 심장 가격이다. 즉사다. 빼내는 것이 늦으면 잃는 게 많다.
서리가헌이 생각한 것은 손가락 네 마디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를 피하면 목숨을 잃는다. 심장을 가격당한 것과 똑같다. 두 마디를 피하면 목숨은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목숨이 위태롭다.
세 마디를 피하면 목숨은 구한다. 대신 왼팔을 잃는다.
왼팔과 심장과의 거리는 손가락 세 마디 간격밖에 되지 않는다.
네 마디를 피하면 이긴다!
어느 경우든 최소한 육참골단(肉斬骨斷)은 이뤄내야 한다. 살을 주는 대신 뼈를 끊는다. 팔을 내줘도 목숨을 빼앗으면 이긴 것이나 진배없다.
‘네 마디는 피할 수 있지!’
바깥으로 흐르는 기운에 마음을 주지 않는다.
중심을 안에 굳건히 받쳐놓고 밖에서 흘러 다니는 것들은 가볍게 지켜본다.
반철도가 곧게 세워졌다.
‘잡았다!’
몰안이 서리가헌의 심장을 꼭 짚어냈다.
반철도와 서리가헌의 심장이 일직선상에 놓였다. 심장에 이르는 최단 거리다.
이제 이 선을 곧바로 따라가면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
아걸은 더 기다렸다.
서리가헌이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거리는 가까워진다.
상대가 소축십검이었다면 지금 당장 탄궁도를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대사형, 이미 일홀도를 완성한 거인이다. 복수 대상자로 보면 안 된다. 무공 완성자로 봐야 한다.
서리가헌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오면 탄궁도는 그만큼 빨라진다.
일직선이 흐트러질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몰안이 심장을 잡았으니, 서리가헌이 어떻게 움직이든 줄은 변하지 않는다.
스읏!
반철도 손잡이에 진기가 응축되었다.
툭! 치면 탁! 하고 빠져나갈 준비가 끝났다.
아걸은 감정 없는 눈으로 반철도를 주시했다.
타앗! 탓!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두 사람 모두 육신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몸이 베이든 갈라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은 칼을 쳐낸 결과일 뿐인데, 어떤 결과가 일어나든 감수한다.
지금 최선을 다한다.
아걸은 사라지고 반철도만 번뜩였다.
서리가헌도 사라졌다. 그가 쳐낸 칼이 날 열 개로 변해서 아걸을 휘감았다.
퍼억!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크윽!”
아걸이 신음을 흘리면서 풀썩 주저앉았다. 아걸의 목에서 핏줄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순간, 서리가헌은 인상을 확 찡그렸다.
전에 봤던 일, 소축십검이 당했던 일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분명히 일탄십검으로 목을 뎅겅 잘라냈는데, 뼈를 자르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를 떼어내지 못하고 살만 베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급소를 피한다!
아걸의 일홀도는 공격보다도 수비에서 단연 으뜸이다. 어떤 무인도 아걸을 일격에 즉사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칼을 맞는 순간, 미미한 진동이 일어나면서 병기를 밀어낸다.
“으음!”
서리가헌은 뒤늦게 신음을 흘렸다.
반철도가 왼팔에 틀어박혔다.
뭉툭한 칼이 살을 찢고, 신경을 토막 내고, 뼈를 가루로 만들었다.
왼팔을 잃었다. 이미 왼팔이 제 기능을 잃고 덜렁거린다.
서리가헌은 아걸을 향해 돌아섰다.
아걸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목에 손을 대서 쏟아지는 핏물을 막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우리 결판은 내야 하지 않겠니?”
스읏!
아걸이 단도를 꺼내 들었다.
반철도가 서리가헌의 팔에 박혀 있어서 남은 승부는 단도로 벌일 수밖에 없다.
꾸욱!
서리가헌도 칼 손잡이로 견정혈(肩井穴)을 툭 쳤다.
지혈과 동시에 끊어진 신경에서 쏟아지는 통증을 억제하려는 점혈이다.
“사형이 졌어.”
아걸이 단도를 겨눴다.
“그래 보이니?”
“내 칼은 정확할 거야. 하지만 사형 칼은 일탄십도를 펼치지 못해. 이미 신경이 무너졌어.”
“후후후……!”
순간, 아걸이 단도를 겨누고 뒤로 쑥 물러섰다.
“가.”
“큿큿! 일홀도는 생사도라는 사실을 잊었니? 일홀도를 쓰면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해.”
“사부도 살려줬거든. 사형을.”
“……!”
“사부가 정말 죽이지 못해서 사형 명줄을 끊지 못한 줄 아나 보네. 가. 그리고 다음에는 상대를 정확하게 봐. 사형 상대는 내가 아니라 허도기야.”
아걸이 먼저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