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第三十二章 탄완취주(彈完就走) (5)
“뭐냐!”
협성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다. 한성에서 무려 천오백 명을 죽였다. 세상이 떠들썩할 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 일로 인해서 방갓 무인들은 지옥혈객(地獄血客)이라는 무명까지 얻었다. 멀리서 검은 경장에 큰 방갓을 쓴 사람만 보여도 지옥혈객이라며 피하는 실정이다.
그만한 살상을 벌이면서도 천호는 염려하지 않았다.
천호소는 지방 군대다. 황상의 백만대군 중 일부다. 소축십검이 천호에 있는 사람 중 몇몇 사람에게 무공을 전수했다.
소축십검의 제자인 셈이다.
그러니 그들이 성검문이 하는 일에 나설 리 없다. 방해되기는커녕 오히려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다. 살상 목적을 말해주었다면 오히려 그들이 나서서 살상했을 수도 있다.
지방에서 천호의 힘은 막강하다.
무려 천오백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참살했는데, 세상은 조용하기만 하다.
마땅히 죽을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성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옥혈객이 애꿎은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낼 만큼 간 큰 사람은 없다.
지옥혈객이 민간인을 죽인 사건은 밋밋하게 묻혔다.
한성 사람들 가슴에는 여전히 깊은 공포심으로 자리 잡겠지만, 살상한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아걸, 왜 나타나지 않은 거냐……!”
협성림이 또 중얼거렸다.
그렇다. 아걸이 나타났어야 한다. 아걸이 지옥혈객을 뒤쫓아와서 거침없이 칼을 썼어야 한다.
협성림이 적면대에 명령을 내리면서 지극히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도 바로 아걸 때문이다.
아걸은 한성 지척인 대별산에 있다.
그는 벌써 살겁 소식을 들었다. 한성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을 안다.
그렇다면 당장 뛰쳐나왔어야지.
눈앞에서 무자비한 살상이 벌어졌는데, 칼을 수련한 일홀문도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그동안 파악한 아걸의 성격대로라면 반드시 나타나서 싸움을 걸어왔다.
일 대 백의 싸움이다.
물론 이 싸움은 아걸에게 승산이 높다고 본다.
아걸이 노출된 상태이고 지옥혈검이 숨어있는 상태라면 지옥혈검에게도 기회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반대다. 지옥혈검이 드러나 있고, 아걸이 숨어있다. 아걸이 살수가 되어서 들이친다면 손써볼 기회도 없이 그대로 무너진다.
협성림은 수하들, 적면대의 몰살을 점쳤다.
“완벽한 기회를 주었는데 왜 공격해 오지 않았나?”
협성림의 고민이 깊어졌다.
사부의 밀지에는 취화원 살수들을 한 명 남김없이 전원 몰살시키라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취화원 살수쯤은 신경도 안 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몽설이 혈검을 쓴다. 아걸이 취화원 살수들을 주시한다.
밤을 지새우며 고민했지만, 정면 승부로는 살수들을 몰살시키기가 여의치 않았다.
자신이 직접 적면대를 이끌고 취화원을 공격하면 간단히 제거할 수 있다. 어느 사람도 자신을 막지 못한다. 그 속에는 몽설도 포함되어 있다. 몽설이 혈검을 쓰지만, 아직 미숙하다. 그런 검쯤은 간단히 쓰러트린다.
하지만 역시 아걸이 걸린다.
아걸은 서리가헌까지 무너트렸다. 그렇다면 승패를 장담하지 못한다. 아니, 아걸에게 패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아걸만 불러내려고 했다.
적면대를 희생양으로 내세워서 아걸을 빼낸 후, 자신이 홀로 취화원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 방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취화원 살수들을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왜? 왜 나타나지 않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후우!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무슨 수로 취화원을 멸절시키지? 아걸을 분리해야 하는데.”
아직도 사부의 명령은 유효하다.
취화원 살수들을 몰살시켜야 한다. 수단과 방법은 따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몰살시키기만 하면 된다.
협성림은 밀지를 받은 날처럼 고민을 거듭했다.
* * *
수련 장소를 옮겼다.
이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 옮길 때는 보안에 특히 치중했다.
취화원 살수들조차 자신들이 어디서 수련하는지 알지 못한다. 수련 장소로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모두 눈을 가렸다. 방향 감각을 마비시키는 독초도 복용시켰다.
새로운 수련 장소는 완벽하게 가려졌다.
취화원 경계망이 뚫린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입한 사람이 서리가헌이다. 하원랑이며, 서리가헌을 죽이려던 자들이다. 하나같이 절정 고수다. 취화원 살수들이 그들을 파악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안 되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낭비다.
관원 열 명이 도둑 한 명을 막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취화원도 그런 틈을 비집고 살행을 수행하지 않나. 잠입하는 자는 반드시 잡아야 하지만, 놓친다고 해서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다.
몽설은 대회합을 열었다.
대회합이라고 해봐야 아홉 명의 곡주와 팔 장로, 그리고 아걸이 참여하는 십이인 회합이다.
“그거 줘.”
몽설이 취운을 보며 말했다.
“여기 있어요. 그동안 수집한 것들을 모두 챙겨왔어요.”
취운이 보자기에 싸인 두툼한 서류 뭉치들을 몽설에게 건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보자기로 향했다.
“이거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정보야?”
“모두 다 믿어도 됩니다.”
취운이 자신 있게 말했다.
“처음 명을 받았을 때부터 진위가 드러날 때까지 몇 번이고 확인한 사항들이에요. 전부 믿으셔도 돼요.”
몽설이 보자기에 싸인 서류뭉치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우리 수준은 어때?”
이번에는 딱히 누구에게 한 말이 아니다.
살수를 양성하는 모든 사람에게 던진 질문이다.
“솔직히 수준에 못 미칩니다. 그래서 삼령검(三靈劍)을 수련시켰어요. 일대일로는 승산이 없지만, 세 명이 한 명에게 달라붙는다면 충분합니다.”
월영이 대답했다.
“더욱이 우리는 기습하는 쪽이잖아요. 충분히 유리하죠.”
소호가 말을 이었다.
몽설이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그럼 준비시켜!”
순간, 대회합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정말로 공격하실 거예요?”
사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왜?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무래도 지금 공격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서요. 실력을 더 쌓은 후에 공격해도 될 것 같은데…….”
“복수해야지.”
몽설이 말했다.
순간,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몽설이 말했다.
“우리가 이 사람들한테 얼마나 많은 형제를 잃었는데. 이제 복수해야지. 죽은 사람들 원혼 달래줘야지. 지금 안 하면 언제 해?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약해질 때가 있을 것 같아?”
몽설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씹어 뱉듯이 말했다.
“난 지금도 가끔 꿈을 꿔. 장로님들, 언니들…… 아주 끔찍하게 죽어가던 모습이 아른거려. 그 많던 사람이 다 죽고 이 자리에 모인 열한 명만 남았어.”
몽설의 말에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다. 취운은 정동 무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것이 보자기에 싸여서 몽설에게 전해졌다.
정동 무인들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몇 명인지, 무공 수준은 어떤지, 어떤 수련을 받았는지…… 정동 무인들에 대한 사실이라면 숟가락 개수까지 모두 수집했다.
모든 게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다
몽설은 구절곡에서 정동 무인들의 급습을 받았을 때부터 역공을 생각했다. 정동 무인들에게 몇 번이나 당했으니, 이번에는 반대로 공격해 줄 생각이다.
그래서 취운에게 정보 수집을 명령했다.
취운은 차분하게 정보를 수집했다. 들뜨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사실만 골라냈다.
취화원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망을 총동원했다.
사실 정동은 은밀하지 않다. 풍도곡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동도 알았다.
정동 무인들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비밀이지만, 서리형개가 그들을 양성한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그들이 일홀문 방식으로 수련받는다는 사실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또 정동 무인들은 정동 인근 마을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다.
그들 중 일부는 민가에서 술을 마시면서 정동의 수련 형태를 안줏거리로 늘어놓았다.
정동 무인들은 기강이 해이한 편이다.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을 갖고 있어서이겠지만, 도무지 겁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난 오늘 밤 이것들을 읽어볼 거야. 출발은 내일 아침. 정동 도착 일자는 열흘 후. 공격은 열하루 아침. 세부적인 공격 계획은 도착해서 말해줄게. 모두 준비시켜.”
“넷!”
모두 일제히 대답했다.
“괜찮겠어?”
“또 그 말!”
몽설이 눈꼬리를 살짝 추켜 떴다.
“아! 깜빡했네. 미안.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와.”
아걸이 걱정스럽게 몽설을 쳐다봤다.
“풋! 오빠에게는 내가 꼭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나 봐? 오빠, 이래 봬도 내가 취화원 원주야. 내 말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수백이라고.”
“그래. 괜히 걱정했지?”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당연히 걱정해야지. 오빠가 걱정해주지 않으면 누가 걱정해?”
“…….”
아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몽설만 쳐다봤다.
“호호호! 오빠는 그런 표정 지을 때가 제일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장난은…….”
아걸이 툭 쏘아붙였다.
“오빠, 도와줄 거지?”
몽설이 정색하며 물었다.
“물론이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물어본 거야. 오빠, 이번에는 도와주지 않았으면 하는데…….”
“응? 무슨 소리야?”
아걸이 뜻밖에 말에 몽설을 쳐다봤다.
“이번 일은 취화원과 정동 무인들의 싸움이야. 정동 무인들이 먼저 형옥을 공격했어. 형옥주님을 비롯해서 형옥 언니들이 순식간에 당했어.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됐는데, 우린 상대도 안 됐거든. 그 복수를 지금 하는 거야.”
취화원과 정동의 싸움.
일홀문과 허도기의 싸움.
이 싸움들은 제삼자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아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만 볼게. 몸조심하고.”
“호호호! 난 항상 오빠에게 염려스러운 사람인가 봐. 늘 걱정만 하네?”
아걸은 손을 들어서 몽설의 볼에 댔다.
몽설이 마주 손을 들어서 아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댔다. 그리고 볼을 비볐다.
“너무 걱정하지 마. 준비 철저히 했어. 딱 한 사람, 서리형개가 나타나면 막아줘. 그 사람은 아무래도 안 돼. 하원랑과 싸워봐서 아는데, 아직 수련이 부족해.”
“그래. 막아줄게.”
그 말에 몽설이 눈을 들어 아걸을 쳐다봤다.
“오빠, 정말로 강해졌나 보다. 전에는 서리가헌이나 서리형개의 이름만 들어도 긴장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자신 있게 막아준다는 걸 보니 정말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일홀도가 거의 완성된 것 같아.”
“정말? 그때 날 쳤던 그 칼?”
몽설이 제 일처럼 기뻐했다.
“아니. 다른 칼.”
몽설이 상당히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다른 칼? 그 칼이 아니고? 어떤 칼인데? 빨리 보여줘.”
“안 돼. 너한테는 안 보여줘.”
“왜?”
“이 칼은…… 뭐라고 할까? 상대가 있어야 해. 칼을 쓰면 반드시 승패가 갈려.”
“정말 일홀도네? 딱 일홀도 특성 그대로잖아.”
“그러니까 죽어도 너한테는 보여줄 수 없지. 볼 생각 하지 마.”
“옆에서 보면 되잖아. 구경만 해도 안 되는 거야?”
“옆에서 봐서는 잘 몰라. 칼을 직접 쓰거나, 마주 보고서거나. 둘 중 하나는 되어야 일홀도를 제대로 느낄 수 있어. 넌 안 돼.”
“잘 됐다. 아! 그래서 하원랑과 만났을 때도 그렇게 편안했구나? 굉장히 침착하다고 느꼈거든. 다 이유가 있었어. 진작 말해주지. 그 칼은 언제 깨달은 건데?”
“서리가헌과 싸우면서.”
“아!”
몽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이젠 모든 게 안심이야. 나도 걱정시키지 않을게. 안심해. 이제 가. 나, 이거 봐야 해.”
몽설이 아걸의 등을 떠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