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홀도-161화 (161/600)

#161화. 第三十三章 고육책(苦肉策) (1)

두 사람, 서리가헌과 아걸이 산에서 내려왔다.

서리가헌이 앞에서 걸었고, 아걸이 일 장쯤 떨어져서 뒤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적막한 산길이다. 사람이라야 둘밖에 없다. 그런데도 둘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데면데면했다.

사실 할 말이 없다.

서리가헌이 사형이기 때문에 부상을 치료해준 것이 아니다. 그래도 한때는 일홀도를 지녔던 사람인데, 팔 하나 잃었다고 개떼에 물려 죽는 꼴은 보기 싫었다.

일홀문도는 일홀문도답게 죽어야 한다.

서리가헌과 서리형개가 사부를 암살한 파렴치한이지만, 적어도 죽는 모습만큼은 일홀문도답기를 바랐다.

서리가헌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난 이쪽으로.”

서리가헌이 남쪽으로 난 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풍도곡으로 가나?”

“이 꼴로 가면 당장 형개에게 물어뜯기지 않겠니? 아무래도 일홀도부터 찾아야겠지.”

서리가헌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서리가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걸이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는데.”

서리가헌이 말하라는 듯 아걸을 쳐다봤다.

“날 향한 칼, 허도기를 잡을 때까지 미뤄줄 수 있나?”

“잡을 수는 있겠니?”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서리가헌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틀렸어. 나 하나 잡았다고 세상이 눈 아래로 보이니? 허도기는…… 하하하!”

서리가헌은 말도 필요 없다는 듯 웃었다.

아걸은 무심히 서리가헌을 쳐다봤다.

서리가헌과 서리형개는 죽는 순간까지도 허도기에게 칼을 겨누지 못한다.

이들 두 사람에게 허도기는 이미 하늘이다.

싸움이란 것은 서로 실력이 엇비슷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정도까지는 괜찮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싸움이 된다.

허도기는 그런 마음조차도 들지 못하게 만든다.

도대체 두 사람은 허도기에게서 무엇을 본 것인가? 어떤 모습을 봤기에 평생 칼을 겨누지 못하나. 풍도곡에 웅크려서 사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절대적인가?

일홀도는 상위의 칼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일홀도보다 더 강한 칼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자웅을 결행해야 한다.

일홀도는 최상위에 존재하는 칼이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일홀문 문규를 어긴 셈이다. 더 강한 검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칼을 들지 못했으니, 일홀문도라고 말하기도 창피하다.

서리가헌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그러지. 허도기를 잡을 때까지 칼을 놓고 있지. 후후후! 아마도 네놈에게 칼을 겨눌 날은 오지 않을 것 같군. 충고 하나 하지. 허도기와 만나면 일 초만 피해. 일 초를 피해낼 수 있다면…… 이거 뭐라고 할 말이 없잖아? 일 초를 피한다고 사는 것도 아닌데. 하하하!”

서리가헌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말뜻은 아걸이 일 초도 받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거다.

아걸은 미간을 찡그렸다.

허도기, 도대체 뭔가? 허도기는 신이라도 되나?

서리가헌에게 물으면 틀림없이 ‘그렇다’라고 답할 것 같다. 무신(武神), 검신(劍神)이라는 대답이 들려올 것이다.

아니다. 허도기는 절대 신이 아니다.

허도기는 사부를 넘지 못했다. 사부를 넘기 위해서 삼인독을 써야만 했다.

무공이 백중세였기 때문에 완벽한 승기를 잡기 위해서 독을 썼을 수도 있다. 무공을 겨룬 것이 아니라 일홀문주를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타당하다.

하지만 허도기 정도 되는 무인이라면 일홀문주는 진신 무공으로 죽였어야 한다.

서리가헌이 말했다.

“저쪽 분위기가 어수선하던데, 정동을 칠 거니?”

“내가 간여할 부분이 아니야.”

“형개를 벨 거니?”

“아니.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먼저 칠 생각은 없다.”

서리가헌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등을 돌려서 남쪽 길로 걸어갔다.

그는 그저 걷는다.

어깨를 쭉 펴고 당당하게 걷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패자의 모습으로 걷지도 않는다. 평상시처럼 담담하게 걸어간다.

서리가헌은 상처를 치료하면서 일홀도를 수련했다.

한쪽 팔을 잃으면 몸의 중심이 달라진다.

일탄십검을 펼칠 때, 신법을 전개할 때…… 아무래도 미세한 차이가 생긴다.

그 부분을 대별산에서 충분히 수련했다.

하지만 아직도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낀 듯하다.

서리가헌이 걸어간다. 아마도 당분간 무림에서 서리가헌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일탄십검은 아주 강한 일홀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걸은 서리가헌이 걸어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남동쪽 길로 걸어갔다.

저벅! 저벅!

아걸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산길을 걸었다.

* * *

무인이 보인다.

그는 풀잎을 뜯어서 만지작거린다. 적막한 밤이 주는 무료함을 조그만 놀이로 달랜다.

가끔 고개를 들어서 앞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무인은 곧 따분함을 이기지 못하는 상태로 돌아갔다. 풀을 뜯기도 하고, 땅을 발끝으로 차서 파내기도 한다. 괜히 옆에 있는 나무를 수도로 탁탁 치기도 했다.

“아함!”

그는 결국 두 손을 쭉 뻗어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때,

슷!

무인의 등 뒤에서 손이 쭉 뻗어 나와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다른 손에 들린 단검이 무인의 가슴에 박혔다.

“읍! 으읍!”

무인이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단검에 찔린 상처에서 핏물이 쿨룩쿨룩 쏟아져 나왔다. 숨을 토해낼 때마다 핏물도 같이 쏟아졌다.

무인의 눈동자가 풀렸다. 검은 동공이 위로 돌아가고, 흰자위만 남아서 번뜩였다.

그래도 습격자는 입 막은 손을 풀지 않았다.

무인이 손발을 바르르 떨었다. 두 다리는 딱딱하게 경직되고, 힘이 잔뜩 들어갔다.

무인은 이미 죽음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습격자는 여전히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참으면서 무인이 완전히 절명할 때까지 기다렸다.

손이 툭 떨어졌다. 곧이어 어깨에도 힘이 빠졌다. 상반신이 문어처럼 흐느적거렸다.

습격자는 그제야 입 막은 손을 풀었다.

무인이 숨을 완전히 거두려면 시간이 조금 더 지나야 한다. 하지만 이 정도에 이르면 남은 것은 죽는 것뿐, 다른 행동을 일절 하지 못한다.

스읏!

습격자, 아걸은 무인을 조용히 눕혔다.

그의 눈은 이미 다른 희생자를 점찍었다. 옆으로 십 장쯤 이동하면 한 명이 또 있다.

그는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는 것도 모른다. 큰 바위에 기대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스으으읏!

아걸은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일홀사도(一忽死刀)로 일홀도를 만들었다.

감각이 몸을 지배한다. 뼛속까지 푹 잠겨 있는 기운이 몸을 지배한다. 감각이 먼저 일어나고, 아걸이 뒤늦게 알아챈다.

일홀사도를 쫓아서 움직임을 일으키면 일절 소리가 나지 않는다.

상대방이 공격 사실을 알기도 전에 아걸이 먼저 눈치챈다. 그러니 대응도 쉽고, 빠르다.

스스스스스!

아걸이 뱀처럼 사내에게 달라붙었다.

경계 서는 무인은 모두 열 명이다.

백 명 중 열 명, 일 할이 경계에 투입되었다.

이제 암살은 끝났다. 다른 구십 명은 암살로 처리할 수 없다. 저들은 모두 한군데 모여서 먹기도 하고, 잡담도 나눈다. 검을 닦는 자도 있다.

경계를 서는 자 외에는 대부분 자유롭다. 하지만 밀집해 있다. 누가 되었든 한 명만 공격하면 다른 자들도 즉시 알아챈다.

지금이라도 기습을 취하면 서너 명 정도는 눕힐 수 있다. 미처 대응하기 전에 쓰러트린다. 하지만 모두를 죽일 수 없다면 기습은 아무 의미도 없다.

스읏!

아걸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들을 향해 걸어갔다.

저벅! 저벅! 저벅!

어둠 속에서 귀신이 툭 튀어나왔다.

구십 명, 흑의 경장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지옥혈객들은 아걸이 나타나는 것도 몰랐다.

그들 중 한 명이 발걸음 소리를 듣고 무심히 뒤돌아봤다.

“앗! 아걸이다!”

그가 소리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걸’이라는 소리에 다른 자들도 급히 일어섰다. 벌써 검을 뽑고 아걸을 포위한 자도 있다.

이들의 대응은 무척 신속하다.

아걸이 중얼거렸다.

“긴가민가했는데, 적면대가 맞았네.”

“후후! 역시 아걸.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우리가 적면대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티를 내지 않았는데.”

“너희가 밟는 보법, 성검문 이환보다. 너희가 취하고 있는 기수식, 성검문 정천검법이다. 이환보와 정천검법을 이 정도로 구사하는 자들이라면 적면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지. 더욱이 너희…….”

아걸이 흑의 무인들을 쓸어봤다.

“딱 백 명이더군. 적면대가 항시 백 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지.”

“뭐, 사실 상관없는 일이야. 네놈이 쫓아올 것은 이미 예상했지. 여기가 바로 네놈이 죽을 자리야!”

스읏!

아걸은 반철도를 들어 올렸다.

“이런 개싸움을 제법 겪었지. 그래서 얻은 별호가 혈도비자야. 내가 지금 혈도비자로 여기 왔거든. 너희들 미친개 때려잡듯이 잡아버리려고.”

“미친놈!”

“왜 이런 말을 해주는지 알아? 내가 네놈들과 싸우러 왔다고 생각할까 봐서 말해주는 거야. 난 네놈들 같은 것들과는 싸우지 않아. 때려잡을 뿐이지.”

아걸이 살심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일으킨 살심은 안으로 묻혀서 드러나지 않았다.

몰안이 최극상에 이르러 마음이 투명할 정도로 맑아졌다.

“쳐라!”

적면대가 일제히 공격을 가해왔다.

일단, 앞에 있는 다섯 명이 검을 쳐왔다. 다른 자들은 급히 진형을 맞추는 중이다.

아걸은 다섯 명의 검초를 환히 읽었다. 검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인다. 빠르기와 변화, 힘이 세세하게 읽힌다. 자신에게 가장 빨리 덮쳐올 검도 알아챘다.

스읏!

아걸이 왼쪽으로 움직였다.

찔러오는 검을 슬쩍 피하고 심삽대 문주의 일홀도, 단도격타를 터트렸다.

퍼억! 퍽퍽퍽!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일도가 배를 갈랐다. 배를 가르고 빠져나온 칼이 손을 뎅겅 잘라냈다. 핏물이 확 쏟아졌다. 칼은 계속 움직였다. 정수리를 가르고 들어간 칼이 가슴까지 그어졌다.

쿵!

무인은 삼 도를 맞고서야 쓰러졌다.

아걸의 칼이 너무 빨라서 삼 도를 맞기까지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웃!”

아걸이 손속이 지나치게 잔인했는지, 적면대가 움찔거렸다.

한 명을 죽이는 데 삼 도까지 쓸 필요가 없다. 사실, 쓰러진 자는 첫 번째 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복부를 그어버린 칼만 해도 살 수 없었다.

나머지 두 칼은 분노다.

아걸은 적면대를 무인이 아니라 군인으로 봤다. 그렇다면 백성을 보살펴야 한다. 그것이 적면대에게 주어진 임무요, 사명이다. 이들의 검은 백성이 아니라 적군을 향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검을 거꾸로 잡았다.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백성을 죽였다.

그 순간부터 이들은 군인이 아니라 주인을 물어버린 미친개일 뿐이다.

그래서 처리하기 위해 왔다.

아걸이 이들을 찾아온 것은 몽설도 모른다.

이들의 존재를 몽설이 알았다면 정동을 치기 전에 이들부터 공격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 관한 정보를 빼돌렸다.

이들 적면대 백 명이 황학산(黃鶴山)에 숨어있다는 사실은 정보를 수집한 취운과 아걸밖에 모른다.

아걸이 반철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믿어지나? 미친개를 때려잡으러 왔다는 말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