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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162화 (162/600)

#162화. 第三十三章 고육책(苦肉策) (2)

‘됐다!’

협성림은 눈가에 이채를 번뜩였다.

드디어 생각했던 일이 벌어졌다. 아걸이 대별산을 떠나서 황학산으로 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늦었지만, 일이 예정대로 진행된다.

아걸은 적면대를 무참하게 죽이기 시작했다. 싸움이 아니다. 도살이다. 누가 봐도 일방적으로 죽이고 있다. 늑대들이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지만 호랑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더욱이 아걸의 칼은 분노가 가득 담겨 있다.

적면대가 감당할 수 있는 칼이 아니다.

그렇다고 적면대가 물러서지도 않는다.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악착같이 달려든다.

저들은 군인이다.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전멸은 알아도 후퇴는 모른다.

그렇다면 이 싸움의 결과는 뻔하다.

‘미안하다.’

협성림은 적면대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이들을 끝까지 보살피고 싶었다. 이들과 함께 중원을 멋지게 누빌 생각이었다. 전장의 늑대를 무림에 풀어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매우 궁금했다.

한데 이런 식으로 버릴 수밖에 없다.

공부가 내린 명령은 절대적이다. 금검까지 그려서 보낸 밀서에는 ‘반드시’라는 말이 붙는다. 목숨을 내놓고 결행해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 된 것이다.

취화원 따위를 몰살시키는 일이 이토록 중한 일이 되었다.

협성림은 적면대를 취화원과 맞바꾸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미안하다. 잘 가라.’

협성림은 수하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즉시 신형을 뽑아냈다.

아걸은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적면대를 빨리 죽일 생각이 아니다. 저들은 희롱하고 있다. 최대한 잔인하게 죽일 생각이다. 앞으로 나타날 적면대 같은 살인마들에게 던지는 경고다.

아걸은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 황학산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사이 취화원을 몰살한다.

혼자서 가능할까? 가능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빨리 끝내는 게 좋다. 변수가 일어날 여지는 아예 싹을 잘라버린다. 그래서 도와줄 자들을 불렀다.

그들을 대별산에서 만나 같이 공격한다.

최대한 빨리! 신속하게! 완전하게!

쒜에에에엑!

협성림은 그야말로 발이 땅에 닿을 새도 없을 정도로 쾌속하게 치달렸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니?”

협성림은 문득 들려온 소리에 신형을 멈춰 세웠다.

그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이 말투……!’

협성림이 말에 힘을 주어서 말했다.

“날 막을 셈인가!”

“누가 막는다고 그랬니? 어디를 이렇게 급히 가느냐고 묻기만 한 거잖니.”

“으음……!”

협성림은 침음했다.

서리가헌이 나타났다. 느낌이 좋지 않다.

서리가헌이 유들유들 말했다.

“너는 내가 묻는 말이 널 막는 것처럼 들리니?”

“……공부의 명은 이행했나? 아걸을 잡으라고 한 것 같은데,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내 앞을 막을 시간이 있으면 아걸이나 찾아가서 제발 죽어달라고 사정이나 하는 게 어때?”

“공부의 명? 내가 공부의 수하니? 공부가 도움을 요청해서 일해준 것뿐인데. 공부가 나한테 떡을 줬니, 밥을 줬니. 그런데 너 갑자기 공부의 이름은 왜 들먹거리니?”

협성림은 서리가헌의 뜻을 분명히 알았다.

서리가헌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이미 공부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일홀도가 드디어 공부를 향해 칼을 뽑았나?

하지만 이 결정은 죽음을 앞당기는 미련한 선택일 뿐이다. 아주 잘못된 선택이다.

스릉!

협성림은 검을 뽑았다.

“내가 당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나?”

“누가 그런다고 했니? 또, 무인이 상대를 두려워하면 되겠니? 소위 공부의 제자라면 천하를 오시해야 하지 않겠니. 아! 그래서 나 같은 놈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니?”

스르르릉!

서리가헌도 칼을 뽑았다.

서리가헌의 움직임이 여전히 깊다. 여전히 빠르고 날카롭다. 팔을 잃기 전과 비교해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침착한 점은 더 나아진 것 같다.

‘좋지 않다.’

협성림은 미간을 찡그렸다.

소축십검은 누구나 같은 생각이겠지만, 협성림도 자신이 소축십검 중 가장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조명십해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자부한다.

조명천검과 조명십해를 전장에서 사용했다. 적군을 죽이면서, 검이 피를 묻히면서 수련했다.

지금 그의 검은 최고로 좋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 거기에 완숙함, 노련미까지 보태졌다. 전장의 경험이 더해져서 예전의 조명십해와는 전혀 다른 검공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따뜻한 방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수련한 무공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서리가헌을 상대할 자신이 없다. 아니, 싸워보고 싶다.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서리가헌과 부딪쳐보고 싶다는 무인의 욕망과 아직은 참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감각이 충돌한다.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 돌아간다면 놔줄 수도 있는데.”

서리가헌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이 협성림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뭐라고? 놔줄 수도 있다고? 이런 미친놈이!

스읏!

협성림은 검을 들어 올렸다.

순간, 검에 삼륜축첩공이 응축되었다.

짐기일력타를 연달아 쳐내려고 한다. 하늘도 쪼갤 만한 힘, 번갯불도 능가하는 빠름이 서리가헌을 칠 것이다.

일군 전가성이 비무에서 명부판관에게 썼던 조명십해 오의다. 하지만 사실 전가성을 어설프게 배웠다. 삼륜축첩공은 직접 살인을 하면서 터득해야 한다.

피비린내를 맡으면서 수련한 검공만이 진짜 강공이다.

‘삼륜축첩공이 펼쳐지면 누구도 막지 못해. 단숨에 살이 찢기고 뼈가 갈라진다. 펼치자마자 승부가 갈라질 거야.’

대도로 삼륜축첩공을 쓰면 칼이 등을 뚫고 툭 튀어나왔다. 검으로 펼치면 투구와 함께 머리가 붕 떠올랐다. 난다 긴다 하던 적장들이 모두 쓰러졌다.

스읏!

협성림은 삼륜축첩공을 펼치기 위해서 기수식을 취했다.

“이무기도 용이라는 거니?”

서리가헌이 무릎을 굽히며 낮게 가라앉았다. 손에 들린 칼도 땅에 닿을 듯이 낮게 눕혔다.

처음 보는 기수식이다.

‘칼이 변했다! 일탄십검이 아냐!’

협성림은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슬렀다. 삼륜축첩공이 터지면 누구도 막지 못한다.

타타탁! 타타타타탁!

서리가헌이 낮게 수그린 자세를 유지한 채, 서서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달린다 싶었다. 그런데 이내 빨라졌다. 너무 빨라서 눈앞에 훅 들이닥친 듯이 보인다. 벌써 칼이 허공을 그어대고 있다.

슛!

협성림은 즉시 삼륜축첩공을 떨쳐냈다.

전신에 응축된 진기가 일제히 검에 모였다. 모이고, 모이고, 모였다. 모든 힘이 잔뜩 응축되었다. 더는 압축시킬 수 없을 만큼 아주 강하게 모였다.

탁!

순간적으로 응축된 진기를 터트렸다. 순간,

쒜에에에엑!

협성림의 검이 서리가헌을 향해 날아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살이 서리가헌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한데,

까앙! 깡!

검과 칼이 부딪쳤다.

쇠붙이 두 개가 허공에서 충돌한 것뿐인데, 천둥이 천둥을 후려친 듯한 소리가 울렸다. 번개가 한 곳을 수십 번이나 연타한 것처럼 보였다.

협성림은 눈을 부릅떴다.

삼륜축첩공은 이런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부딪침 없이 상대방의 육신을 꿰뚫어야 한다. 살을 찢는 파육음이 울리면서 검을 잡은 손아귀에 묵직한 손맛이 느껴져야 한다.

검과 칼이 부딪쳤다. 삼륜축첩공이 막혔다. 서리가헌의 일탄십검이 더는 빠를 수 없는 조명천검을 막아냈다.

순간, 협성림은 복부에서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 없다. 뜨거움이 곧 격렬한 아픔이 되어서 전신을 휘몰아친다.

“꺽! 꺼억!”

협성림은 비명 아닌 비명을 내지르며 훌쩍 나가떨어졌다.

그는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신형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서리가헌의 칼이 복부를 반이나 썰어버렸다.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졌다. 붉은 피와 하얀 내장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지려고 했다.

“꺽! 꺽……!”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껄떡거렸다.

서리가헌이 다가와 협성림을 쳐다봤다.

“이게 대별산에서 새로 익힌 일탄십검이야. 어떤 칼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 나도 놀랐어. 이렇게 빨라질 줄은 몰랐거든. 아직 미완성인데 훨씬 낫군.”

서리가헌이 칼을 들어 협성림의 가슴에 댔다.

“어차피 죽어. 알지? 그러니 이건 순전히 호의야.”

서리가헌이 칼을 푹 찔렀다.

“꺼어억!”

협성림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목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사지가 파르르 떨렸다. 무인답게 죽자고 생각했는데, 몸이 영 이상하게 반응한다. 이런 모습으로 죽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협성림이 고개를 툭 떨궜다.

“이제 빚은 갚았으니까…… 싸울 일만 남은 거니?”

서리가헌이 말했다.

“그래. 이제는 싸울 일만 남았어.”

어둠 속에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몽설이다. 그녀가 취운, 팔 장로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대별산에 모인 놈들은?”

“그자들은 육군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흩어질 거야. 성검문 협조 요청에 어쩔 수 없이 동원된 사람들이라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공격하지는 않아.”

“그럼 됐군. 나는 이만 가봐도 되겠니?”

몽설이 다가와서 협성림을 쳐다봤다.

“방금 이 사람이 쓴 검을 봤어. 내가 마주쳤다면 막기 힘들었을 거야. 적이지만 고마운 건 고맙다고 말해야지? 고마워.”

“빚 갚았다고 했잖니. 고마울 필요가 없다.”

쉬릭!

서리가헌이 칼을 휘둘러서 피를 털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피가 묻어있자, 협성림 몸에 쓱 문질러서 닦았다.

서리가헌이 말했다.

“다음에 보면 부모님 원수를 갚아. 난 일홀도를 증명해 보일 테니까. 그런 싸움에서는 서로 사정 봐줄 수 없다는 것도 알 테니, 혈검 잘 닦아봐. 후후!”

서리가헌이 쓴웃음을 흘렸다.

옛날, 서리가헌은 몽설을 꽤 귀여워했다.

뱀딸기도 따주고, 머루도 따줬다.

일홀도를 수련하는 바쁜 와중에도 꼬마애와 잠시 노는 것이 즐거운 낙이었다.

그 꼬마가 이렇게 커서 검을 쓴다.

서리가헌은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어제나 그제나 똑같은 것 같은데, 아장아장 걷던 꼬마애가 이렇게 훌쩍 커서 부모 원수를 말한다.

스릉! 척!

서리가헌이 칼을 꽂았다. 그리고 훌쩍 돌아서서 걸어갔다. 더는 미련이 남지 않은 듯이.

* * *

‘이기지 못했어.’

몽설은 눈살을 찌푸렸다.

혈검의 정화를 깨우치면서 이제는 소축십검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삼륜축첩공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이 검, 자신에게 쏟아졌다면 막지 못했다.

서리가헌이 펼친 일탄십검도 봤다. 땅에서 위로 솟구치면서 검날이 부챗살처럼 확 퍼졌다. 그리고 그중 한 가닥이 협성림의 복부를 그었다.

그 칼도 막지 못했다.

혈검경에는 두 무공을 제압할 만한 검학이 있다. 몽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펼쳐내지 못한다. 지금보다 배는 빠를 수 있는데, 한계에 부딪혔는지 더 빨라지지 않는다.

‘서리가헌이 막아줘서 천만다행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위험할 뻔했어.’

몽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걸이 한 가지 착각한 점이 있다.

취운은 아걸의 수하가 아니다. 몽설의 수하다. 취운에게 원주를 속여달라고 부탁하면 어떡하나. 취운이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할 줄 알았나.

“됐어. 위험은 끝났어. 돌아가자.”

“아걸에게는 안 가봅니까?”

취운이 물었다.

“가지 않아도 돼. 그 사람…… 오늘 되게 화났어. 그런 모습은 안 보는 게 좋아.”

몽설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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