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第三十三章 고육책(苦肉策) (3)
“아함!”
아걸이 기지개를 길게 켜며 나왔다.
“잘 잤어?”
몽설이 물었다.
“잘 잤지. 오랜만에 누가 업혀 가도 모를 만큼 푹 잤어. 머리가 다 개운한데?”
“정말 잘 잔 모양이네?”
“그럼. 잘 잤다니까. 다른 사람은?”
아걸의 주위를 쓸어보며 말했다.
오늘 정동으로 출발한다고 했다. 하지만 주위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벌써 떠났지.”
“벌써? 빨리들 갔네. 그런데 난 왜 가는 것도 몰랐을까? 정말 깊게 잤나 봐.”
아걸이 몸을 좌우로 비틀었다.
정반대다. 아걸은 지난밤에 한잠도 자지 못했다. 밤새도록 피를 쏟아내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것도 몽설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먼 길을 돌아왔다.
“그럼 우리도 바로 떠나야겠네?”
“천천히 가도 돼. 아침은 먹어야지. 내가 개울가에 차려놨어. 먹고 가. 그 정도 시간은 있어.”
몽설이 아걸의 손을 잡고 개울로 갔다.
개울 옆 큰 바위 위에 정말로 아침상이 정성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나물 반찬이 아직도 따뜻했다. 아침에 바로 만들었다. 밥에서도 들기름 냄새가 풍겼다. 배 속이 허할까 봐 들기름 밥으로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어쩐 일이야?”
“그냥 이렇게 한번 차려주고 싶었어. 어서 먹어.”
몽설이 말했다.
“같이 먹지.”
“그럴 거야.”
몽설과 아걸은 바위 위에 앉아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 * *
길을 가는 도중이지만 보고는 계속 이루어진다.
몽설이 객잔을 잡으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나타나서 묵직한 보따리를 건넨다.
하루 동안 수집된 무림 동향이다.
정동에 대한 정보는 반드시 보고하게 되어 있고, 그 외에는 가장 주목받는 사건만 보고된다. 다른 자잘한 보고는 취화원으로 돌아간 다음에 받는다.
그런데 요즘 부쩍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가 있다.
“또 혈도비자야?”
몽설이 읽고 있던 서신을 한쪽으로 치웠다.
“오늘도 혈도비자 소식은 빠지지 않네.”
“오늘은 무슨 소식이야?”
아걸이 짐짓 아무것도 모른 것처럼 물었다.
“황학산에서 발견된 시신 백 구 있잖아? 그 사람들이 바로 지옥혈객이라네?”
“그래?”
“흑의 경장, 큰 방갓, 허리에 찬 검. 한성에서 살겁을 저질렀던 지옥혈객이래.”
“그렇구나.”
“그런데 왜 혈도비자를 흉내 낸 거지? 지옥혈객을 죽였으면 잘못한 일도 아닌데. 손속이 너무 잔인해서 혈도비자에게 떠민 건가? 이해가 안 돼.”
몽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옥혈객들의 시신이 너무 처참해서 처음에는 맹수에게 습격당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 중 한두 명이 ‘혈도비자’라는 별호를 자신의 피로 적어놓았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자신들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혈도비자라는 이름이 주목받고 있다.
아걸이 말했다.
“손속이 잔인하니까 혈도비자인 줄 알았던 거지. 요즘 잔인하기만 하면 무조건 혈도비자라고 하잖아.”
“정말 그럴까?”
“그럴 거야.”
“정말 오빠가 한 일 아니야?”
“내가 무슨 시간이 있어서 황학산까지 갔다 와. 잠은 언제 자고? 요즘 왜 이렇게 피곤한지 잠이 쏟아져.”
“그럴 거야. 잠자기도 바쁘지.”
몽설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아걸이 찔리는 게 있는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걸은 몽설에게 미안했다.
몽설은 아무것도 모른 체 앞으로 다가올 폭풍을 고스란히 맞아야 한다.
적면대를 그토록 철저하게 박살 냈으니 이제 허도기가 나설 것이다. 성검문 혈무대에서 비무가 이루어지기 전에 허도기와 검을 맞대야 한다.
아걸은 진심으로 몽설에게 미안했다.
“허도기가 나설 것 같지?”
몽설이 불쑥 말했다.
아걸은 화들짝 놀라서 몽설을 쳐다봤다. 그리고 애써 무심한 척 말했다.
“아마도 그러겠지.”
“호호호! 오빠는 허도기가 나서길 바라는구나?”
“어차피 싸워야 할 상대니까. 지금은 어느 정도 자신감도 붙었고. 그래! 이제는 싸워도 될 것 같아.”
아걸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런데 어쩌지? 내 생각에는 허도기가 나서지 않을 것 같아.”
“……?”
아걸은 무슨 말이냐는 듯 몽설을 쳐다봤다.
“서리가헌이 협성림을 죽인 건 알아?”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
아걸이 놀라서 물었다.
몽설은 그 일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아걸은 적면대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동을 치기 전에 그들부터 정리할 생각으로 간 것이지만, 그 일이 자칫했으면 취화원 몰살로 이어질 뻔했다.
몽설은 아걸이 그런 사실을 모르기를 바랐다.
아걸은 혈도비자가 한 일을 말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전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잘한 일이라고 다독일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에 조금이라도 찬물을 끼얹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보고가 있네? 혈도비자가 적면대를 죽인 날, 서리가헌이 협성림을 죽였대.”
“그렇군.”
아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서리가헌은 완전히 허도기에게 칼을 겨눈 것 같다.
그래도 달라질 것은 없다. 서리가헌은 사부를 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그러니 문규에 따라서 정리해야 한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서리가헌과는 공존하지 못한다.
세상에 일홀도는 하나뿐이다. 일홀도보다 더 강한 무공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리가헌도 일홀도, 서리형개도 일홀도다.
모두 자신이 제일 강하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누가 강한지 부딪쳐서 결정해야 한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듯이 일홀도도 두 개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서리가헌과 서리형개는 진작 부딪쳤어야 한다.
일홀문이 삼십칠 대까지 전해졌지만, 삼십육대까지는 오직 문주 한 명만 존재했다. 문도도 없었다. 하다못해 시중을 드는 하인조차 두지 않았다.
어쩌면 이건 사부 잘못인지도 모른다. 사부가 일홀도를 늘려놨으니 사부가 매듭지었어야 한다.
아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몽설이 허도기에 대해서 말했다.
“적면대만 죽은 것보다 협성림까지 죽은 게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어. 만약 허도기가 오직 성검문주일 뿐이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길길이 날뛰었겠지. 당장 검을 들고 쫓아왔을 거야. 그만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 뭐가 두렵겠어.”
“그런데?”
“허도기가 지금 황상을 노리고 있다며? 그렇다면 문제가 달라지지. 무림에서 벌어지는 일이 귀찮을 거야. 무림 일은 성검문이 해결하기를 바라게 돼. 자신은 경거망동 못 해. 함부로 검 들고 무림에 들어설 수 없어.”
“음!”
“허도기는 당장 무림에서 사용해야 할 패를 잃었어. 그러니까 당분간은 조용할 거야. 물론 폭풍전야이지만. 그러니까 계속 준비해야 해. 다음에 올 자는 협성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악랄할 거야.”
“누가 오든 상관없어. 오면 받아주는 거지.”
아걸이 자신의 반철도를 툭툭 쳤다.
* * *
취화원 살수들은 터전을 두 번이나 잃었다.
편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내주고 낯선 땅으로 도주한 경험이 적지 않다.
취화원은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이합집산에 아주 능한 살수가 되었다. 흩어질 때는 어떤 방식으로 흩어지는 것이 좋은지 안다. 모두 자신들만의 방법을 갖고 있다.
어수룩하게 변장하지 않는다. 어설프게 상인이나 표사 틈에 섞이지도 않는다. 괜히 사람 없는 길을 골라서 움직인다고 산으로 기어들어 가지도 않는다.
이합집산에서 변장은 필수다. 하지만 방식이 달라졌다.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변장하고 움직인다. 같은 취화원 살수가 봐도 일반인으로 오해하고 무심히 지나칠 만큼 완벽하게 변장한다.
원래 취화원은 한성이란 도읍에 터전을 잡을 생각이었다.
평범한 사람들 틈에서 그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잔다. 평범하게 생활한다.
낮에는 한성 사람, 밤에는 살수가 된다.
이런 목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반인들 틈에 섞여드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연구하고 몸에 붙였다.
그런 면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아걸이다.
아걸에게도 단점은 있다. 그가 지닌 반철도는 너무 눈에 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아걸은 공포심을 주지 않는다. 칼은 무서운데, 사람은 무섭지 않다.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아걸은 살기, 투기, 진기를 녹여버렸다. 무인답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 같다.
아걸을 처음 봤을 때, 마방 하인인 줄 알았다.
그때의 모습이 지금 엿보인다. 싸움을 계속하면서 무척 날카로워졌는데, 지금은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살수들이 말하는 퇴빙(退氷)이다.
살수의 최고봉.
아걸에게는 차가운 얼음이 없다. 완전히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전혀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암수를 펼치면 당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퇴빙을 살수의 최고봉으로 여긴다.
아걸이 딱 그런 모습이다.
몽설은 그런 점이 좋았다.
옛날의 아걸은 오직 싸움밖에 몰랐는데, 지금은 조금 여유가 있어 보인다.
“오늘은 저기서 잘 거야.”
몽설이 큰 객잔을 가리켰다.
“객잔이 좀 큰데?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게 좋지 않아?”
“일부러 저기를 골랐어. 중간 점검해야지.”
“그런 것도 해?”
“그럼. 오는 도중에 탈 난 사람은 없는지, 정동에 무슨 변화는 없는지, 참고로 할 사항은 없는지. 여기서 다시 한번 점검해보고, 이상이 있으면 바로 물러설 거야.”
“물러설 생각까지 한 거야?”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럼, 저기 구곡주도 있나?”
“아니. 우리는 중간 점검만 하지만 구곡주는 이틀에 한 번씩 하고 있어. 여기 올 필요 없어.”
“그 생각, 이 머리에서 나온 거지?”
아걸이 몽설의 머리를 쿡 짚었다.
* * *
아걸은 객잔으로 들어서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객잔은 객실이 서른 개쯤 된다. 시골에서는 상당히 큰 객잔이다. 그런데 객실이 꽉 찼다.
무인이 모든 객실을 점거했다.
객잔 일 층에는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는 넓은 대청이 있다.
그곳도 만원이다. 모든 좌석에 사람이 앉아있다. 물론 그들도 무인이다.
병기는 각양각색이다.
묵직한 철추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는 자도 있고, 아주 긴 창을 벽에 세워놓은 자도 있다. 각양각색의 무인들이 일 층을 모두 차지했다.
“나갈까?”
아걸이 몽설에게 말했다.
“왜?”
몽설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아걸을 쳐다봤다.
“분위기가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러자 몽설이 아걸의 귀에 입을 대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미 생각했던 일이야. 오빠는 내가 정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공격했다고 생각해? 정동 무인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모를까.”
“그럼 이 사람들이?”
“맞아. 정동 무인들이야. 정예는 아닌 것 같아. 수색이나 하고 있으니까.”
몽설이 여전히 아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정동에서는 우리가 오는 거 이미 알고 있어. 이 사람들 눈과 귀가 천하에 깔려 있는데 설마 모르겠어? 다만 어디로 누가 어떻게 오는지 모를 뿐이지. 그래서 객잔을 점거하고 있는 거야. 이리 오는 자들을 잡으려고.”
“그걸 알면서도 들어온 거야?”
“중간 점검한다고 했잖아.”
“이게 점검이야?”
“이것보다 더 좋은 점검이 어디 있어. 모든 걸 한 번에 다 알게 되잖아. 여기서는 아마 우리가 제일 먼저 걸린 것 같네. 그럼 잘 된 거야. 중간 점검 끝!”
“하아!”
아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을 토해냈다.
“자, 그럼 오빠는 뒤로 빠져. 여기서부터는 정동과 취화원의 싸움이야. 이 사람들은 내 몫이야.”
몽설이 귀에서 입을 떼고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