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第三十五章 신전(新戰) (5)
거리를 너무 많이 벌렸다.
귀적칠흔이 민가로 들어설 때부터 어느 집으로든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한다.
뒤만 쫓느라고 아주 중요한 부분을 깜빡 잊었다.
지금 귀적칠흔은 목적지로 들어섰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고 들은 아걸의 무공을 보고한다. 귀적칠흔이 나선 일이니, 밤이 늦었지만 바로 보고가 이루어진다.
‘그러면 움직이는 사람이 있어.’
아걸은 마음을 죽였다. 일체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지금은 모든 생각이 잡념이다.
감각망기술로 오감을 숨겼다. 그리고 다시 시각만 일으켜 세웠다.
파앗!
몰안이 일어났다.
스으으읏!
몰안이 주위를 훑었다. 지붕 위에 핀 잡초까지 볼 정도로 시력이 확장되었다.
예전의 몰안은 시각만 확대한다.
지금은 다른 감각도 가동된다. 청각으로 들을 수 없는 소리, 땅 울림을 오체진감이 받아들인다.
귀적칠흔이 어디로 사라졌든 찾아낼 수 있다.
* * *
아걸은 몰안을 풀었다.
귀적칠흔이 어디로 스며들었는지 짐작된다. 아니, 짐작이 아니라 분명히 알겠다. 알 수밖에 없다.
스읏!
한 사람이 움직였다. 땅에서 몸을 솟구쳐서 담장 위로 올라섰다.
그는 담장에 서서 아걸을 쳐다봤다.
스읏! 스읏! 스스슷!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다. 담장 위로 올라선 자도 있고, 아걸이 밟고 있는 지붕으로 올라온 자도 있다.
모두 무인이다.
인원도 많다. 얼추 어림잡아도 서른 명은 훌쩍 넘는다.
이들은 모두 검을 뽑은 상태다. 신형을 날리기 전에 싸움 준비부터 끝냈다.
“야밤에 남의 지붕을 밟고 있으면 정상이 아니지? 무슨 볼일로 올라오셨나?”
용모가 매우 깔끔한 사내가 말했다.
남자가 보아도 ‘잘 생겼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미남자다. 콧수염을 잘 다듬어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하지만 안색은 매우 차다.
눈빛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심하다. 말을 하고 있지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관심 두지 않는다.
하지만 사내는 이미 반철도를 봤다. 순간적이지만 눈썹이 일그러지는 것도 확인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살기를 피워낸다. 아걸을 보내줄 생각이 없다. 아걸이 어떤 말을 하든, 용건이 무엇이든 관심 없다. 오직 죽일 생각뿐이다.
아걸도 상대방이 누군지 짐작해냈다.
지붕에 올라선 무인에게서 정천검법을 봤다.
저들이 취하고 있는 검세는 정천검법의 기수식이다. 하지만 허식을 배제하고 실전성을 가미시켜서 굉장히 사납고 날카로운 기세를 띤다. 밝은 기운 대신 사악한 살심을 검에 담았다.
정도 무공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성검문 문도는 아니다.’
성검문 문도가 아닌데도 정천검법을 펼친다면, 허도기가 가르친 군인이다.
이들은 허도기 수하다.
자신이 밟고 있는 이 집은 허도기와 연관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지붕 아래에 허도기가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리형개를 만나려고 했는데, 허도기를 만났다.
‘잘됐네. 어쨌든 만났으니 끝장을 봐야지.’
사내도 싸울 생각이지만, 아걸도 싸울 생각을 굳혔다.
아걸이 입을 열었다.
“높은 데 올라와야 많은 것이 보인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네. 지붕 위에 서니까 적위군을 다 만나고. 군인이 이런 데는 어쩐 일이지?”
사내가 조용히 답했다.
“……입이 방정이군. 그런 입이라면 검 맞아도 할 말이 없겠어.”
“내가 누군지 알지?”
아걸이 사내를 쳐다봤다.
“유명한 사람인가? 아니면 길 가는 똥개도 알아야 하나?”
“왜 이래? 우리 서로 말이 필요 없다는 것쯤은 알잖아. 성검문과 나, 피 튀기는 사이라는 거 몰라? 적위군답지 않게 빙빙 돌기는. 자, 시작할까?”
스읏!
아걸이 반철도를 들어 올렸다.
“강호인들은 눈치가 빨라서 좋아. 변명 같은 것도 하지 않고. 죽여라!”
사내가 차게 말했다.
순간, 지붕 위에 올라선 사내들이 재빨리 아걸을 포위했다.
사내들의 검에서는 정천검법의 부드러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살을 엘 듯한 차가움만 일어났다.
그때, 지붕 밑에서 조용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군장, 안으로 들여보내. 일홀문 네 번째 제자라니 얼굴이나 봐야겠지. 일홀문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
* * *
아걸이 문 앞에 서자, 큰 문이 좌우로 덜컹! 열렸다.
안에서 시동 두 명이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오자 문을 연 것이다.
아걸은 안을 들여다봤다.
사내가 탁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중이다.
중년인인지 초로인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다. 나이에 비해서는 젊어 보인다.
중년인은 강인하다.
눈썹이 매우 인상적이다. 송충이가 기어가는 듯 굵고 진하다. 눈은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이고, 입술이 두툼하다. 전체적인 인상은 ‘강한 얼굴’이다.
머리는 단정히 빗어서 상투를 틀었고, 옥으로 만든 관모를 썼으며, 비녀를 꽂았다.
옷도 비단으로 만든 침복(寢服)이다.
아걸은 중년인을 보자마자 뜨거운 피가 끓었다. 가슴 밑바닥에 억눌려있던 울분이 용암처럼 터졌다.
허도기!
부모 형제를 죽이고 성검문을 탈취한 자, 사부를 죽인 자!
저벅! 저벅!
아걸은 허도기를 향해 걸었다.
그러자 지붕에서 봤던 잘생긴 사내가 아걸 앞을 가로막았다.
“무식한 줄은 알았는데, 예의도 없군.”
사내가 눈짓으로 문 옆에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넓은 탁자와 아무것도 꽂혀 있지 않은 검대(劍臺)가 보였다.
반철도를 풀어놓고 가라는 무언의 지시다. 병기를 지니고는 공부를 만날 수 없다는 뜻이다.
아걸이 얼음처럼 차가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비켜.”
“난동 부리지 마라.”
“비켜.”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이군.”
“비켜!”
쒜에에엑!
반철도가 사내를 향해 쏘아졌다.
아걸은 십삼대 문주의 단도격타를 사용했다. 이제는 손에 익을 대로 익어서 마음만 먹으면 펼쳐진다.
- 지재필동(志在必動), 신동도취(身動刀就)
뜻이 일어나면 몸이 움직인다. 몸이 움직이면 칼이 따라온다.
사내는 급히 검을 들어서 반철도를 막았다.
아걸이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즉각 반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쎅! 쎅! 쒝!
반철도가 그가 쳐낸 검을 피해서 안으로 파고든다.
“헛!”
사내는 깜짝 놀라서 물러서려고 했다.
‘뭐가 이렇게 빨라! 언제 들어왔어?’
퍽! 퍽!
반철도는 사내의 옆구리를 두 번이나 연속해서 격타했다.
당장 핏물이 확 터져 나왔다. 갈비뼈가 잘리는 소리도 후드득 들렸다.
세 번째 칼은 사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때,
쒜엑! 타앙!
벼루가 날아와서 반철도를 후려쳤다.
아걸은 벼루가 날아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칼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단숨에 벼루를 갈라버리고, 사내의 머리까지 뎅겅 잘라낼 심산이었다.
사내에게 악감정은 없다. 방금 처음 봤는데 무슨 감정이 있겠나. 하지만 사내는 허도기의 수하다. 그것도 꽤 강한 무공을 지녔다. 얼마 전에 봤던 일기장군 하원랑과 비슷한 수준이다.
적위군장 사구정!
아걸이 쳐낸 반철도에는 사내를 죽여서 허도기에게 정면 승부를 건다는 의미가 담겼다. 그런데,
“음……!”
아걸은 벼루를 잘라버릴 생각으로 힘차게 내리쳤지만, 오히려 그가 반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벼루에 깃들어 있는 경력이 무척 강했다. 마치 철봉을 후려친 듯 손목이 시큰거렸다.
아걸의 손에서 목숨을 구한 사구정이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사구정의 옆구리에서는 붉은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반철도가 상당히 깊게 들어갔다. 하지만 사구정은 갈비뼈가 잘리는 중상을 입고도 눈썹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사구정은 오히려 더 차분해진 얼굴로 아걸을 차갑게 쏘아봤다.
아걸이 사구정에게서 눈길을 거둬 허도기를 쳐다봤다. 그리고 허도기를 향해 걸어갔다.
사구정이 다시 아걸 앞을 막으려고 했다.
“됐어. 나가봐.”
허도기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구정은 즉시 복종했다. 허도기를 향해 목례를 한 후, 아걸을 쏘아보며 걸어 나갔다.
“서리가헌의 팔을 잘랐다고?”
허도기가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당신 팔도 자르고 싶은데.”
아걸이 허도기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는 일부러 피 묻은 반철도를 탁자 위에 거칠게 놓았다.
허도기가 고개를 들어 아걸을 쳐다봤다. 하지만 곧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용골이군.”
“…뭐라는 거야?”
아걸이 시비조로 허도기를 쳐다봤다.
“용골을 몰라?”
“잘났다는 소리지?”
허도기가 주전자를 들어서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한 손으로 쓱 밀어서 아걸 앞에 놓았다.
“마셔라. 독은 들어 있지 않으니까.”
“차 마시러 온 게 아니다. 귀적칠흔을 쫓아왔는데 당신이 있네? 궁금한 게 참 많아져. 귀적칠흔은 서리형개가 양성한 은자들인데, 그자들이 왜 여길 온 거야?”
“반말이군.”
“서로 칼을 겨누는 사이에 반말, 존댓말 따질 필요 있나?”
“이놈아, 그래도 숙부 아니냐. 말 좀 가려서 해.”
순간, 아걸은 숨이 턱 멎는듯한 충격을 받았다.
허도기가 한눈에 자신을 알아봤다. 성검문주 허도강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풋…!”
허도기가 아걸의 놀란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르며 말했다.
“우리 허가는 용골이다. 대대로 용골이지. 무공 천재들. 그래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용골은 용골을 알아보는 눈이 있거든. 아직 네놈은 그 눈이 뜨이지 않은 모양이다만.”
“…알아보니 편해졌네. 그럼 내가 당신을 찾는 이유도 알잖아. 우리, 더 나눌 말도 없지?”
아걸이 반철도를 꼭 쥐며 일어났다.
허도기도 일어섰다. 그리고 침상 옆에 있는 검대로 걸어가서 보옥이 박힌 검을 집었다.
“네놈은 사실을 알 자격이 있지. 네 아비는 병들어 죽었다. 형수는 혈미독을 복용하고 자진했고, 네게 형이 세 명 있는데 그들은 내가 죽였다.”
허도기가 옛날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걸은 허도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십오 년 전에 있었던 일은 이미 알고 있다. 할배가 소상하게 말해주었다. 사부도 해준 말이니 틀림없다.
그것보다는 현재 싸움에 집중했다.
허도기는 검성이다. 검신이다. 검귀다.
스릉!
허도기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을 높이 들어서 검신을 훑어보며 말했다.
“이 검…… 참 오랜만에 잡네. 그러고 보니 검 잡은 지 꽤 됐어.”
스릉!
허도기가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검을 뽑아라. 괜히 생으로 얻어맞고 억울해하지 말고.”
“하하! 내 검조차 모르는군.”
“……?”
아걸이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허도기의 검을 모른다. 조명천검, 조명천해를 검신의 경지까지 연마했다는 사실만 안다. 그 누구도 허도기의 검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서리가헌과 서리형개는 무서운 고수라고만 말했다.
할배는 열 번쯤 죽었다가 깨어나면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모두 막연한 말이다. 정작 허도기의 검공이 어떤 것인지 말해준 사람은 없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조명천검일 것이다. 조명천해의 오의를 더 많이 녹여냈을 것이다.
검신? 그래, 어디 검신 검공 좀 보자.
“후웁… 후우웁…!”
호흡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간착아, 나를 본다. 내 중심에 있는 나를 본다.
곧 감각망기술이 일어나 오감을 죽였다. 동시에 눈이 번쩍 트였다. 몰안이다.
마음이 명경지수처럼 맑아졌다.
됐다, 싸울 준비가 끝났다.
허도기는 두 다리를 낮게 구부린 체 검파(劍把), 검 손잡이를 잡고 있다. 아직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즉각 뽑을 수 있는 발검 자세다.
아걸은 자신과 반철도와 허도기의 심장을 일자로 연결했다.
순간, 아걸이 도약했다.
파아앗!
허도기를 향해 반철도, 일홀도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