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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178화 (178/600)

#178화. 第三十六章 제일쾌검(第一快劍) (3)

“배를 구해!”

사구정이 말했다.

배 하나가 강 한복판에서 느리게 흘러간다.

배에는 아걸이 타고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걸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니 곧 잡을 것이다.

사구정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진래군을 쳐다봤다.

“언제부터 적랑대였냐?”

“적랑대라기보다는 은혜를 입은 게 있어서 말이야. 오래전 일이라 무시해도 좋지만, 그러지를 못하겠더라고. 큭큭! 나도 사람 새끼라서 말이지, 은혜는 알거든.”

“그래도 나는 네놈한테 정을 주었다.”

“나도 군장을 진심으로 따랐다면…… 믿을까?”

믿는다. 사구정뿐만이 아니라 적위군 모두가 진래군이 한 말을 믿는다.

죽은 황랑원이 한 말도 믿는다.

황랑원이나 진래군이나 정말 온 힘을 다해서 싸웠다.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전우들이다.

이들이 한순간에 반대편에 선 것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네가 입은 은혜가 뭐냐?”

“군장,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이야.”

진래군이 피식 웃었다.

적랑대는 항상 목숨을 걸 때만 나타난다.

누군가가 적랑대 신분을 밝혔다는 것은 이미 목숨에는 미련이 없다는 뜻이다.

진래군이 말했다.

“약속이란 걸 하기는 했는데, 간단한 일인 줄 알았거든. 딱 한 번 움직였는데, 그게 목숨을 걸게 될 줄은……. 큭큭!”

진래군이 쓴웃음을 흘렸다.

“난 아직도 네놈에게 정이 남았다. 살려 줄 구멍이 있는지 찾아볼 생각인데.”

“훗! 말도 안 되는 소리.”

진래군이 피식 웃었다.

“군장이나 나나 이런 소리에는 이골이 나지 않았나? 살려 줄 수 있는 구멍도 없고, 적랑대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어. 군장, 그만 보내 주시오.”

사구정이 진래군을 쳐다봤다.

사실이다. 진래군은 적랑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고문을 해도 말할 게 없다.

분명한 것은 적랑대 함정에 걸리면 진래군처럼 목숨이 떨어져도 반드시 움직인다는 것이다. 도대체 뭘 받아먹었기에, 어떤 약점을 잡혔기에.

사구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래군 뒤에 서 있던 적위군 무인이 검을 들어서 단숨에 내리쳤다.

퍼억!

진래군의 머리가 강변에 떨어졌다.

몸뚱이는 머리가 떨어진 후에도 한참 동안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피시식 쓰러졌다.

“배가 없습니다. 모두 침몰시켰네요.”

배를 구하러 갔던 적위군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있을 리가 없다. 적위군이 어디 한두 번 전쟁을 치러 봤나.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눈 감고도 안다. 아걸 상태가 좋지 않으니 배를 없애는 데 더 집중했을 것이다.

“강변으로 따라간다. 앞쪽에 배가 있나 계속 살펴보고!”

“넷!”

적위군 무인들이 대답했다.

* * *

배는 강심에서 느릿느릿 흘러갔다.

적위군은 강변에서 배를 지켜보며 천천히 걸었다. 배는 걸어가는 사람이 가다가 멈추고 다시 걸을 정도로 느렸다. 유속이 너무 느린 곳이다.

적위군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따라갔다.

어차피 아걸은 잡힌 것이나 진배없다.

투웅!

배 밑 쪽에서 작은 충격이 일어났다. 하지만 곧 잠잠해졌다.

노를 잡는 사람이 없으니 물길 따라서 흘러가다가 강물 속에 숨겨져 있던 암초에라도 부딪친 모양이다.

투웅!

작은 충격이 또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기어이 사달이 났다. 배 밑바닥이 네모반듯하게 잘려서 밑으로 뚝 떨어졌다.

쿠욱! 콸콸콸!

강물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낡은 배를 집어삼킬 듯이 맹렬했다.

아걸은 여전히 혼절한 상태였다. 쉽게 깨어날 상처가 아닌 데다가 치료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깨어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지금 목숨이 위험한 상태다.

강물이 아걸의 몸을 덮었다.

그때 강물 속에서 손이 불쑥 솟구치더니 아걸 옆구리를 낚아챘다.

슈우웃!

아걸은 악어에게 물려서 끌려 들어가듯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적랑대는 대부분 물가에 모여 산다.

물가는 강적으로부터 도주할 수 있는 최적의 지형이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물속까지 따라오지는 못한다. 간혹 수영에 능숙한 자들이 따라오는 일도 있지만, 물속 움직임만큼은 적랑대를 따를 수 없다.

수영과 무공은 별개다.

적랑대가 무공은 약할지 모르지만, 수영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적랑대는 물에 익숙해진 지 오래되었다.

아걸을 낚아챈 자는 물 위로 머리를 내밀지 않고 계속 잠영했다.

강변에 적위군이 있다. 머리를 내밀면 당장 발각된다. 슬쩍 내밀었다가 다시 들어가면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싶지만, 저들은 물방울 튀기는 소리도 듣는다.

약간의 기미도 흘릴 수 없다.

조금 있으면 저들도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점을 알 것이다.

그러면 강변을 수색할 것이니, 그전에 최대한 멀리 피해야 한다.

아걸이 걱정되기는 한다. 심한 상처를 입은 데다가 숨도 제대로 못 쉬면 자칫 탈이 난다. 운이 좋으면 숨이 끊어지는 것이고, 재수가 없으면 숨이 막힌 탓에 뇌 손상을 입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강적을 피해서 도주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스으으읏!

그는 무척 빠르게 물살을 헤쳐 나갔다.

“배가 가라앉습니다.”

사구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참 운이 없는 날이다.

낯선 놈의 칼에 맞았다. 믿었던 수하가 두 명이나 배신했다. 아걸을 눈앞에 빤히 보면서도 놓쳤다.

아걸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멀쩡하던 배가 괜히 가라앉나. 누군가가 구해 갔을 것이다. 누군가? 적랑대지 생각할 게 있나.

‘적랑대……!’

사구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공부 말대로 적랑대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뿌리를 뽑나. 놈들에게 뿌리가 있다면 땅을 파서 캐내면 되는데, 적랑대는 물 위를 동동 떠다니는 부평초다.

형체가 없으니 잡을 수도 없다.

부평초가 정착하지 못한다는 나쁜 점도 있지만, 지금과 같을 때는 상당히 유용하다.

“수색할까요?”

수하가 말했다.

“수색? 후후……. 돌아가자. 놓쳤어.”

사구정은 추격을 포기했다.

수하 말대로 강변을 수색하면 어떤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흔적을 계속 쫓으면 누군가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또 흔적이 끊긴다.

아걸은 다른 자에게 인계될 것이다. 그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추격은 거기까지다.

죽을 고생을 하고 쫓아도 적랑대 한 명 더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이미 적위군이 쫓고 있는 것을 아는데, 그에 대한 대처가 없겠나.

사구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 * *

“데려왔습니다.”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덜컹!

방문이 급히 열렸다. 그리고 키 작은 노인이 한달음에 뛰어나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숨은?”

“붙어 있습니다.”

“빨리! 빨리!”

노인이 채근했다.

사내는 부지런히 뒤뜰로 가서 작은 항아리를 들고 왔다.

“부어!”

노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사내는 뚜껑을 열고 항아리 안에 든 것을 아걸에게 쏟아부었다.

녹선마황이다. 항아리에는 녹선마황이 최소한 사오십 마리 정도는 들어 있었다.

꾸르륵! 꾸륵!

녹선마황이 상처를 향해서 기어갔다.

벌써 상처에 달라붙어서 피고름을 빨아먹는 놈들도 있었다.

“휴우!”

노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자…… 이게 뭐야? 하나, 둘, 셋, 넷. 네 군데나 맞은 거야? 그러고도 살았어? 하! 이놈 참 질긴 목숨이네. 세상에 허도기 검을 맞고도 목숨을 부지한 놈은 이놈이 처음일 거야. 안 그러냐?”

노인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허도기의 검을 맞고도 살아난 사람은 없다.

일 검을 맞고도 살아났다면 천운을 타고난 것이다. 이 검을 맞고도 살았다면 태어났을 때 목숨을 두 개 갖고 태어난 기형아다. 정상인은 그럴 수 없다.

아걸은 사 검이나 맞았다. 그러고도 숨이 붙어 있다. 이거는 뭐라고 말할까. 기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약하다. 천신이 직접 현신해서 보살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여유가 생긴 노인은 상처를 자세히 살펴봤다.

요행히 검이 조금씩 빗나갔다. 아주 조금씩 빗나가서 허도기가 어디를 노렸는지까지 알 수 있다.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참…… 허도기 검이 변했나? 왜 숨을 끊어 놓지 못했지? 이런 검을 쓰는 놈이 아닌데.”

순간, 노인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뒤는? 뒤는 단단히 살폈어? 혹시 쫓아오는 놈 없어?”

“없어요. 몇 번이고 살펴봤는데…….”

“네놈이 뭘 알아!”

노인은 괜히 사내에게 성질을 부렸다.

허도기가 쫓아왔으면 사내가 알아내지 못한다. 아무리 주의를 해도 미행을 눈치채지 못한다. 사내에게 허도기까지 찾아내라는 것은 너무 무리다.

“기다려 보면 알겠지. 이놈을 이렇게 만들어서 일부러 미끼로 쓴 거라면 우린 다 죽었고, 아니라면…… 이놈 목숨이 질긴 거야, 허도기 무공이 약해진 거야? 거참 모르겠네.”

노인이 중얼거렸다.

* * *

검이 날아온다.

피하려고 애를 써 본다. 하지만 너무 빨라서 피할 수 없다. 검이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검을 뽑는 것도 보지 못했다. 치는 것도 보지 못했다.

퍼억!

검이 목을 꿰뚫었다.

“악!”

아걸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날 때보다 더 빠르게 드러누웠다.

“크윽……!”

아걸은 자신도 모르게 격한 신음을 쏟아 냈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온다. 전신이 난자당했는지, 고통이 뼛골까지 울린다.

“이놈아! 누워 있어! 뭐 하러 일어나!”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할…… 배……?”

아걸은 고개를 돌려서 음성이 들린 곳을 쳐다봤다.

할배다. 할배가 녹선마황을 으깨서 즙을 만들고 있다.

아삼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무정한 놈 같으니. 늙은이를 골방에 처박아 놓고 찾아오지도 않아? 정혼녀하고 있으니까 시시덕거리고 좋다 이거지? 공들여서 키워 놨더니, 계집 치마폭에 폭 빠져서는.”

아삼이 투덜거렸다.

“할배, 괜찮아? 다 나은 거야?”

“이놈아! 그 말은 내가 해야지! 괜찮냐? 어떻게 허도기 검을 네 번이나 맞고도 살아나냐? 너 목숨이 몇 개야?”

아삼이 녹선마황 즙액을 가져와서 상처에 뿌렸다.

“크윽!”

아걸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프냐? 검 맞는 건 안 아프지? 가만히 보면 네놈은 취미가 검 맞는 것 같아. 너 변태지? 맞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이렇게 되라고 내가 반철도를 만들어 준 줄 알아?”

“할배, 목소리 창창한 거 보니 다 나았네. 큭! 깨어나니까 좋다. 가 보지 못한 건 미안. 엄청 바빴거든. 칼 맞고 다니느라고. 칼 맞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멍청한 놈.”

“그러게 아직 준비 안 됐다니까 왜 덜컥 일을 벌이고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당하는 거 아냐! 크윽!”

아걸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리고는 다시 상처가 울려서 인상을 폭 찡그렸다.

“허도기 검은 봤냐?”

“굉장히 빨라. 너무 빨라서 감당이 안 되네.”

“그럼 그 검을 상대하려면 몇 살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냐? 앞으로 한 십 년 더 기다려 볼까?”

“…….”

아걸은 할 말을 잃었다.

영원히, 영원히 준비가 안 된다.

허도기 검을 보지 않았다면 몰라도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하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그 검 또 만나면 상대할 수 있겠냐?”

“그런 검을 어떻게 상대해. 못 해. 다시 만나도 똑같아.”

“그래? 후우! 그럼 포기하자. 모든 것 다 묻어 버리고…….”

아걸이 아삼 말을 막았다.

“그런데 허도기도 날 못 죽였어.”

“뭐?”

“날 못 죽였다고. 검을 네 번이나 쓰고도 못 죽였어. 내가 허도기를 상대하지 못하듯이, 허도기도 나를 못 죽여. 그럼 또 부딪쳐 볼 만하지 않아? 그런데…… 왜 이렇게 배고프지? 밥 없어?”

“뭐? 이놈이!”

아삼이 아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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