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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181화 (181/600)

#181화. 第三十七章 신련(新練) (1)

덜컹!

아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어디 가냐?”

방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할배가 말을 건네 왔다.

“바람 좀 쐬려고.”

“밤바람 오래 쐬지 마라. 아직 몸이 안 나았어. 괜히 싸돌아다니다가 탈 나.”

“하하!”

아걸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자식 웃기는. 내 말이 틀린 것 같냐? 몸 간수는 젊었을 때 해야 해. 늙으면 생고생한다.”

“그렇게 몸 생각해 줄 것 같으면 칼을 주지 말았어야지.”

“이놈아, 네 업보가 그 모양인 걸 어떡해? 넌 태어날 때부터 칼 쥐고 태어난 놈이야!”

“그럼 몸 걱정을 하지 말던가.”

“이놈아, 널 어떻게 키웠는데 걱정을 안 해! 그게 할배한테 할 소리냐! 이놈아!”

“하하하!”

아걸은 웃었다.

할배는 방 안에서 서신을 읽고 있다.

적랑대가 건네준 중원 소식이다. 중원 무림에서 누가 어떤 일을 벌이든 사흘만 지나면 할배도 안다.

할배는 적랑대를 차기 대주 임지정에게 넘겨주었다.

더는 적랑대 보고를 받을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정보만은 계속 보내 달라고 했다. 또 설혹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어도 임지정은 계속 보내왔을 것이다.

정보는 아삼에게도 필요하다. 그래서 받고 있는 것이었다.

“일찍 자. 노인네가 밤늦게까지 불을 켜 놓고 있는 것도 볼썽사나워.”

“알았다, 이놈아.”

저벅! 저벅!

아걸은 밤길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아걸은 허리에 반철도를 찼다.

산책 나온 것이 아니다. 등에 간단한 봇짐도 맸다.

길을 떠난다.

할배와의 이별은 농담 몇 마디면 됐다.

서로 울고 불면서 헤어질 것이 아닌 이상, 딱 그 정도의 이별이면 충분하다.

할배가 건강하게 일어선 모습을 봤으니 안심이 된다.

달이 밝다.

하늘 높이 하얗게 뜬 달이 온 세상을 비춰 준다.

할배 말대로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다. 하지만 허도기와 약속한 비무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이 상태로 혈무대에 서면 일 검에 꼬꾸라진다.

그럴 수 없지 않나. 이겨야 하지 않나.

한 번은 졌지만, 혈무대에서는 허도기를 쓰러트려야 한다.

그러자면 시간이 없다.

할배랑 편안히 있고 싶다. 몽설과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면서 지내고 싶다. 몽설이 지휘하고 있는 취화원 살수들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행복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 위에 지어진 것이다.

사상누각(沙上樓閣)!

허도기가 콧김 한 번만 불면 날아가 버릴 행복이다.

지금 아걸은 허도기가 양해해 주었기 때문에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래. 손대지 않을 테니까 마음껏 놀아 봐. 너 한번 살아 봐.’라고 물러서 주어서 행복을 누린다. 허도기가 ‘인제 그만 행복해.’라고 말하면, 그 순간부터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지 않나.

저벅! 저벅!

아걸은 밤길을 걸었다.

* * *

“들어왔냐?”

아삼이 방문 밖에서 물었다.

아걸의 방에 불이 밝혀 있다. 하지만 인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아직 안 들어왔어?”

덜컹!

아삼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아무도 없다. 대답이 없자,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역시 없다.

“사람도 없는데 불은 왜…….”

아삼은 호롱불을 끄려다가 멈칫! 멈춰 섰다. 그리고 방안을 천천히 살폈다.

방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너무 깨끗하다.

아걸이 깔고 덮었던 이부자리는 잘 개켜져 있다.

‘반철도!’

아삼은 제일 먼저 반철도부터 찾았다.

반철도가 없다.

한쪽 구석에 쌓아 놨던 옷가지도 몇 개가 없다.

아삼은 아걸이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놈의 자식. 누가 일홀문도 아니랄까 봐 모질기는.”

아삼이 툴툴 웃었다.

아걸이 허도기를 찾아갔다고 들었을 때, 이미 당할 것을 예측했다. 아걸은 허도기 상대가 안 된다. 아걸이 강하지만 허도기는 말도 안 되게 강하다.

아걸이 당한 것은 놀랍지 않다. 하지만 아걸의 몸을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도기의 검이 너무 깊게 박혔다. 한 치만 정확히 찔렀다면 즉사를 면치 못할 상처였다. 아걸은 저승사자에게 붙잡혔다가 간신히 손을 뿌리치고 탈출했다.

아걸이 살아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다.

아걸은 일홀도 덕분이라느니, 찰나 만에 요혈을 피할 수 있다느니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아걸이 모든 칼을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다면 아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밖에 남지 않는다. 정말로 빠르거나 강한 사람이 아니면 못 죽인다.

최소한 아걸보다는 훨씬 빨라야 한다.

아걸이 함께 죽자고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여기에 걸려들면 무조건 죽는다. 아걸은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하고, 반면에 정확하게 칼을 쓴다.

죽을 수밖에 없지 않나.

아걸을 이기려면 동귀어진으로 떨쳐낸 칼을 피하고, 아걸을 쳐야 한다.

허도기는 여기에 부합될 만큼 빠르다.

순전히 아걸이 무공만으로 허도기가 전력을 다해 찌른 검을 피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

아걸도 그런 점을 알고 있어서 총총히 떠난 것이다. 일홀도를 갈고 닦을 심산이다.

그러니 밤이 늦었는데도 옷가지만 싸서 나간 것이겠지.

쫓아가지 않는다. 그래, 일홀도를 다듬어 봐라.

“자식. 간다고 말이라도 했으면 용채라도 넉넉히 챙겨 주지. 말도 없이 가고 그래. 털터리로 밖에 나가 봤자 생고생이지 뭐.”

아삼은 호롱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이 밤, 한 놈이 죽음을 벗어나기 위해 길을 걷고 있다.

놈이 걷는 길에 티끌만 한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데, 줄 수가 없다.

이번 길은 아걸 혼자서 풀어야 한다.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십몇 년을 수련해도 제자리인 것이 무공인데, 아걸은 서너 단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불가능한가?

“휴우! 달도 참 밝다.”

아삼은 밝은 달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걸은 젓가락 한 개를 챙겨 들고나왔다.

손에 젓가락을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 심심풀이로 젓가락을 휘돌린다. 정말 심심해서 젓가락을 돌리고 있을까? 아니다. 젓가락은 일홀도다. 반철도다. 반철도를 휘두르면서 다닐 수는 없어서 젓가락으로 대신한다.

길을 걸으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잠들기 전에도 항상 젓가락을 휘돌린다.

사람이 없을 때는 반철도를 사용한다.

휘리릭! 휘리리리릭!

반철도가 거세게 휘돈다. 어느 한 군데 걸림이 없도록 자유롭게 움직인다.

칼을 손에 붙인다.

이 수련은 오래전에 했었다.

열 살 땐가? 그때부터 시작해서 이 년 넘게 칼을 움직였다.

도신일체(刀身一體)는 말만 앞세워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깨달음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부단한 수련이 없으면 절대 이뤄지지 않을 노력의 산물이다.

이미 한번 해 본 수련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이어나갔다.

휘리리릭! 휘리릭!

환부살도 십육식 백이십팔초가 젓가락으로 펼쳐졌다.

제일 대 일홀문주, 광도의 일홀도가 쉴 새 없이 전개되었다.

신법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다. 손에 칼을 붙이는 작업이기 때문에 초식의 흐름만 이어가면 된다.

삼십육 문주의 일홀도는 눈 감고도 펼칠 수 있지만, 처음부터 다시 수련한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난생처음 접하는 무공처럼 신기한 마음으로 펼쳐 본다.

‘굉장한 살초!’

제일 대 일홀문주가 왜 미친 칼, 광도라고 불렸는지 알 것 같다.

환부살도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이 풀려야 제맛이 난다.

백이십팔초가 미친 듯이 풀리는 것이다.

이런 칼을 쳐내려면 일홀문주 역시 제정신일 수가 없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들어야 한다. 중간에 멈출 수도 없다. 일단 칼을 쓰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

미친놈의 칼이다.

‘이게 이런 칼이었나?’

휘리리릭! 휘리릭!

아걸은 환부살도를 몇 번이고 펼쳤다.

자신도 환부살도를 종종 사용했다. 하지만 미친 칼은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광도가 전개하는 맛은 나지 않았다.

휘릭! 휘릭! 휘리리릭!

젓가락이 맹렬하게 휘돌았다.

제이 대 일홀문주 목도일참은 목도삼법으로 유명하다.

병기끼리 부딪치는 일이 없다. 일 초에 살을 벤다. 칼을 썼으면 반드시 죽인다.

목도일참은 늘 일 초만 사용했지만, 초식은 여든한 가지나 된다. 팔십일 참도다. 그중에 하나만 사용했고, 언제 어느 때든 상대방을 베어 냈다.

아걸도 참법을 종종 구사했다. 하지만 아걸이 구사하는 참법은 목도일참만큼 맹렬하지 않았다. 일 초에 즉사시키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빠져 있었다.

환부살도가 백이십팔초, 목도참법이 여든한 가지. 무공 두 개만 해도 이백 개가 넘는 살도가 나온다.

아걸은 수천 가지 도법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사용했다.

그 결과,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공이 펼쳐졌다.

환부살도가 어린애 장난 같았고, 목도참법이 허수아비나 베는 무공으로 전락했다.

허도기가 환부살도와 만났다면 어땠을까?

허도기는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 여유도 갖지 못한다. 살아남지 못한다는 각오로 검을 들었을 것이다.

아걸은 그런 도법을 서른여섯 개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다. 자신의 일홀도를 찾을 게 아니라 환부살도만 죽으라고 수련했어도 지금보다는 강해졌을 것 같다.

처음부터 다시 한다. 하지만 출발선이 완전히 다르다. 예전에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칼을 아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젓가락을 돌리든 반철도를 돌리든 옛날과 같을 수가 없다.

휘리리리릭!

칼을 돌린다. 일홀도 초식을 펼친다.

삼십육 문주의 모든 칼을 다시 들여다본다.

지금 보는 일홀도는 사부가 선보여 준 서른여섯 가지의 무공이 아니다. 아걸이 터득한 칼을 기준으로 해서, 호적수의 칼을 살핀다는 심정으로 본다.

삼십육 문주가 적이다.

환부살도를 수련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자신의 일홀도로 파해하는 것이 목적이다.

가상의 적, 서른여섯 명과 싸운다.

휘리리리릭!

젓가락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목도참법 중 회선도다.

스읏!

아걸은 왼손으로 회선도를 찔렀다.

타악!

젓가락이 손가락을 쳤다.

일홀도가 회선도를 뚫지 못하고 중간에서 막혔다. 실전이었다면 크게 당했다.

칼의 오의를 알고 일홀도를 다시 보니 무척 무섭다.

지금까지 자신은 이렇게 훌륭한 무공을 욕보이고 있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해 준 격이다.

휘리리릭!

이번엔 젓가락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손끝으로 올렸다가 뚝 떨어트리기를 반복했다.

십대 문주의 천력도다.

젓가락이 금방이라도 손끝에서 벗어날 듯 위태롭다가도 다시 쑥 퉁겨 올랐다. 마치 손끝에 실이라도 매달아 놓은 듯 찰싹 달라붙어서 움직였다.

“거참. 희한한 재주를 가졌네. 심심하지는 않겠어.”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말했다.

“네. 심심하지는 않죠.”

아걸이 웃으면서 젓가락을 돌렸다.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젓가락을 움직인다. 일홀도를 수십, 수백 번 반복한다.

“그게 어떻게 손에서 떨어지지 않지? 밑으로 던지는데.”

“떨어지기 전에 낚아채는 거죠.”

아걸이 사실을 말했다.

여기서 하나 더 말한다면 굳이 낚아챈다는 느낌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이 본능적으로 낚아챈다. 몸과 칼이 하나가 되는 도신일체가 되면 칼이 몸의 일부가 된다.

휘르르륵!

젓가락이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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