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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182화 (182/600)

#182화. 第三十七章 신련(新練) (2)

팔 장로가 서신을 내밀었다.

“우리 서신은 아닌데, 어디서 온 거예요?”

몽설이 낯선 형태의 서신을 받아 들며 물었다.

“적랑대에서 보내왔습니다.”

“적랑대요?”

몽설은 서신을 받아서 펼쳤다.

적랑대주 임지정의 이름으로 온 서신이다.

아걸을 구해서 치료했는데, 아삼에게조차 말도 하지 않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는 밀서다.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팔 장로가 말했다.

“아뇨.”

몽설이 팔 장로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아네요. 찾지 마세요.”

몽설은 말을 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아걸!’

아걸의 얼굴이 생각난다. 볼을 어루만져 주던 손이 느껴진다. 숨소리가 들린다.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달려가고 싶다.

‘안 돼. 찾아가면 안 돼.’

몽설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삼에게서 연락을 받고,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았다.

아삼이 살아난 것, 아걸이 허도기를 찾아간 것, 그토록 기다리던 일생일대의 승부를 가린 것, 그리고 패한 것, 심한 상처를 입어서 생사가 위태롭다는 것까지.

아걸이 입은 부상 정도가 꽤 심했다.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다고 보는 편이 나았다. 비록 녹선마황으로 치료한다고 해도 평생 반려자가 다쳤지 않은가.

몽설은 그때도 찾아가지 않았다.

실수나 약간의 실력 차이로 패배했다면 위로가 도움이 된다.

아걸은 말도 안 되게 패배했다. 상대방의 옷깃도 스쳐보지 못한 채 난타당했다.

이런 상처는 자칫 평생 심리적 불구 상태를 몰고 올 수도 있다.

아걸 스스로 차분히 생각하고 일어설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까지 누구도 옆에서 다독여서는 안 된다.

냉정한 말이지만 무림 밥을 먹으려면 이 정도 아픔은 견뎌야 한다.

아걸이 아삼에게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인 데도 이유가 있다. 아걸 스스로 일어서려고 한다.

보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한다.

자신이 달려가면 반겨줄 게 틀림없지만 그럴 수 없다.

“아걸은 잘 해낼 거야. 일홀문 문주잖아.”

몽설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럼요. 잘 해낼 겁니다. 정신력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하잖아요. 칼 맞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에요? 그때마다 꺾이지도 않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어섰잖아요.”

팔 장로가 몽설을 위로했다.

몽설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아걸에 대해서는 모든 걸 눈감아 주세요. 그보다는 서리형개 동태를 파악해 주세요. 서리형개가 칼을 들면 곤란해져요.”

“서리형개 위치를 알게 되면…… 어쩌시려고요?”

팔 장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만약 숨을 것이면 취화원도 준비를 해야 한다. 제3의 장소도 마련해 두어야 한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문도 모두를 이끌고 피할 곳이 필요하다.

취화원 전체가 서리형개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것 역시 말도 안 되지만, 사실이다.

“일단 정신 바짝 차리고 서리형개를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즉시 바로 저에게 알려 주시고.”

“네. 알겠습니다.”

팔 장로가 대답했다.

취화원이 정동을 부쉈으니 서리형개와 부딪치는 일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취화원은 한순간에 날아간다.

그렇다고 다시 숨지는 않는다. 다시 숨으면 예전과 똑같이 된다. 새로 만들고, 도망가고, 또 새로 만들고, 도망가고…….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된다.

“오늘까지는 푹 쉬게 하고 내일부터는 다시 수련시키세요. 이번 싸움에서 보고 배운 게 많으니까 터만 깔아 주면 알아서들 수련할 거예요.”

“후훗! 벌써 수련들 하고 있어요. 이번에 느낀 게 아주 많은 모양입니다.”

팔 장로가 말했다.

살수는 누구도 지켜 주지 않는다. 검을 들고 싸움판에 서면 자신 목숨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이것이 제일 철칙이다.

두 번째 철칙은 철저히 동료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혹 자신이 다치거나 죽더라도 동료의 뒤를 봐줘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뒤도 동료가 봐준다.

이 두 가지 철칙을 수련해야 한다.

무공을 수련해야 하고, 믿음을 수련해야 한다. 동료를 완전히 믿을 수 있도록 마음 수련을 해야 한다.

“다음 적은 서리형개예요. 큰 파도가 몰려오고 있어요. 이 파도를 넘을 때까지 쉬지 못하게 해 줘요.”

몽설이 야무지게 말했다.

* * *

적랑대는 정말로 대단한 문파다.

취화원이 전력을 기울여서 적랑대를 찾고 있지만, 거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나마 흔적이라고 찾은 것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지워져 버린다.

중원 무림에서 제일 잘 숨는 문파다.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까 허도기 눈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몽설은 아삼의 거처를 안다.

아삼이 밀지를 보내올 때, 걱정스러운 마음에 심부름꾼에게 미행을 붙였다.

원래 적랑대는 심부름꾼도 외인을 사서 쓴다.

절대로 자신들이 있는 곳은 드러나지 않도록 치밀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미행을 붙인 심부름꾼은 곧장 아삼 거처로 갔다.

아삼의 안배다.

몽설의 마음을 이해하고, 미행자에게 아걸의 상태를 직접 보고 전하라는 뜻이다.

‘할아버지를 만나야 해.’

몽설은 오랜 숙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걸은 떠나고 없지만, 그래도 아삼은 만나야 한다. 아걸 때문이 아니라 공적인 일로 만날 생각이다.

취화원에서 아삼 거처까지는 보름 거리다. 오고 가고 한 달이 걸린다. 서리형개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데, 한 달이나 자리를 비워도 될까?

몽설이 고민하고 있을 때, 취화원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이게 얼마 만이죠? 일 년도 훨씬 더 됐죠? 그때 치우현에서 보고는 못 뵀으니까.”

몽설이 한달음에 달려가서 아삼 손을 잡았다.

“무정하기는 그놈이나 너나 똑같아. 어찌 소식 한 장 없누. 늙은이가 다쳤는데, 궁금하지도 않아?”

“죄송해요.”

“죄송해야지. 사람이 그럼 안 돼.”

아삼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아삼은 이미 취화원의 경계망을 파악했다. 뚫고 들어올 길, 빠져나갈 길을 알아냈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파악한 것은 아니다. 살수의 본능이다.

“적랑대가 궁금할 것 같아서 왔지. 아무래도 네가 적랑대에 눈독을 들일 것 같아서.”

“호호호! 맞아요. 그러잖아도 그 문제 때문에 정말 찾아뵈려고 했거든요.”

몽설이 아삼에게 차를 따라 올렸다.

아삼이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차를 뭐로 받을까? 적랑대주로 받을까, 싹수없는 놈 말처럼 할배로 받을까?”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해요?”

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랑대주요.”

“그럼 못 받지. 난 이미 적랑대주 자리를 후인에게 넘겼어. 이제 난 자연인이야. 아무 직책도 없고, 딸린 사람도 없어. 그러니까 이 바쁜 시기에 여기까지 찾아왔지.”

“아!”

몽설은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

적랑대에서 벌어진 일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비밀을 철저하게 지킨다.

“그럼 할배로 받아 주세요.”

“그래도 되냐?”

“그럼요.”

몽설이 환히 웃었다.

적랑대에 대해서 어떤 질문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삼을 오로지 아걸 할배로만 대하겠다는 거다.

후루룩!

아삼이 찻잔을 들어서 냉수 마시듯이 마셨다.

“아! 갈증 났는데, 시원하네. 한 잔 더 따라라.”

“찬물을 드릴까요?”

“아니. 이게 딱 좋아. 네가 손수 끓인 차 아니냐. 어떤 시원함도 네 정성에는 못 미치지.”

아삼이 활짝 웃었다.

“저는 차 잘 못 끓여요. 화로에 주전자 올린 게 전부예요. 그래서 다들 맛없다고 하는데.”

“맛만 있구먼.”

아삼이 차를 또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적랑대로 그렇고 취화원도 마찬가지고. 모두 끈 떨어진 연이니 같이 합치면 어떨까? 이 생각이지? 적랑대와 합치면 원주 자리도 양보할 생각이고.”

“의견을 여쭤보려고 했어요.”

적랑대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삼 할배 자격으로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깊은 부분까지 말할 수는 없고, 제삼자로서 의견만 말한다.

“뭐하러 합쳐. 서로 근본이 다른데.”

“네? 근본은…… 같지 않나요? 살수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아니지. 취화원은 꽃을 좋아하고, 적랑대는 피를 탐하는 붉은 늑대들이고. 서로 성질이 달라.”

몽설은 아삼의 말을 듣는 순간,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삼의 말에서 진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적랑대를 ‘피를 탐하는 늑대’라고 말했다. 적랑대 전원이 피를 묻히겠다는 뜻이지 않나. 그렇다면 곧 큰 싸움이 벌어진다. 적랑대가 피를 빨아먹고, 또 흘린다.

아삼은 단순히 적랑이라는 말 풀이를 한 것이 아니다.

취화원이 꽃을 쫓는다고? 아직은 평화롭게 들리지 않나. 피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취화원은 정동을 무너트렸다. 온몸에 피를 묻혔다.

적랑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피를 묻힌 적도 없고, 앞으로 묻힐 일도 없다.

그런데 아삼은 정반대로 말한다.

취화원은 싸울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적랑대는 이미 피를 묻히고 있다.

아삼이 말했다.

“서로 섞일 수 없어. 그냥 있는 대로 살아. 적랑대주를 찾아갈 생각도 하지 마. 찾을 수도 없겠지만.”

“무슨 일인지 말해 주시면 안 돼요?”

“큿큿! 아까 둘 다 살수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지? 살수는 언제 어느 때든 벼락을 맞게 되어있어. 반드시 벼락을 맞아. 취화원도 언젠가는 벼락을 맞을 거야. 하물며 같이 뭉쳐 있으면 벼락 맞을 가능성이 더 커. 흩어져 있는 게 나아.”

“네. 명심할게요.”

몽설이 찌푸려진 눈살을 펴지 못한 채 말했다.

아삼은 적랑대 말도 해 주면서 경고까지 해 주려고 왔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적랑대는 이미 벼락을 맞고 있다. 그토록 은밀한 조직이 피투성이가 된다.

‘허도기! 허도기가 적랑대를 공격할 거야. 아걸을 구한 곳이 적랑대니. 아!’

몽설은 비로소 보지 못했던 부분을 봤다.

어쩐지…… 적랑대가 아걸을 구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마음 깊이 무엇인가 찜찜한 것이 남았는데, 비로 이거였다. 적랑대와 합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부분이 마음에 거슬려서 그런 마음이 일어났다.

“너도 이제는 원주이니까 취화원을 잘 다스려야지. 내 말 명심해. 항상 벼락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

“적랑대는 괜찮아요?”

“내가 아무 놈에게나 대주를 물려줬겠냐? 적랑대주 그놈, 아주 야무져. 지금 봐라. 꼭꼭 숨었지?”

“네. 정말 잘 숨어요. 아무리 찾아도 못 찾겠더라고요.”

“후유! 모든 일이 잘 풀려야지. 너희도 벼락 걱정이지? 서리형개, 그놈 걱정은 하지 마라. 당분간 못 움직여. 그놈, 허도기 눈치 봐야 하잖아. 정동을 그렇게까지 키운 건 아무래도 허도기 눈 밖에 난 거니까.”

“아! 네.”

이번에도 몽설은 새로운 것을 배웠다.

무림은 사실을 바로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숨은 속을 다시 한번 살펴야 한다.

아삼이 말한 것은 그녀가 조금만 깊이 생각했어도 추론해 냈을 부분들이다.

‘정동을 이겼다고 너무 들떴어. 실력을 너무 과신했고.’

“할아버지, 고마워요.”

몽설이 손을 뻗어 아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제 첫 잔, 적랑대주로 받았으면 했는데…… 그것도 사과드릴게요. 저, 취화원주이기 이전에 몽설이에요. 정말 죄송해요. 할아버지.”

“하하하!”

아삼이 기분 좋게 웃으며 일어섰다.

“가시게요?”

“볼일 끝났으니 가야지. 난 이제 아무것도 거치적거리는 게 없잖냐. 그러니 그놈을 쫓아가야지. 쫓아가더라도 바싹 붙을 건 아니니까 말 같은 건 전하지 못해.”

아삼은 은밀히 아걸의 뒤를 봐줄 생각이다.

몽설은 이미 짐작했으면서도 물었다.

“뒤를 봐주시게요?”

“내가 봐줘야지. 누가 봐줘. 나 아니면 봐줄 놈도 없어.”

몽설은 아삼이 너무 반가워서, 정말 고마워서 손을 꼭 잡았다.

하고 싶은 말은 천 마디나 되는데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아삼도 몽설의 마음을 안다는 듯 손등을 토닥거렸다.

“네 조직 잘 건사하고, 아걸 그놈은 전혀 신경 쓰지 마라. 당분간 살행은 삼가고. 정동 부숴 버린 일로 많은 사람이 취화원을 주시하고 있어. 당분간 꾹 숨어 있어.”

“네.”

몽설이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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