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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홀도-185화 (185/600)

#185화. 第三十七章 신련(新練) (5)

아걸이 떠날 때, 손승도 따라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저 사람들 보고도 몰라?”

손승이 마을 사람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마을 사람들이 집 안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 손승과 웃고 떠들며 지내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모두 무서워한다. 손승이 떠나기를 바라는 눈치다.

아걸은 할 말이 없었다.

은거 고수를 찾아서 비무를 해 보자는 생각만 했다. 그 행동이 한 사람의 생활 터전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일절 해 보지 않았다.

무인은 싸우다가 죽는 것이 다반사다.

은거했다고 해도 누군가가 칼을 들고 덤비면 싸워야 하고, 죽고 죽이는 일이 예사로 벌어진다.

생활 터전이 무너지는 것쯤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손승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자 ‘아!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실 데는 있습니까?”

“너 때문에 쫓겨난 거니 네가 책임져야지. 뒷산에 약초 심어 놓은 게 만 평이야. 그거 다 물어내고, 저 집이 그래도 옆에 계곡물이 흘러서 살기 딱 좋았는데, 저것 값도 받아야겠어.”

아걸은 쓴웃음을 흘렸다.

손승은 갈 곳이 없다. 이제 새로운 곳을 찾아가서 새 터를 잡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야. 어떻게 진기 없이 참마도법(斬馬刀法)을 받아 냈지?”

“참마! 그게 참마도법이었습니까?”

“놀랐어?”

“약간요.”

“하하하!”

손승이 웃었다.

참마도법(斬馬刀法)!

참마도법은 달려오는 말의 머리를 단숨에 베어 내는 데서 붙여진 도법 명칭이다.

윤경(尹絅) 장군이 세운 윤가장(尹家莊)의 독문 무공으로, 윤가 직계 자손에게만 전수된다.

후일, 윤경 장군의 오대 손인 윤형(尹炯) 장군이 역모 사건에 휘말려 참수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구족이 몰살되는 대사건으로, 참마도법도 맥이 끊긴다.

“난 동냥질로 배운 무공이야. 수련하는 걸 지켜보다가 몰래 연습해 봤는데, 결국 들키고 말았지. 그런데 윤 장군님이 내 무공을 보고는 쓸만하다면서 계속 지도해 주셨지.”

외인에게 전수가 금지된 무공을 노비가 훔쳐 배웠는데, 용서하고 계속 전수했다.

손승의 재질이 그만큼 출중했다는 뜻이다.

그냥 내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지도를 시작했을 것이다.

어쩌면 윤형 장군은 자신의 대에서 참마도법이 절맥될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장군님이 심부름을 보내는 거야. 남만(南蠻)에 가서 서신을 전하라고. 오고 가고 일 년은 걸리는 먼 길인데……. 가는 도중에 장군님과 윤가장의 참수 소식을 들었지. 후후…. 서신을 뜯어보니 백지였어. 장군님이 날 살려 주신 거야.”

윤 씨 혈육은 역모 사건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하지만 노비는 빠져나갈 수 있다.

장군이 그 길을 열어 주었다.

이런 사실은 살수 문파의 정보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자넨 어디로 갈 생각인가?”

“화골(火骨)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화골? 사람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사람 이름입니다.”

“무슨 사람 이름이 화골이야? 불. 뼈. 뼈가 불에 탔다는 거야? 불덩어리 뼈?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군.”

“여수(如水) 부근에 산다고 들었습니다.”

“여수라면 여기서 지척인데 난 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지? 그자도 나 같은 자인가 보네. 화골이란 이름도 무림에서만 쓰이는 별호 같은 것일 거고.”

은거한 무인은 이름이 곧 별호일 경우도 있다.

무림을 떠나는 즉시 개명(改名)을 해 버리기 때문에 무림에서 사용하던 이름은 아는 사람이 없게 된다.

“전 이제 화골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그래? 그럼 가 봐.”

“그럼, 여기서…….”

“여기서는 뭘 여기서야. 가 봐. 나도 따라갈 테니까.”

“……?”

“딱히 갈 데도 없는데, 당분간 자네를 따라다녀 보려고. 솔직히 진기를 사용하지 않고 내 칼을 받을 사람은 세상천지에 없지. 이건 허도기도 못 할 것 같은데? 아니지, 하려나?”

“저는…….”

“자네가 내 칼에서 찾고자 하는 걸 찾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거 아냐? 이건 강호 일이 아니라 자네의 수련 과정이야. 그 과정을 한번 지켜보고 싶다. 무림에는 관심이 없지만, 자네는 구경하고 싶어졌어. 괜찮지?”

“그럼 가는 동안 계속 부탁합니다.”

“아니, 아니. 그건 사양하지. 내가 지쳐.”

손승이 월도를 들고 앞장섰다.

“여수까지는 내가 앞장설 수 있는데, 여수에서 숨은 사람을 찾는 건 정말 힘들어. 그건 자네 몫이고.”

“네.”

“그 화골이란 자도 무공이 강한가?”

“잘 모릅니다. 쌍겸(雙鎌)을 쓴다는 것밖에는.”

“낫을 무기로 삼는 인간치고 잔인하지 않은 인간이 없지. 마성이 짙은 자겠군. 이름도 그렇고.”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걸었다.

“그거, 젓가락 계속 돌릴 거야?”

“…….”

“무공수련 맞지?”

“네.”

“무슨 놈의 무공수련이. 어쨌든, 허도기 검은 어땠어? 어떻게 허도기 검을 맞고도 살아난 거야?”

손승이 그동안 굶주렸던 물음들을 우르르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아직도 산길을 걷고 있다.

산 밑으로 편히 걸을 수 있는 관도가 보이지만, 아걸이 굳이 산길을 고집했다.

“오늘도 길에서 노숙할 건가?”

“노숙이 편하더라구요.”

아걸이 웃었다.

아걸은 인간적인 삶을 포기했다.

식사는 열매로 대신했다. 감도 따 먹고 밤도 주워서 먹었다. 꿩도 잡아먹었다. 잠도 밖에서 잤다. 풀을 베어서 잠자리를 만들고는 이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잠들었다.

모든 것을 야생에 맡겼다.

젓가락을 돌리기 시작한 이후, 사람들과 섞여서 먹고 자지 않았다.

씻는 것마저 게을렀다면 영락없이 산짐승으로 오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 깔끔하게 씻는다. 옷도 거의 매일 빨아 입는다. 머리도 깔끔하게 다듬는다.

겉모양은 야생이 아니지만 속은 야생이 되어 간다.

그렇다. 일홀사도(一忽死刀)는 야도(野刀)다.

다만 일홀사도처럼 끊임없이 싸울 수는 없다. 싸우면 죽여야 하는데, 이미 상대가 안 되기 때문에 죽이는 게 큰 의미가 없다. 일홀사도 역시 발전하지 못한다.

평범한 자는 일홀사도를 받을 자격도 없는 것이다.

손승이나 지금 찾아가는 화골, 또는 소축십검 같은 사람은 싸울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약해 보인다. 병기를 맞대는 순간, 승패를 예측한다.

그 후에도 계속 싸운다면 살인일 뿐이다.

그래서 야생의 길, 야도를 선택했다.

일단 먹고 자는 것부터 야생에서 해결한다. 야생에 적응하면 칼도 야생이 된다.

이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마음을 다잡는 데는 이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그럼, 여기서 쉬지. 저기 바위 골이 있어서 밤이슬은 피할 수 있을 거야.”

손승이 바위가 밀집된 곳에 터를 잡았다.

아걸은 길을 걷다가 캐낸 도라지 두 뿌리를 씹어 먹었다. 이것이 오늘 저녁이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거 좀 줘?”

손승이 육포를 내밀었다.

아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야생은 잠깐만 방심해도 무너진다. 편안함을 손톱만큼만 추구해도 와르르 무너진다.

사람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어진다. 서 있는 상태에서 당장 자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조금씩, 한 단계씩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 일홀도는 야생도였다.

하지만 편안함을 찾다 보니 팔자 편하게 큰 대자로 누워서 자고 있었다.

몽설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 굉장히 편안하고 달콤하다.

할배와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된다. 차분하게 칼을 수련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모든 환경이 일홀도를 망친다.

어느 순간에도 일홀도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아걸은 이제야 비로소 사부가 왜 사형들을 따로따로 떼어 놨는지, 왜 혼자 살아가게 했는지 이해했다.

당시 사형들은 먹고 자고 입는 것을 혼자 해결했다.

사부는 무공만 점검해 줄 뿐,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활용품은 일절 지원하지 않았다.

그 당시, 일홀도는 야생도였다.

지금 다시 그 길을 찾는다.

휘릭! 휘릭! 휘리리릭!

아걸은 젓가락을 휘돌렸다.

손승은 한쪽 구석에서 잠들어 있다.

생각지 않은 동행이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같은 길을 가는 말벗 정도다.

손승은 어떤 수련도 방해하지 않는다.

아걸이 취하는 방법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따라 준다. 그는 아걸과 함께 밥을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잠도 같이 자지 않는다. 아걸이 하는 행동도 따라 하지 않는다.

혼자서 잠자리를 찾고, 먹을 것을 구한다.

그가 먹는 것과 아걸이 먹는 것은 매우 다르다. 그는 시중에서 사 온 것을 먹고, 아걸은 주변에서 구한 것을 먹는다. 그 외에는 모두 같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손승은 자신이 손수 자신의 잠자리를 만들었다. 아걸 것까지 챙겨 주지도 않는다. ‘너는 너, 나는 나.’ 완전히 별개의 인간처럼 행동한다.

이런 점이 아걸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러니 굳이 동행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휘릭! 휘리리릭! 휘릭!

젓가락이 손에서 빙빙 휘돌았다.

칼을 놓쳤는데…… 놓칠 수밖에 없었나?

아걸은 마지막 순간을 되새겼다.

진기가 집중된 월도는 무척 빨랐다. 하지만 반철도 역시 빠름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굳이 승부를 낸다면 양패구상(兩敗俱傷)이다. 서로 한 대씩 주고받는다. 내 칼만 치고 상대방의 칼은 피할 만큼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 않았다.

타격감도 좋았다.

월도가 치는 힘이나, 반철도가 치는 힘이나 엇비슷했다.

양쪽이 바위를 상대로 타격했다면 거의 비슷한 정도로 파고들었을 것 같다.

문제는 충돌에서 일어났다.

진기를 집중시킨 손승은 동체 충격을 받지 않았다. 아걸은 반철도를 통해서 쏟아져 들어온 힘에 거센 충격을 받았다. 동체 타격이 상당했다.

충돌에서 뒤졌다.

손승은 자신이 던진 충격을 진기로 흡수했다. 자신은 흡수할 게 없었다. 고스란히 육신으로 받았다.

충돌이 일어나면 안 된다.

서로 몸을 노리는 칼이었다면 그 싸움은 무승부였다.

‘충돌을 피하고 몸을 치는 법!’

휘릭! 휘리리리릭!

아걸은 생각을 하면서도 젓가락을 끊임없이 휘돌렸다.

손승을 이기기 위해서 무예를 겨룬 것이 아니다. 목표는 허도기다. 허도기의 빠름을 잡아야 한다. 그 말도 안 되는 빠름을 어떻게든 낚아채야 한다.

지금의 칼로는 허도기를 잡지 못한다.

야생도가 많이 날카로워진 것은 사실이다. 효과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문득, 아걸은 창피한 생각이 들어서 눈을 감았다.

손승이 월도를 쳐올 때, 마지막 순간에…… 그때 쳐올린 칼은 이십오 대 문주의 수신도가 아니었다. 십이 대 문주의 유성비도를 진기 없이 쳐올렸다.

수신도를 버리고 다른 칼을 썼다.

수신도보다 유성비도가 더 낫다고 생각해서 사용했다. 그리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반철도가 공기를 종이 찢듯이 갈라내면서 올라간다고 느꼈다.

그 부분이 창피하다. 이십오 대 문주를 뵐 면목이 없어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마지막까지 수신도를 펼쳤어야 한다.

이십오 대 문주였다면 결코 다른 칼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수신도로 싸웠을 것이다.

수신도는 이십오 대 문주를 천하제일도로 만들어준 칼이다.

그런 칼을 믿지 않고 다른 칼에 썼다는 것이 건방지다. 오만한 판단이다.

아직도 선대 문주들의 칼이 몸에 붙지 않았다.

이 칼들이 모두 몸에 붙은 다음, 자신의 일홀도를 펼쳐 볼 생각이다. 예전의 일홀도와 야생을 거쳐서 탄생한 일홀도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볼 것이다.

두 칼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두 칼이 같다면, 허도기를 피해서 도망 다녀야 한다.

휘리릭! 휘릭!

아걸은 십육 대 문주의 점촌일도를 펼쳤다.

젓가락이 점을 찍듯이 허공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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