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第三十八章 암살(暗殺) (1)
방갓 쓴 사내가 숲길을 걸어왔다.
사내는 매우 평범해 보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흑의를 입었다.
걸음걸이도 평범하다. 특별하게 가볍다거나 진중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매우 평범해서 무공을 아예 배우지 않은 범인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사내는 왼쪽 옆구리에 칼을 매달고 있다.
스읏!
사내가 물병을 들어서 목을 축였다.
옆구리, 겨드랑이, 등, 가슴, 목.
순식간에 다섯 군데나 허점이 드러났다. 누군가가 공격을 시도했다면 당장 베어 넘겼을 것이다.
사내는 물을 한바탕 들이켠 후, 빈 죽통을 숲길 옆에 던져 버렸다.
츠읏!
잔잔한 눈길들이 사내를 쳐다봤다.
지켜보는 눈들은 철저하게 살기를 숨겼다. 살기가 드러날 것 같으면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일반인들을 살기를 띄어도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음산한 기운 정도는 느낀다. 뭔가 좋지 않은 장소에 왔구나 하는 정도까지는 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무인은 정반대다. 살기에 무척 민감하다.
살기를 접한 무인은 두 가지 중 한 가지 반응을 보인다. 즉시 병기를 잡고 대응하는 부류가 있고,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가는 부류가 있다.
살기를 느끼고 기습을 경계해서 즉시 대응하는 자나, 이 정도 살기쯤은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자나, 어느 쪽이든 경계심은 일으킨다.
일반인들한테는 살기가 제 역할을 못 하고, 무인한테는 싸울 준비를 하라고 경고장을 보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절대로 살기를 일으키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한다.
하지만 방갓 사내는 이런 눈길조차도 눈치챈 듯하다. 일절 대응하지 않고 걷고 있지만,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귀여운 놈들’하고 말하듯이.
‘대단한 고수!’
월영은 천천히 숲에서 걸어 나왔다.
이 정도 고수라면 숨어 있는 게 의미가 없다. 기습을 취해도 단박에 베인다.
월영이 사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정중하게 묻는 듯하지만, 상당히 도전적인 말투다.
“산에서 길을 막으면 산적인데, 산적처럼 보이지는 않는군. 흠! 요즘은 여자도 산적질을 하나?”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는 저희 사유지예요. 볼 일이 없으시면 나가 주시죠.”
“사유지? 여기 전부가? 돈이 상당히 많은가 보군. 이 넓은 땅을 다 샀다니.”
“사면 안 되나요?”
“안 되지.”
“시비예요?”
“자기 돈으로 사면 누가 뭐라고 하나? 남의 돈을 훔쳐서 샀으니 안 된다는 거지.”
“너, 누구야!”
월영의 말투가 사나워졌다.
“내 것을 찾으러 온 사람. 여기를 다 샀다는 그 돈, 전부 내 돈 아닌가? 그래서 받으러 왔지.”
“미친놈!”
월영이 검을 잡았다.
그때, 사내가 눈에 기광을 머금고 말했다.
“나는 칼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 너, 그 검 뽑으면 죽어. 내 말 믿는 게 좋아.”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잖아!”
스읏!
월영은 벼락같이 고함을 내지르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리고 검을 잡았다.
“그 검 뽑으면 죽는데도.”
사내가 눈빛을 빛냈다.
‘으음!’
월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 무척 강하다. 뭐 이렇게 강한 놈이 있나 싶다. 아직 칼을 뽑지도 않았는데, 태산이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칼집에 꽂힌 칼에서 도기(刀氣)를 느낀다.
검을 뽑으면 사내 말대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침입자를 보낼 수는 없다.
“나도 분명히 말하는데,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너 죽어.”
“쯧!”
사내가 혀를 찼다.
월영은 그 모습이 마치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기 전에 혀를 날름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스읏!
월영은 옆으로 반보 움직였다.
팽팽하게 곤두선 긴장감을 풀 요량으로 몸을 움직였다. 근육을 풀었다. 하지만 눈은 사내의 눈에 꽂혀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내의 숨도 가늠했다.
승부는 일 초에 끝난다.
월영이 살기 띤 눈초리로 검 뽑을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사내는 장난스럽게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나 서리형개야. 들어 봤지?”
“뭣……!”
월영은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사내가 강한 줄은 알았지만 서리형개? 이 시대 최강자 중 한 명이 눈앞에 선 사내?
* * *
“서리형개가?”
몽설은 미간을 심하게 찡그렸다.
한순간,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서리형개가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간과했다.
자신도 실수했고, 아삼도 실수했다.
취화원은 아직 서리형개에 대해서 조그만 꼬투리도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막연히 풍도곡에 있으려니 생각했다.
“결전을 준비하겠습니다.”
팔 장로가 차분하게 말했다.
“……아뇨.”
몽설이 고개를 저었다.
몽설은 잠시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끊었다. 하지만 곧 다시 말했다.
“지금은 아녜요. 지금 싸우면 우리는 전멸해요.”
“원주님,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필요는…….”
“이번에는 머리를 숙여야 해요.”
취화원 경계망이 무너졌다.
감시하라고 펼쳐 놓은 사람들이 장님이라도 된 듯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서리형개가 취화원 제일 경계권에 들어선 다음에야 알았다.
이미 취화원 중심처에 들어선 후에 알았으니 대응할 방법이 전혀 없다.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취화원이 멸절한다.
서리형개와 싸우더라도 다른 장소에서 싸워야 한다. 그래서 서리형개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서 말해 달라고 지시했다.
보고가 먼저 들어왔다고 해도 당장 싸우러 가지는 않는다. 혈검경을 상당한 경지까지 습득했지만, 아직 일홀도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서리형개는 곧 아걸이다.
서리형개를 아걸과 같은 수준에 놓고 보면 딱 맞을 것이다.
몽설은 아걸을 이길 자신이 없다. 아걸이 마음만 먹으면 취화원을 멸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서리형개와도 싸워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서리형개가 지금처럼 취화원을 급습하려고 한다면 당장 마중 나갔다.
취화원이 아닌 곳, 자신이 죽어도 취화원은 건재할 수 있는 곳에서 싸웠다. 그런 곳이라면 마음 놓고 혈검경 속의 검공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지면 모두가 죽는다.
몽설이 말했다.
“서리형개, 싸울 줄 아는 자네요. 이렇게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제 알았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진 거예요. 싸우지 말고 데려오세요.”
“원주님! 저희도 이번에 충분히 경험해서…….”
“충분하지 않아요.”
몽설이 팔 장로의 말을 막았다.
“겨우 한 번 싸운 것 가지고 충분하다고 말하면 곤란해요. 그러면 허도기는 전장을 누볐는데, 뭐라고 말해야 하죠? 서리형개, 아걸도 못 막은 칼이에요. 누구도 막지 못해요.”
“음…….”
“데려오세요. 충돌 일으키기 전에 서두르세요.”
몽설이 차분하게 말했다.
* * *
서리형개가 월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귀문에서 가져온 돈으로 이곳을 산 것 같은데, 아닌가? 정동에서 훔쳐 온 돈은 아직 쓰지도 못했을 거고. 남의 걸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되지.”
“…….”
“어떻게, 베고 지나갈까, 아니면 원주한테 안내할래?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서리형개, 잘 왔어. 네 손에 우리 형제들이 참 많이 죽었거든. 장로님도 돌아가시고. 너 같은 놈을 원주에게 안내하라고? 요즘 개새끼들은 풀 뜯어먹는 소리도 하나 보네.”
“하하하!”
서리형개가 웃었다.
“뭐, 그냥 밟고 가지.”
저벅! 저벅! 저벅!
서리형개가 거침없이 걸어왔다.
월영은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재빨리 검을 뽑았다.
차앙!
순간, 서리형개가 허공에 신형을 붕 띄웠다. 손에는 언제 뽑았는지 번뜩이는 칼이 들려 있었다.
쒜에에엑!
파공음도 뒤늦게야 터졌다.
‘빠르다!’
월영은 숨이 막혔다.
서리형개가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을 봤는데, 어디로 갔는지 형체를 잃어버렸다.
몸이 베이는 순간이다. 그때,
촤라라라락! 촤라라락!
사방에서 벌떼가 맹렬하게 날갯짓하는 소리가 울렸다.
쒜에에엑! 쒜에엑!
허공을 찢는 바람 소리도 울렸다. 얼굴 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강풍도 느껴졌다.
‘천폭시(天瀑矢)!’
월영은 방금 일어난 소리가 무엇인지 안다.
이번에 정동 싸움을 하면서 터득한 공격법이다.
화살을 쏘되 사람을 겨냥하지 않는다. 일정한 범위를 노리고, 면적 단위로 쏜다.
서리형개를 노리고 쏜 화살이 아니다.
서리형개가 떠 있는 허공을 중심으로 사방 일 장을 화살로 휘감아 버린다.
“하하하! 하하!”
따당! 땅땅! 따따땅!
서리형개가 칼로 화살 더미를 쳐내며 물러섰다.
천폭시는 사방 일 장 범위 안에 화살 삼백 대를 틀어박는 죽음의 공격법이다. 순식간에 하늘에서 거대한 폭포가 확 쏟아져 내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서리형개는 매우 여유 있게 피했다.
원래, 월영은 천폭시가 끝나는 시점을 노려서 다시 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첫 번째 접전은 검을 써 보지도 못하고 당한 꼴이다. 그러니 두 번째는 확실하게 선공을 취한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얼음처럼 찬 무공을 펼친다.
‘사생락이면……!’
그때 월영의 등 뒤에서 잔잔한 음성이 울렸다.
“취운이라고 해요. 싸움을 말리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화살을 썼어요. 양해 부탁드려요.”
취운이 나타나서 서리형개에게 포권까지 취해 보였다.
“너 미쳤어? 이놈은 우리 형제를……!”
월영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취운이 월영의 귀에 대고 빠르게 말했다.
“네가 이러면 우리 다 죽어. 전력을 집중해야 해.”
“음……!”
월영은 침음했다.
이것 역시 정동 싸움에서 얻은 교훈이다.
정말 강한 상대를 만나면 비굴하더라도 싸움을 피해야 한다. 일단 힘을 합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모일 때까지 참는다. 물러선다. 그러다가 모두 모이면 한꺼번에 공격한다.
뿔뿔이 흩어져서 죽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 다 같이 모여서 공격하면 적어도 검은 그을 수 있다.
취운이 월영의 옷깃을 잡아서 뒤로 빼내며 말했다.
“원주 님께 안내하겠습니다. 칼은 거두시죠.”
“이미 뽑은 칼이니 그냥 들고 가지. 또 뽑기 귀찮잖아? 그런데, 취운이라고 했나?”
“네.”
“몽설이 죽으면 네가 취화원주가 되겠군.”
“아뇨. 원주님이 돌아가시면 취화원도 사라지죠. 우리 모두 원주님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래? 아쉽군. 몽설을 죽이고 취화원주 자리를 맡겨 볼까 했는데.”
“저 새끼가……!”
월영이 발끈하는 것을 취운이 다시 붙잡았다.
“하하하! 재미있어. 성난 암고양이가 따로 없군. 잘못하면 할퀴겠어. 하하하!”
서리형개는 마치 제집에 온 듯 편안해 보였다.